[에세이] 괜찮아 말고, "진짜 괜찮습니다"를 위해
괜찮아 말고, "진짜 괜찮습니다"를 위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다 있어
이 글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진부하게도 무언가를 하자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레 에세이 코너로 향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떨려도 괜찮아, 쉬었다 가도 괜찮아, 느려도 괜찮아, 천천히 가도 괜찮아. 괜찮다는 제목의 책이 참 많았다. 물론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한때 반짝이는 트렌드인 줄 알았던 토닥거림이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었다. 미묘하게 다른 자세를 취하고는 있지만 소파에 걸터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캐릭터들이 보였고, 그만 예전 생각이 났다. 가만히 서서 잊어버릴까 메모를 열어 한 줄을 썼다. 그게 이 글의 첫 문장이다.
이 글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진부하게도 무언가를 하자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위로받을 것 같은 에세이들은 내용을 보지 않고도 집으로 데려오는 일 말이다. 감성 글귀들은 스마트폰으로도 볼 수 있지만, 홀로 있을 때 휴대폰을 켜면 모든 이들에게 연락을 하고 말 것 같았다.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 전화해 만나자고 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전화해 고독하다고 찡찡댈까 봐. 실제로 방황하던 나는 매 순간 흑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러니 더 이상의 흑역사를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을 끄는 게 답이었다.
스마트폰과 친구들 없이 둥실 떠오른 시간들은 에세이로 메꿨다. 작가를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정말 많은 에세이를 읽었다. 그들은 내게 방황해도 괜찮다고 했으며 쉬어가도 괜찮다고 했다. 온전히 나를 돌보라고 했으며 요리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조언이라는 걸 처음 듣는 사람처럼 책에 쓰인 모든 지침을 따랐다. 해야 할 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할 일은 덮어뒀다. 흥미를 좇았다. 의식주에만 올인했다.
나를 위하겠다며 비싼 옷을 사고, 혼자 있을 때도 비싼 음식을 먹었다. 공부와 일은 저 멀리였다. 나는 당당하게 내 행동에 이유를 붙였다. 지금은 쉬어가도 괜찮아.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늦은 게 아니야. 이제까지 열심히 살았고, 우울증이 더 심해질 수 있으니까 내 멋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거야.
몸과 마음은 당연히 편해졌다. 간섭 없이 먹고 싶은 걸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노니까. 글을 쓰거나 외국어를 익히는 일, 역사를 공부하는 일 같은 자기 계발은 저 멀리로 뒀다. 내가 진짜 괜찮을 때까지는 계발 따위 없는 거야.
그때의 나는 쉬지 말았어야 했는가?
당연히 아니다. 쉬었어야 했다. 미래만 신경 쓰느라 정작 지금의 나는 놓쳤던 내게 상을 주어야 했다. 누군가가 주는 보상이 아닌 내가 내게 주는 상. 그러니 글쓰기나 과제는 잠시 미뤄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탱자탱자 먹고 노는 일, 돈을 쓰는 일상이 점점 굳어지고 만 것이었다. 심리적으로 괜찮아졌을 때, 그러니까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휴대폰을 들어 흑역사를 만드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을 때에도 나는 내 일을 하지 않았다. 현재를 살았으니 하루 한 시간 정도라도 내일의 나를 위한 일을 했어야 했는데도 나는 그저 일찍 눈을 감았다. 피곤하니까 잘 거야.라는 마음을 갖고서.
에세이는 많이 읽었으나 그건 결국 '괜찮아, 쉬어도 돼'라는 나의 심리가 반영된 글뿐이었다. 실제로 내가 가지고 온 책이었으니 책임을 전가하려는 건 아니다. 그 책들은 내게 하루의 기쁨을 알려줬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마음을 함께 가져갔다. 에세이는 지금의 행복에 집중하게 해 준 장점이 있었고, 반년 뒤의 행복은 덮어두게끔 만들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만들었으니까.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어떤 이들은 괜찮아진 마음을 갖고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겠지만 나는 왜 여기서도 약한지.
언제부터 놀았는지 세는 것도 까마득할 때, 불안이 찾아왔다.
- 나, 그런데 이렇게 놀아도 되나? 이제 그만 놀아야 하나?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대답했다.
- 응, 놀아도 돼. 괜찮아. 쉬어도 된댔어.
웃프게도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이런 물음이 반복됐다. 아, 이제 뭐 해야 하는데. 이젠 공부 좀 해야겠지. 과제는 모레 까진데 지금이라도 해야 되는 …… 그러다가 픽, 고꾸라지는 식으로. 눈을 뜨면 점심이 찾아오고. 나는 다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 탱자탱자 놀고.
