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의 아픈 감상 - 도시의 삶은 허기지다
"바쁘게 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더라."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김태리 분)의 자조다.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 커피를 끼고 살며, 밥도 거른 채 시간을 쪼개 하루를 보내는 우리들은 멀리서 보면 눈물 날 정도로 똑같을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오는 이유는 제각각이겠다만 그 심리에는 얼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반복적으로 펼쳐지는 장면처럼, 시골의 삶이란 그저 먹고 사는 데에만 온 종일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일년 내내 허리 굽도록 논과 밭에서 일해야 하고, 추수한 음식을 요리하는 데에는 한나절이 걸린다. 식재료 하나, 조리 도구 하나를 사기 위해 한 시간도 더 걸리는 읍내를 나가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삶은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다.
게다가 노력한다고 결과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주인공 혜원의 고모는 태풍으로 쓰러진 농작물을 보고도 화도 내지 않는다. 무엇을 재배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갖은 애를 써도 결과는 그저 자연이 결정하는 것이다. 수십년 간 이런 걸 반복해서 보다보면 시골 어르신들이 그런 것처럼 자연스레 운명 순응론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혜원이 떠나고자 했던 어머니의 공간이란, 주어진대로 산다는 그 자조와 체념에 대한 경기 어린 거부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심리적 거리 없이 무차별적으로 좁히고 들어오는 옛 어른들의 질문, '남자 친구는 있냐, 시험은 붙었냐, 앞으로 계획은 뭐냐.'는 그 흔한 레파토리에 젊고 어여쁜 청춘이 무엇을 느꼈을지 예측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끔 명절 때 듣는 것으로도 충분한 스트레스이니 말이다.
시골의 삶이 이 같이 먹고 사는 데에만 어마어마한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것이라면, 도시의 삶이란 그저 남들만큼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에 대한 자각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도시는 허기지다. 이건 돈이 많아도 마찬가지다. 도시에도 먹거리는 넘치고, 이국적인 맛집은 더 많다만 이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의 미식가이자 법관인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하라. 그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말해주겠노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당신이 오늘 먹은 것이 무엇인가 묻고 싶다. 혹은 스테인리스 식판을 들고 길게 줄을 서서 방부제와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었거나, 혹은 편의점에서 간단한 레디메이드 음식을 섭취하지는 않았나?
잠깐 이화여대 석좌교수 이어령 교수님이 쓴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에세이를 인용해보자.
프랑스의 빵은 참 맛이 있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바케트를 사 든 신사 숙녀들이 마치 깃대를 들듯 어깨에 메고 지나는 광경을 볼 수도 있다. 아니 그냥 들고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숫제 길거리에서 빵을 떼먹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의 길거리에서 밥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 거지가 아닌 다음에 길거리에서 밥을 먹거나 깡통에 밥을 담아 들고 다니는 사람이란 상상할 수가 없다. 더구나 밥을 가게에서 미리 지어서 사람들에게 판다고 생각해 보라. 같은 주식이지만 빵과 밥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밥만은 자기 집에서 짓는다. 이것이 동양의, 특히 한국의 가족주의를 쉽게 무너뜨리지 않는 요인이 된 것이다. 한솥의 밥을 먹는다는 정겨운 말이 있듯이 식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그 밥맛은 남에게 매매 할 수 있는 상품이 될 수가 없다. 밥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식구 수만큼 손수 지어 먹는 것이며 또 한목에 만들었다가 두고 두고 먹는 것이 아니라 끼니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에 밥은 곧 한가족의 단위와 그 정을 측정하는 구실을 한다. 빵은 식은 것도 먹을수 있지만 밥만은 온기를 지니도록 해야 한다. 식은 밥은 곧식은 정을 의미한다. 생각나지 않는가, 그 춥고 추운 겨울 그리고 그 깊은밤 집안 식구 하나가 늦게 들어오면 그때까지 아랫목 요 밑에 밥사발이 묻혀있다. 사람이 집 안에 없어도 밥은 그 방 안에 있다. 한솥의 밥을 먹는다는것, 뜨거운 밥을 먹는다는것, 그것도 매일같이 되풀이해서 먹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 아내와 남편을, 그리고 형과 아우를 묶어 두는 핏줄의 확인이다.
