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서로의 상처가 안도감으로 변하는 순간

in #kr6 years ago (edited)

서로의 상처가 안도감으로 변하는 순간

   S o u l  e s s a y  


 두 남녀가 만난다. 정상적인 사람들의 만남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큰 충격으로 인해 정서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

 남자는 아내의 외도 장면을 본 뒤 광기에 휩싸여서 아내의 정부를 폭행하고 직장과 아내를 다 잃고 8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다녀왔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분노와 감정을 조절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

 그런 남자에게 우연히 다가온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남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공황 상태를 겪고 있다. 정신적인 문제와 외로움으로 섹스 중독이 된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한다.

 그녀가 남자를 본 이후로 남자에게 저돌적으로 들이대기 시작한다. 남자의 아침 조깅 길에도 불쑥 나타날 정도다. 남자는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남자는 옛 아내를 되찾고 싶다. 하지만 아내는 냉담하다.

 계속 들이대던 여자는 남자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아내를 되찾기 위해서는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니, 자신과 함께 댄스 대회에 나가자는 것이다. 남자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여자와 댄스 대회를 준비한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내용이다. 남자 주인공은 브레들리쿠퍼, 여자 주인공은 제니퍼 로렌스였고, 제니퍼 로렌스는 이 영화로 22살의 어린 나이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다.

실버라이닝2.jpg

 배우자를 상실하며 상처 입은 남녀를 영화는 코믹하게 그린다. 상황을 일부러 웃기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고 보이는 행동들의 비정상성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들을 내 주변에서 만났다면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저런 일을 겪고도 저렇게 미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 하는 이해로 바뀌게 되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어가는 이야기는 언제나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 받은 사람의 냄새를 맡고 그 슬픔을 알아챈다. 이 대목에서 연약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의 깊은 연대가 생겨나고, 그 연대는 건강한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

 누군가의 아픔과 시련은 그것을 겪어 본 사람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나의 경우도, 우리 집의 가정사는 늘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수박씨 같았다. 내뱉고 싶었지만, 아무나에게 말했다가는 나의 아픔이 싸구려로 전락할 것만 같았다. 내가 가정사를 털어놓는 경우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아, 이 친구는 내 아픔의 무게를 이해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 때 비로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내 아픔을 들었던 친구들은 자신의 아픔 덕에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겪는 ‘아픔’은 이런 쓸모를 갖기도 한다.

 성공회 신부인 헨리 나우웬이 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다. 그는 책을 통해, 상처를 가졌던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온전한 ‘치유자’는, 아무런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상처가 없었던 사람은 상처 입은 처지에 대해 동정할 수는 있어도 깊이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 봤던 ‘그랜드캐니언’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위해 몰려가는 그랜드캐니언은 사실상 상처 받은 거대한 협곡이다. 오랜 세월동안 빙산에 긁혀 부서지고 천재지변에 무너진 결과 탄생한 곳이다. 깊은 협곡, 바위산에 깊게 새겨진 흔적들을 가진 그랜드캐니언은 상처투성이의 장소인 것이다. 그 상처를 보고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무 어려움 없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온 사람보다, 시련을 극복한 사람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실력 외에 어려운 시절의 ‘스토리’ 하나쯤 가지는 게 우승의 요건이 되곤 했다. 누군가가 ‘상처’와 ‘아픔’을 극복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결되지 못한 상처는 위험하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주변을 할퀴기도 하지만, 잘 아문 상처는 한 사람을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든다.

 그래서, 상처 입어도 된다! 고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아픈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들은 당장에 별 위로가 되지 못한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받게 된 ‘상처’,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겪게 되는 ‘아픔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지금은 별 값어치 없는 동전처럼 보이지만, 한 푼 두 푼 적립해 놓으면 꽤 가치 있는 물건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동전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많지 않지만, ‘공감의 눈’은 그 동전으로만 살 수 있다.