괜찮아, 다독이는 일이 아닌 진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배를 긁으며 햇살을 쬐던 어느 날의 오후.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대박을 쳤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는 자신이 회사를 다니면서도 어떻게 글에 대한 열정을 발휘했는지 요목조목 얘기했다. 그의 인터뷰를 읽으며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난 대학생인데도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심지어 우울증까지 나았는데도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냔 말이야. 작가는 출근 전 회사 근처 카페에 나가 3시간가량 집필을 했다고 밝혔다. 머리맡에 쌓인 괜찮아 시리즈를 쳐다봤다. 이제는 안 됐다. 게으르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지만, 느리게 걸어가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게 단순히 괜찮음이 아닌 '진정 이래도 되나'라는 불안감이 찾아오면 딱 거기까지 덮고 다시 내 일을 해야 했다. 미래를 위한 일. 놀았다는 자책감을 덜 수 있는 일 말이다.
휴식도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렇지만 휴식의 MAX 치가 다 차 버렸을 땐 다시 움직여야 했다. 땀을 흘린 뒤에 먹는 음식이 맛있는 것처럼. 땀을 흘리지 않은 나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예전만큼의 감동이 없었다. 달달한 걸 많이 먹으면 기본으로 달달한 건 달게 느껴지지 않는다.
방에 널브러진 에세이를 주워 담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모든 책을 반납했다. 쉬어도 괜찮다는 책,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일을 합리화로 삼기 않기로 했다. 충분히 쉬었다면 이제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동화 작가가 꿈이었으니 동화를 쓰는 게 가장 중요했다. 몰입하기로 했다.
아침형 인간이 아닌지라 점심에 눈이 떠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다면 새벽까지 깨 있어야지. 손가락을 움직일 힘이 남아있다면 한 줄이라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시험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잠을 쫓으며 공부했다. 몸은 피로했으나 이상하리만큼 즐거웠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구나. 아주 약간은 걸어가고 있구나. 오늘도 이만큼이나 했으니 내일은 뛰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리고 나는 반년 간 하루 한 발짝을 디딘 덕에 하나의 성취를 이뤘다. 걷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을 하나의 정류장으로. 정류장에 도착한지라 나는 또다시 쉬고 있지만 예전처럼 자책감이 몰려오지는 않는다. 그때와 다르게 '언제까지는 쉬어야지'라는 시기를 정했으므로. 내일의 행복보다 오늘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므로. 오늘도 중요하고, 내일도 중요하다. 지금이 중요한 만큼 십 년 뒤도 중요하다.
괜찮을 거야 라고 다독이는 말보다도 효과가 좋은 건 진짜 괜찮다는 말이 아닐까. 더 이상 괜찮다고 다독이지 않아도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가니 이제야 알겠다. 그러니 나는 잠시 다독거림을 멈추기로 했다. 잘 해내는 중이라는 확신을 가지며 말이다. 괜찮을 거야 가 아닌 나 괜찮아! 라고 더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날을 위해서.
오랜만에 올라온 글이네요.
살다가 뒤 돌아보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가장 치열하게 했던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 이었습니다.
요아님도 하고 싶은 일 치열하게 해 내시다 보면 행복한 순간이 올겁니다.
다만 건강 잃지는 마세요. 제가 좀 그랬습니다. ^^
제가 보팅지원하려고 svc 토큰을 지원 받았습니다.
보팅 신청 해 놓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banguri님! 오랜만에 찾아와 글 썼는데 이것까지 알아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가장 치열하게 했던 때가 행복한 순간이라니. 일하기 싫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 지라 글을 쓰면서도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그 걱정이 사르르 녹는 말씀이네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큰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무엇을 이루지 않더라도! 건강.....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이시군요.. 챙길게요! 항상 감사해요. 읽어주셔서도요!
:)
현요아님처럼 뚜렷한 목표가 있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천천히 느리게 가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속도보다는 방향이죠! 그런데 빨리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반절의 마음 때문에 잘 가고 있다 생각하더라도 금세 조급해지는 것 같습니다. @epitt925 님의 마음을 배워야겠어요 :)
^^
:) 오늘 비가 오네요, 우산 챙기세요!
저도 한동안 슬럼프라며, 최상의 컨디션으로도 모자란데 이런 상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며 미루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푹 쉴 수도 없었죠. 어차피 마음 한켠에, 아무 의미 없는 하루를 보냈다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은 진정한 휴식이 될 수 없었으니까요.
예전의 제가 생각납니다. 당시의 저는 그 힐링을 표방한 에세이들을 항상 나쁘게 보았습니다. 한창 나아가야 할 사람이 누워있을 때 필요한 말은 당장 일어나서 걸으라는 호통이지, 누워있어도 괜찮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어느새 누워있고, 그런 저에게 옛날의 나, 움직이던 나를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