나는 파리에서 손수 자취를 했었다. 전기밥솥을 사다가 혼자 밥을 지어서는 혼자 먹는다. 그때 마다 눈에는 눈물이 서렸었다. 식구생각이 난다. 절대로 감상이 아니다. 밥을 풀떄 그리고 밥그릇에 옮길 때 내가 홀로 라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프랑스에서 태어나 빵을 먹고 자란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경우가 바뀌어 한국에 와 빵가게에서 빵을 사다 먹었다면 아마도 내 눈에 눈물이 괴지는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이런 정감론을 떠나서 얘기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빵은 고체이기 떄문에, 또 그떄그때 지어 먹는 것이 아니기 떄문에 운반하기가 편하고 집 바깥에서 먹기에도 편하다. 한마디로 말해 집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편하도록 되어 있는 주식이다. 동양 사람들이 (밥을 주식으로 하는) 서양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패했다면 그 원인 중의 하나는 밥이 빵만큼 기동력이 없었다는 데 있을 지도 모른다.
음식 하나만 봐도 서양 친구들의 호전성을 넉넉히 엿볼수 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식민지를 개척했던 그들, 우리 같았다면 밥을 지어 먹고 김치 깍두기를 담아 먹느라고 그야말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났었으리라. 빵의 문화는 개인주의 문화이며 정복의 문화이며 활동의 문화이며 상업의 문화이다. 빵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었고 개척이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분리와 집을 떠나서,고향을 떠나서 행동할수 있는 사회성이 있었다.
밥의 문화는 한솥의 문화이다. 지붕 안에 고정되어 있고 정적이며 집을 떠나서는 살기 어려운 귀향자의 문화이다. 떠돌아다닐 수 없는 문화이다. 그것은 평화의 문화이다. 정말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인은 밥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밥에는 단순히 배만을 채우는 그 물질만이아니라 그 김처럼 정이 서려 있고 사랑이 배어 있기 떄문이다. 정신도 또한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과장이 아니다. 같은 밥이 라도 계모가 퍼 준 밥과 친어머니가 퍼준 밥은 숟가락으로 떠보기만 해도 안다. 빵에는 그런 융통성이 없다. 어디까지나 한 덩어리의 빵은 한 덩어리의 빵일 뿐이다. 그러나 밥 한 사발은 결코 같은 밥 한 사발이 아닌 것이다. 온기가 다르고 양이 다르고 퍼담은 솜씨가 다르다. 빵의 문화권과 밥의 문화권, 나는 배가 고파도 밥을 먹으며 살고 있다.
이어령 교수가 저 글을 썼을 때는 아직 한국이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넘어가던 그 과도기였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 한국 사회도 서양과 같은 레디메이드 음식, 그것도 밥으로 만든 삼각김밥이나 편의점 도시락과 같은 상품이 흔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 같은 음식은 무척이나 편리하다. 하지만 또한 매우 차갑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역시도, 서구와 같이 간편하고 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했다.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전보다 많이 피상적으로 변했다. 이 같은 음식 문화의 변화, 이러한 음식을 먹고 사는 우리의 삶은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편의성 위주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도, 전보다는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만큼 피상적이고 거리가 있다.
