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헤겔과 셸링, 두 친구 이야기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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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서양근대철학의 끝판왕, 헤겔에게는 유명한 친구가 둘 있었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집안, 즉 공부 열심히 해서 고소득 전문직이 된 아버지와 역시 부르주아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헤겔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공부해서 전문직 되는 것.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어머니는 변호사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낙점한 헤겔의 직업은 설교사였다. 그야말로 ‘사짜 돌림’ 집안이다.

지금은 자동차의 도시가 된 슈투트가르트에서 나고 자란 헤겔은 18살에 튀빙겐 대학교에 입학한다. 3인실 기숙사에 배정받았더니, 룸메이트로 횔덜린이란 친구가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 독일 시인 그 횔덜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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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횔덜린>

그런데 13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도 방 안에 침대를 배정받은 게 아닌가? 이 소년의 이름은 셸링이다. 맞다. 유명한 독일 철학자인 그 프리드리히 셸링이다. 역사적 인물 세 명은 룸메이트였던 것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당연히 셸링이었다. 불과 13세에 대학생이 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신동이었다. 그는 5살 많은 형인 헤겔보다 훨씬 뛰어났다.

셸링은 십대 때부터 주목받았다. 그는 헤겔과 함께 지낸 기숙사에서 미청년으로 자라났다. 잘생긴 얼굴과 매혹적인 눈매, 우아하게 피어난 곱슬머리에 감성적인 말솜씨는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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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요제프 (폰) 셸링>

당시 독일사회는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이 남긴 난제를 해결해주기만 하면 누구든지 시대의 지성으로 모실 준비가 돼 있었다.

셸링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스무 살이 넘어가자 비록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지만 '귀족적 정신의 소유자'로 인정받았다. 이런 사람을 귀족으로 예우할 수 없다면 독일사회가 미개한 것이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폰(von)' 셸링으로 불리며 어디를 가나 봉건 영주에 해당하는 의전을 받았다.

그리고 불과 23살의 나이에 예나 대학교의 철학과 정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그만큼 독일인들은 급했다. 당시 독일사회는 개판이었다. 독일에도 희망이 있다고 말해주는 철학을 전개한다면 시대의 지성이 될 만했다. 물론 셸링 자신의 타고난 스타성도 한 몫을 했다.

그에 반해 헤겔은 대기만성형이었다.

헤겔 철학은 견고한 기반을 밑바탕으로 정밀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다. 당연히 철학이 완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다. 헤겔은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가정교사를 전전하며 경제난에 시달렸다. 설교사 되기는 싫은데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기도 힘들었다. 참고로 슈투트가르트는 독일의 대구다. 그러나 대구 출신 개룡남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비로소 헤겔은 철학에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한다.

헤겔의 생각은 이 정도였다.

‘뭐 좋은 일하다 죽으면 천국가고 나쁜 짓하다 죽으면 지옥 가겠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 세상이 이 모양인데, 세상은 인간의 몫이잖나? 종교야 착하게 살면 그만인 거고, 인간은 인간의 길을 가야지.’

인간의 길이란 신학이 아닐 철학이었다.

그래봐야 변변한 커리어라고는 없는 반백수였다. 셸링은 말 잘 듣는 동네 형 헤겔을 돕고 싶어 한다. 같이 연구도 하고 잡지도 내면서 '셸링과 공동작업 했음'이라는 이력을 만들어주었다.

'아이고 형도 먹고 살아야지, 이 형이 생각하는 게 좀 느려서 그렇지 사람은 참 진국인데 말야...'

해서 자기가 있는 예나 대학에 이력서를 쓰게 한다.

"헤겔 형 내가 잘 말해볼 테니까 이력서 넣어 봐! 거기 내 이름 팍팍 넣어! 셸링이랑 이거 했다 저거 했다 막 자랑해! 내 얼굴 봐서라도 형 채용하게 해줄 테니까 응?“

헤겔은 채용되었다. 셸링 얼굴 봐서 됐겠지. 그런데 원외교수(extraordinary professor)였다. 비정규직 강사 같은 거였다. 원외교수직은 봉급이 나오지 않는다. 열정노동이라도 굳이 하고 싶으면 기회는 줘보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이런 기회라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때가 1805년. 헤겔의 나이 3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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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대학교>

헤겔은 평소 셸링의 철학에 비판적이었다. 하긴 각자 새로운 사상을 제시해보겠다는 야심가들의 철학이 동일할 리가 없다. 그리고 셸링도 헤겔의 비판을 인정했다.

그리고 1807년. 방대한 헤겔 철학의 밑그림이라 할 수 있는 <정신현상학>이 출간되었다. 셸링은 이 책을 읽고 길길이 날뛰었다. 자신을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원래도 두 사람의 철학은 달랐는데 말이다.

셸링은 재반박하는데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했던 것이다. 그는 헤겔의 정밀하면서도 장대한 철학을 보고 자신이 헤겔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헤겔은 언제나 자신의 밑에 위치할 거라 믿었던 셸링은 바닥을 드러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배신이다. 내가 이 인간에게 어떻게 했는데..."

이런 생떼에 맞서 헤겔은 당연한 말로 타일렀다.

"나는 셸링의 철학을 비판했지, 그의 인격을 비판한 것은 아닌데 도대체 왜..."

그리고 경제적인 차원에서나 명성의 차원에서나, 헤겔은 셸링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어차피 예나 대학 교수직은 무급이었고 <정신현상학>은 오직 혼자 써낸 저작이다. 이후로 헤겔이 승승장구한 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저작 덕이다. 셸링의 태도는 어거지였다.