 어린 날엔 ‘내 아픔 아시는 당신’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것이 친구든, 연인이든 말이다. 나와 친한 친구나 사귀었던 사람들 중에는 남부럽지 않을 ‘아픔’이 하나쯤 있는 사람이 많았다. 뭐 그렇다고 내 친구들은 죄다 상처투성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본능적으로 아픔이 있는 친구와 더 마음을 깊게 나눌 수 있었다고나 할까. 아픔을 나눈다는 건 곧 비밀을 나누는 것이고, 비밀을 나눈 친구 사이가 더 깊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연약한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 기대는 광경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강한 이유를 보여준다. 나 강하다고 선전하는 인간, 젠체하는 인간은 잠시 부러움을 살 순 있어도 아름답게 느껴지진 않는다.

 약해빠져서 서로 기대도록 만들어진 게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고 가는’ 그런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영감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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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뱉고 싶었지만, 아무나에게 말했다가는 나의 아픔이 싸구려로 전락할 것만 같았다.

이보다 얼마나 더 공감할 수 있을까요.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 받은 사람의 냄새를 맡고 그 슬픔을 알아챈다는 대목도, 남부럽지 않을 ‘아픔’ 이라는 표현도. 감사하게도, 저는 이 글을 미소 지으며 읽었습니다 :)

쏠메님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스팀잇에서 얻은 큰 기쁨 중 하나랍니다. 쏠메님의 글도 반짝반짝, 읽는 제 마음도 반짝반짝 :) 늘 고마워요, 쏠메님. 시간차 리스팀하겠습니다!

이 댓글 하나가 고팍스 보팅보다 몇배는 더 좋습니다. ㅎㅎ 어떤 글은 써 놓고 보팅이 어느 정도인지 바라보게 되고, 어떤 글은 어떤 댓글이 달릴까를 기대하게 되는데 이 글은 후자였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할까가 궁금했는데, 스프링필드님의 공감을 표현하는 이 말들이 제가 기다리던 이야기의 모든 게 담겨 있는 것 같아요. ^^

쏠메님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스팀잇에서 얻은 큰 기쁨 중 하나랍니다.

제가 이런 영화를 누리는구나, 싶어요. 이 말 하나로 제가 글쓰는 명분과 이유가 다 채워지네요. 감사해요. 저도 늘 봄마당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답니다ㅎ

저의 글도 늘 기다려 주세요...

아임 웨이팅 포유어 롸이팅! 두근두근 기다립니다^^

라이팅이 아니라 롸이팅이라 해주시니 왠지 더 퐈이팅 넘치는 느낌이네요 ㅎㅎㅎ

메가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스팀잇에서 얻은 가장 큰 기쁨인 것을 잘 알고 있답니다..^^

(나의 뮤즈.. 저는 기죽지 않았답니다..이 댓글도 두번 올라가면 진짜 소름...)

아... 괜한 용기를 내셨군요. (낄끼빠빠...)

스팀잇에서 털알이를 만난 것은 미롸클... 그대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스팀잇을 떠났을 지도 모릅니다... 스달 오르면 다시 왔겠지만요...

네.. 스달이 큰 역할을 했던거 같습니다..

당신 때문에 스팀잇 들어옵니다..(무섭죠..)

우리는 운명.. 미롸클..

댓글을 작성하기 위한 글자 자판에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제 마음으로 내용이 훅 치고들어와 한번 휘저어 놓으니 새벽 근무 후 피곤해서 잠시 눈 붙였다 어리한 정신이 바짝 긴장되네요~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설 뇌 였나요? 인간이 쾌락을 느끼는 부분과 아픔을 느끼는 부분이 너무나 가깝게 맞닿아 있어 혼동이 일어날수 있다? 는 내용과 뮤지컬 헤드윅에서 존 캐머런 미첼이 부른 the origin of love 가 자꾸 생각 나네요. 차로 가서 크게 틀고 한바퀴 돌아야 할것 같습니다^^ 풀봇으로도 왠지 부족해서 감사하기만 글입니다.

rideteam님의 마음에 치고 들어가 휘저어 놓았다니, 글에 운동력이 잘 실렸구나 싶네요ㅎㅎ 잘 읽어주신덕에 글이 빛납니다. ^^
쾌락을 느끼는 부분과 아픔을 느끼는 부분이 그렇게 가까이 있었군요. 그래서 맞거나 때리면서 쾌감을 얻는 사디즘 마조히즘이 가능한 거군요.ㅎ 하나 배우네요.
풀봇의 선의 감사합니다. 즐건 불금되세요^^

쾌락을 느끼는 부분과 아픔을 느끼는 부분이 맞닿아 있어 혼동이 올 수 있다...