잠깐 등장한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 혜원이 전자레인지에 데운 도시락을 혼자 먹는다. 자신이 직접 밥을 싸주던 남자 친구는, 실은 자신을 전혀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관계임을 알게 된 후 더 이상 밥을 싸주지 않는다. 자존심을 굽히고 시골로 돌아온 혜원은 왜 왔냐는 질문에, "배가 고팠다."라고 답은 이 같은 도시에서의 삶과 그 안에서 느낀 혜원의 감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왜 우리는 허기진 도시의 삶을 감수하는가
허기진 도시의 삶을 감수해야 한다면 마땅히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공기도 나쁘고, 물가도 비싼 이곳에서의 삶을 감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볼거리 즐길거리야 몇 년이면 충분히 누릴 수 있을텐데 말이다.
전통적인 가족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쌀 소비량이 줄어든 대신 소비량이 늘어난 것을 보면 얼핏 힌트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커피다. 원래 중동의 기호식품이었던 커피는 미국의 청교도 문화와 결합되며 전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되었다. 커피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각성시키는 음료다. 커피를 마시면 잠에서 깨고 머리가 좀 더 잘 돌아간다. 그 때문에 늦게까지 일할 수 있다.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지금 이 시간에도 공시촌이나 대학가, 직장의 불빛은 커피를 마시며 공부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불빛이 훤하다. 직장에서 늦은 시각까지 불을 킨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그것을 이끄는 것은 미래의 희망일지도 모르지.
이 같은 행위에는, 노력하면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때로는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고 건강도 일부 버려가며 꿈을 쫓는다. 하지만 실은, 그것은 괜찮은 미래를 보장하기는 커녕 시대 자체를 경쟁적으로만 몰아 개별 구성원들 삶의 질을 악화만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경제성장기가 아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더 나은 미래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경제 호황기에 젊음을 불태웠던 전 세대라고 해도 마찬가지. 지금 중년들은 도서관과 일터에서 온 시간을 바쳐왔던 그들의 삶을 그저 좋았던 것만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배우자나 자녀와 대화가 잘 통하는 가장은 얼마나 되는가? 빨간 네온 사인의 도시가 주는 화려한 삶에 대한 유혹이란 실은 사람들을 허기지게만 만드는 것은 아닐지?
바쁘게 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자조하고 허기가 져 견딜 수 없었다는 주인공 혜원의 자조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비극이 있다. 직장 상사로부터의 모멸과, 도회적인 여자 친구의 책망 속에 결국 도망치듯 도시를 떠난 재하(류준열 분)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
시골의 삶
시골에서의 삶은 이 같은 도시의 삶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도시가 더 많은 노동을 시키기 위해, 그 구성원들이 먹는 데에 쓰는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였다면, 시골에서의 시간이란 먹는 데 쓰는 것이 전부이다. 일단 농사를 지어 사시사철을 기다려야 한다. 사소한 재료 하나를 사는 데에도 먼 읍내까지 나가야 하고 정가도 없어서 흥정까지 해야 한다. 직접 물을 길고 장작을 패서 끓여야 하며, 직접 과일을 깎고 쌀을 씻어서 요리를 해내야 한다. 제대로 된 책 한 권 읽을 시간도 없다.
이러한 삶은 흔히 촌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틀 포레스트>는 이런 삶이 정말 나쁘기만 한 것인지를 묻고 있다. 일단 평생 농사만 짓고 요리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 무학의 농사꾼 할머니의 절명시를 한 번 감상해보자. 참고로 이 분은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셨다.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젊은 날 이 시를 읽고 퍽이나 패배주의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맙소사, 마음대로라는 것이 없다니 이 얼마나 비참한 삶이야, 이게 웬 처량이야. 하루 종일 요리하며 자식들이나 먹이는 게 인생의 전부라니! 배우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근데 좀 폼나게 살고 싶어 나름 죽어라 노력해서, 전문직도 되어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도 취직해보았다만, 한 살 더 나이 먹을수록 내가 저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삶보다 제대로 살고 있는지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되더라. 바쁘게 살아도 인생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더라.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그 말이 맞았다. 지금 자기 자리, 스스로의 운명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면 사놓은 전자 화폐가 수십, 수백배가 된다고 해도 고작 몇 달 즐거울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운명이더라.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하다 못해 어떤 시점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것조차도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의지 따위와 무관하게 세월은 쏜살 같이 날라가며 남는 것은 회한이요 깨닫는 바는 모조리 운명론 비스무레하게 된 지금, 다시 질문해 본다. 차리라 욕심이라도 없었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자신이 재배한 음식을 직접 지어서 먹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본인과 직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자 배움이겠지. 괜히 이 영화에서 요리를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내면을 성장시켜 그것을 나누어 먹음으로서 배부러 질 수 있다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주제. 심고 키운 것이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되는 것은 자기 삶을 온전히 성장시켜 넉넉한 인품으로 다른 사람을 안을 수 있다는 것과 그 의미가 동일하다. 어머니(문소리 분)를 원망하는 혜원에게, 어머니는 곶감을 차분히 꽂으며 뜬금 없는 답변을 한다.