더욱이 셸링은 "어떤 철학자가 난해하다는 말은, 뛰어난 반박자가 없다는 뜻이다."라는 말로 멋을 부린 적이 있다. 즉 자신의 철학에 난해하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할 수 있으면 제대로 비판이나 해 보라는 뜻. 그래놓고 정작 헤겔에게 탈탈 털리고 나자 사람이 유치해지고 말았다.

주목받는 지성인이 된 헤겔은 곧바로 뉘른베르크 시에서 러브콜을 받는다.

"뉘른베르크 김나지움 교장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정신현상학>을 수업 교재로 쓰는 것도 허락해주십쇼 선생님!"

이렇게 헤겔은 한 도시의 최고선생님으로 취직한다. 드디어 생활이 폈다. 교장실, 관저, 하인, 서재, 두둑한 봉급에 철학활동에 필요한 시간여유까지 제공받게 되었으니.

그리고 뉘른베르크로 이사한 지 3년 후 유서 깊은 토착 대귀족가문의 장녀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셸링의 열폭은 점점 뜨거워진다.

한 번 사상적 체계를 완성한 헤겔은 저작과 강연을 쏟아내게 되고, 그 수준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셸링이 감히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차원이었다. 그러다 에를랑겐 대학, 베를린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세 곳에서 러브콜을 받는다. 하나같이 유럽의 최고 명문대들이다.

헤겔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선택하지만, 2년 후 베를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바이마르, 파리, 프라하 등 독일 국내와 외국의 대도시들을 여행하며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예우 받는 명예로운 생활을 수년간 한다. 이쯤 되면 셸링은 혼겁이 털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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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하는 헤겔>

그러다가 1830년 베를린 대학교의 총장으로 취임하고 프로이센 왕국으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았다. 이때가 되면 헤겔의 강의는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청강생으로 미어 터졌다. 셸링은 이제 심신이 흰살생선이 젓가락에 발리듯 분리되는 지경이다.

그러나 1년 후 헤겔은 갑자기 사망한다. 콜레라에 걸린 탓이다.

그리고 전 유럽이 헤겔의 추종자로 넘쳐나게 되자, 권력자들은 슬슬 두려움을 느낀다. 헤겔의 역사발전 이론에 따르면 자신들은 결국 정리되어야 할 '적폐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헤겔을 싫어하면서도 네임밸류가 있는 지식인을 찾았다.

바로 셸링이었다.

셸링. 한때는 유럽의 낡은 잔재를 밀어내고 새 시대를 앞당기는 철학을 해보겠다며 싱싱한 열의를 불태우던 젊고 아름다웠던 지성 셸링. 그는 이때쯤 헤겔을 흉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꼰대가 되어있었다. 자신감과 총기가 넘치던 얼굴엔 불만이 깃든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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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셸링>

셸링은 자신이 '보수 반동'이라고 생각했던 구체제 귀족들의 입맛에 맞춰 헤겔의 진보성을 깎아내리는 강연을 하며 여생을 보낸다. 그야말로 헤겔 철학을 위한 발판으로 시작해, 헤겔 철학의 잔여물로 삶과 사상을 마쳤다. 이렇게 하찮아질 필요는 없었는데.

셸링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출간한 지 2년 후인 1809년 <인간적 자유의 본질>을 발표하며 발버둥을 쳐봤으나 거기까지였다. 그는 다음 책을 내지 못했다. 평생 초고만 만지다가 사망했다. 헤겔을 이겨야만 하는데 그의 실력으론 불가능했으니 남은 평생을 초고만 뚫어져라 바라본 결과였다.

18세기 말. 튀빙겐 대학교 기숙사 3인실을 생각해 본다. 옆 나라 프랑스에서 시민혁명 소식을 들으며 우리 독일은 틀려먹었다고, 하지만 우리 독일인도 그들처럼 해낼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신동 셸링과 그의 언변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다섯 살 많은 범재 헤겔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한때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진보사상의 동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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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힘은 차근차근 쌓아올린 바탕이었네요

노년의 셀링을 보니 그 모습에서 변한 그의 생각이 보이는듯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헤겔이 콜레라로 사망했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좋은글 감사합니다. 꾸준함이 재능보다 더어렵게 얻는 능력인거같네요 ㅎㅎ

와 ㅎㅎㅎ 헤겔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는데, 셸링은 처음들어보네요 ㅎㅎㅎ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리스팅&보팅&팔로우 꾹 누르고 갑니다! 앞으로 좋은 영감 주고 받고 싶습니다!

짱짱맨 호출로 왔습니다!
한주 수고하세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는데 ...ㅎㅎ
시작과 끝이 너무 다른 두사람이네요 ㅎ

재밌게 웃으면서 읽었습니다. 두 인물의 독특한 개성에.......엄청 신나네요! 고맙습니다! 팔로우할께요 리스팀합니다! 굿 럭!

헤겔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군요. 누가뭐라하든 소신있게 내길을 묵묵히 갈 줄 아는 신념이 있어야 하나봅니다. 셀링이 안타깝기도하고, 이런 인간사는 계속 반복되는거 같네요. 넘 재밌게 보고가요:)

셸링이, 열등감(?)을 극복하고서 관계를 계속 존속하고 유지하는 방항으로 함께 했다면 스스로도 더 좋은 철학자가 됐을 듯 한데, 안타깝네요.

  • 좋은 글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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