맞아요... 가끔은 내가 불행하기를 원하는건가... 내 이성은 아니라고 하는데 내 본능은 그때의 그 고통을 다시 느끼고 싶어하는건가 란 생각도 했었네요... 고통이 주는 쾌락도 있었나봅니다... 뭔가 큰 혼동을 했었던 듯요...

매운 불닭같은 격렬한 고통의 맛을 또 느끼고 싶어하는 미친(?)제가 되기 보다는 심심한 아무 맛 없는듯 고소한 밥맛을 느끼며 하루하루 그렇게 심심하고 소소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때의 고통을 다시 느끼고 싶어한다..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네요. 지금 흘러간 시간의 보호막 속에서 고통을 반추하고 그 강렬했던 감정을 다시 겪고 싶어하는.
말씀처럼 심심한 일상이 복인걸, 뭔일이 생기면 새삼 느끼지요ㅎㅎ

네 ㅎㅎ 예전엔 고통스러웠지만 강렬했고 지금은 행복하지만 심심해서 ㅎㅎ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부위가 가까이 있어서 혼동이 왔던거였군요..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 받은 사람의 냄새를 맡고 그 슬픔을 알아챈다. 참 명언이군요. 알아차리고서 아픔을 위로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죠. 그저 나는 아닌듯, 눈을 내리깔고 지나가죠. 반대인 경우를 만나서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는 건,,,,참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의외로 그 기적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을 소원하는 것 같아요.^^

springfield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springfield님의 실제로 책을 내는 사람들 | 스팀잇의 더 큰 가치

..........mmerlin 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이 글 말고 전에 제 글을 읽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kyslmate 님과 나누는 댓글에서 제가 요리했다는 사실만으로 젝

그냥 말수적게 공감표현하겠습니다.
좋은 영화 ,책 주어갑니다.
고맙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영화, 책 다 좋습니다^^

제가 가져왔던 크고작은 상처를 돌아보게 되네요. 전 그것이 아물어서 지난 일이 된 후에서야 입밖에 꺼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너무 좋아하는 영화에요:)

네 다 정리가 되어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상처가 있지요. emotionalp님도 이 영화 좋아하시는군요. 진맛을 아시는군요!^^

긴 말 필요없이 영화 꼭 보아야겠어요..

상처를 다루지만 재밌고 유쾌한 영화입니다. ^^

저의 상처도 잘 아문 걸까요?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이 아물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쏠메님의 글은 항상 마음이 따듯해지네요. 이 영화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는데,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고 싶어질 만큼 좋은 글이에요.

말할 때 좀 편해졌는지 여부를 살펴보면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가진 장점과 연기력 갑인 두 배우의 힘이 잘 어우러진 영화였죠~~ㅎ

예전에 제가 가지고 있던 상처를 이곳에 드러내보이니 많은 분들이 연고를 발라주시더군요. 모든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수는 없겠지만 조금 달라진 내가 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새살이 돋듯이.

서로 연고를 발라주는 우리 인간, 그리고 이웃들. 이 정도만 해도 살아갈 동력은 충분해지는 것 같아요^^
저도 연고 든 사람이면 좋겠구요. 이터널님 새살도 다 돋으셨길 바랍니다ㅎㅎ

저는 상처입은 사람을 보둠어 주는 걸 참 어색해 해요.
살면서 상처를 안 입은 건 아니지만, 오래 담아두지 않는 성격이어서인 거 같아요.
그냥 들어주고 같이 있어 주려고 하지만... 제가 더 힘들어지더라구요.
그걸 못 견뎌하기도 하고...

gghite님 역시 쿨한 성격이신 것 같네요. 오래 담아두지 않는 성격~~ 스트레스가 많이 없었을 거 같아요.^^
gghite님이 만들어주시는 빵 하나면 상처를 위로하는데도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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