"추운 겨울을 버티고 이겨내야 진짜 맛있는 곶감이 되거든!"
고생하지 않고, 그 지루한 시간을 묵묵히 보내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맛있는 곶감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시고 떫고 설익은 왕재수나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인생 별 거 없다는 거, 다 연이고 운명이고 그냥 기다리며 자신을 익히는 것 이외에는 별 다른 답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본인도 좀 더 편안할 수 있으려나.
담백함
이 영화는 참 담백하면서도 아름답다. 주제가 엉망이어도 영상이 아름다우면 범작 이상의 평가를 받는데 이 작품은 영상도 유려할 뿐 아니라 주제에도 숙고할 데가 있으니 수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입김만으로 사계절의 변화를 표현하고,그 입김만큼이나 미묘한 젊은이들의 애정과 질투를 담아내는 감독의 역량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대중적인 클리쉐가 범벅이 되었던 영화를 만들었던 그 감독이 맞았나 다시 확인을 해볼 정도로 말이다. 한국적인 미를 이렇게 잘 담아낸 작품이 있었나 궁금하다. 은유와 은유, 표정과 표정, 광경과 광경. 반딧불이 비치는 시골의 계곡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인다. 류준열의 전 여자 친구가 등장했을 때 혜원과 은숙(진기주 분)의 반응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보듯 유머 감각도 충분함.
특히 재하가 혜원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렇다고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단 5초 이내의 두 장면으로 처리한다. 이 장면은 직접 보시길.
감정이란 꼭 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웅변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진리라는 것도 그러할 것이고 아마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지금이라도 시골로 갈까?
별로 궁금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이렇게 영화를 잘 감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마 시골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의 삶이 정말 별 거 없음은 오래 전부터 알았지만 말이다.
나는 자취를 하지만 요리를 못 한다. 변명인지 모르겠지만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바빠서 아직 배울 기회가 없었다. 어쩌면 내 삶에는 스스로에게 직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통째로 생략되어 있어, 이 나이를 먹어도 온갖 아집과 불만에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앞으로도 별로 배울 생각은 없다. 인생은 죽도록 짧고, 꼭 해야 하는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모자라다는 걸 아는데, 밥 좀 따뜻하게 먹자고 하루에 두 세시간 씩 부엌에 앉아 있을 자신은 없다. 차라리 굶고 말지.
물론 그 결과물은 콜레스테롤과 MSG가 들어간 음식을 먹고 살은 탓에 겪는 온갖 성인병일지 모른다. 그냥 그 잔병치레 속에, 그래도 나는 주어진대로 안 살려고 밥까지 굶어가며 "악!" 소리는 내봤다고 썩은 미소나 지으면 정신 승리나 할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아무리 질문해도 나는 솔직히 시골에서 살 수 없다.
예전 시골에 사는 친구의 집에 몇 주 머문 적이 있다. 그 친구는 기독교인이었고, 자신이 받은 사명에 따라 서울 생활을 접고 목회를 하러 시골에 내려온 참이었다. 촌스럽고 나이에 비해 더 들어보이는 인상의 친구이지만 얼굴에는 어딘가 은은한 따스함이 뭍어 나오는 그런 녀석이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사명감만으로 자기가 싫은 일을 평생 하며 살 수 없다. 나는 그가 시골에서 목회를 하고자 결심한 주된 이유가, 그 삶이 그 친구에게 평안함을 주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한다.
재밌었던 것은, 그 친구 집에 놀러가 몇 일 동안 묶은 빈 방, 즉 그 친구 여동생의 방에서 본 것은 전혀 반대였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친구의 여동생은 방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로 내려오지 않았다. 방을 가득 채운 서적들 중 무신론과 섹스에 대한 책이 기억에 남는다. 섹스에 대한 책은 그녀가 공부한다는 미술과 연관지어서 선해할 수 있겠다만 보수적인 시골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녀의 방에 있던 무신론에 대한 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가 천장에 그린 커다란 그림을 보았다. 뭐라고 명확히 설명하긴 어렵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으로...... 그 그림은 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린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감정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였다. '신앙에 대한 회의'와 탈출이라고 딱 찝어 말한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나는 그녀가 자신의 오빠와는 달리 이곳이 아닌 그녀가 공부하는 도회지에서 안식을 얻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은 3살 때 부모와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부모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아들이 한국처럼 답답한 곳에서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캐나다에서 행복을 찾지 못했고 자신을 위해 이민을 한 부모를 캐나다에 두고 서른 살에 한국 땅에 정착하는 길을 택했다.
그 사람이 되어보기 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물고기는 육지에 내놓으면 죽고 육지 생물은 바다에 던지면 죽는다. 사람은 자신에게 어울리는대로 사는 수 밖에 없다. 그건 누군가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혜원은 아주심기의 장소로 시골을 택한다만 아마 나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귀농을 하라는 단순한 문장이 이런 시각적으로 아름답지만 복잡한 영화의 주제일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저 그 과정 중 하나로서 시골을 보여주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믿어야 더 생각하지 않고 나도 좀 편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혜원의 엄마는 다시 연애할 생각이 없냐는 딸의 질문에 먹던 토마토를 던진다.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던지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 다만 나는 그보다는, 잘 자란 토마토는 아무 곳에나 던져도 나무가 될 수 있다는 다음 대사에 더 주안점을 두고 싶다. 내가 직면하고 성장한 것이 꼭 요리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허기진 배를 잡고도 내가 쫓아간 것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 내면을 단단하게 해줄 것이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돈이 없으면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어쩌면 말이다. 스포츠와, 국가주의, 그리고 권위주의적 악역의 괴롭힘 속에서도 언더독이 강자를 이긴다는, 뻔한 흥행 방정식, 우생순이라는 그 영화를 흥행시키지 못했다면 <리틀 포레스트>라는 흥행 가능성은 미지수이나 훨씬 감독의 진짜 생각을 잘 드러내는 아름다운 영화가 나왔을지 의문인 것처럼 말이다. 실로 역설이다.
그게 이 영화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아닐지도 모른다만.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로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구질구질한 여정을 감에 있어 이 영화에게 더 이상 유혹 받는게 싫어서 이쯤 쓰는게 맞을 것 같다.
이 영화는 흥행할 것으로 생각한다. 같이 본 @pistol4747님은 견해를 달리하셨지만, 여하간 난 사람들 의식이 많이 높아졌다고 믿으니까. 조미료를 팍팍 넣은 음식이 잘 팔릴 때가 있지만 지금은 슬로우 웰빙 시대 아니던가.
아마 흥행할 것이니 이 영화 걱정은 그만두고 내 삶이나 다시 한 번 돌아봐야겠다.
뱀발 : 시사회 티켓을 통해 영화를 보여주신 @pistol4747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스팀잇에서 알게 된 분을 만나뵙게 된 건 처음인데, 처음 본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랜 친구들보다 더 재밌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스팀잇의 미래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도 좋았고요.
현재 브런치에서 활동하고 계신 @pistol4747님은 주기적으로 영화 관람 이벤트,
당신을 영화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를 진행하고 계시니 관심 있으신 많은 분들의 참여 부탁 드립니다.
일본의 영화는 참 만화같은 상상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상상력 1도 없는 공대아저씨는 그저 부러울 뿐이에요.
영상만 봐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리틀 포레스트!!!!
공대야 말로 새로운 걸 만드는 곳 아닌가요 ㅋㅋ 문과 전공자가 이공계적 마인드를 가지기는 어렵지만 그 반대는 상대적으로 쉽지요.
마음이 깨끗해진다 ㅋㅋ 네 그런 영화로 표현하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잘 읽고 보팅하고 갑니다.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 그간 스팀잇은 어떠셨는지요? 올려주신 글들은 잘 읽고 있습니다
방문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느림의 미학이 녹아있는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물 흐르듯 담은 사계절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
그 말이 맞네요 ㅋㅋㅋ 물 흐르듯 담은 사계절... 마치 그 안에서 식물도 생육하듯 주인공이 성장하는 걸 보여주는 참 아름다움 영화였습니다
Upvoted ☝ Have a great day!
thank u for reply haha thank u
오~ 두 작가분의 만남이라.. ㅋ 부럽습니다~ 가즈앗!! ^^
ㅎㅎㅎ 묘하게 많이 떨리더라고요, 이건 영화를 보러 간 거였으니 그나마 별 부담이 없었는데, 역시 밋업은 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ㅋㅋㅋ 그래도 언젠가는 나가겠죠 ^^;
ㅋㅋ 만나면 무지하게 반가울 것 같습니다~ 가즈앗!!! ^^
ㅎㅎㅎㅎ 저도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
저도 나오자마자 보고왔습니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어쩌면 심심할 수 있는 리틀포레스트를 보고 이런 글을 쓰시다니..
중간중간 써주신 대사를 보니.. 다시한번 곱씹어보게 되네요!!
저도 시골에 내려간다면?을 생각해봤는데 저도 요리도 못하니..ㅎㅎ
그냥 오히려 정말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다면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요리를 배우는건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네요. ㅎㅎ 일찍 관람하셨네요 ^^ 전 시사회 덕분이었지만... 개봉날 바로 ㅋㅋ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명성을 얻기전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만한 컨텐츠를 만들어서 인정을 받고 일단 인정을 받은 이후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게 정석이 겠지요.
자본의 선택을 받아야만 자본에서 자유로워질 기회를 갖는다는게 역설이긴 역설이네요.
오늘도 좋은글에 영화소개도 재미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설이지만 어느 정도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자기만의 세계를 펼치는 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초천재가 아닌 이상은, 그냥 천재로는 안 되는 거 같네요. 그나마 스팀잇이 자기 색깔로 글을 써도 읽어주는 편이지만, 다른 곳에 기사나 리뷰 올리며 많이 가지치기 당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언론사란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무난히 읽힐 글을 올려야하는 면도 있으니...
오늘도 방문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꼭 보고싶은영화였는데 조만간 봐야겠습니다.
리스팀해요 :)
리스팀 감사드립니다 ^^
곧 보러가려고 하는 영화입니다 : )
만약 직장을 다녀야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울에, 도시에 매여있어야할
이유가 있을까.
돈도 중요하지만, 공간이동의 자유와
시간의 자유가 더 중요하진 않는가
그런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직장을 안 다닌다면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ㅋㅋ 더 이상 조직에 매여 노동할 필요가 없다면 서울 근교에서 살고 싶네요 ㅋㅋ 가능한 일인지는 일단 차치하고 서울 부촌에 사는 삶을 동경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