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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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1년 전 오늘'을 띄워주곤 했다. 별 것 아닌 과거인데도, 오늘이란 말이 붙으면 괜히 마음이 아련해진다.

오늘은 5월 31일. 31이란 숫자보다, 5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1년 전 오늘'이 떠올랐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어떤 어른을 종종 따라다녔다. 대개 3~4일 전에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일정을 맞추는 편이었다. 누구를 만나는지, 뭘 하러 가는진 알 수 없었다. 목적지에 가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원은 이런 일정이 불가능하니, 그래서 나를 자주 부르시지 않았나 싶다. 일정 조정은 남들보다야 유연했으니까.

승용차를 타고 갔기에 그 어른과 또 다른 한 분, 운전사, 그리고 나 정도의 인원 구성이었다. (지금 보니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는데 참 많이도 따라다녔다) 그런데 '1년 전 오늘'은 좀 특별했다. 나 말고도 네 명의 사람이 더 있었고, 그래서 스타렉스를 타고 내려갔다.

내 또래라기엔 많은 나이었지만, 함께 가던 분에 비하면 어린 편이라, 우리는 뒷좌석에 모여 삼삼오오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초면이었기에 어정쩡한 통성명을 하고,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시골이었지만, 서울에서 먼 곳은 아니라 금방 도착했다. 도착하니 인자한 60대 부부가 우리를 반겨주셨다. 바로 차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예약해둔 식당에서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빌린 배를 타고 가볍게 바다를 돌았다. 관광용으로 만들어진 낡은 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짧은 뱃놀이를 마치고, 부부의 댁으로 갔다. 집이라기보단 별장 같은 곳이었는데, 들어서자마자 사모님이 키운 예쁜 꽃들이 가득했다. 안에 들어서니 각종 상패와 유명 정치인과 찍은 사진이 가득 걸려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를 초대한 분은 유명한 기업의 회장이었다.

처음엔 놀랐지만, 이미 가까워진 후였다. 또 그분에게서 위계감이나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그 집은 모든 것이 준비돼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놀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집에 들어온 후로는 계속 먹고 떠든 기억뿐이다.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 가득했다. 회장님과 내가 따라다니던 어른은 술을 좋아하셨기에, 낮부터 술이 나왔다. 와인으로 시작된 만찬이었다. 우리는 와인을 잘 모르지만, 귀하다는 말에 한 모금씩 마셔보고, 다시 우리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때 나와 함께 했던 사람은 출산을 앞둔 예비 아빠, 다른 나라로 시집가는 언니, 세 아이의 아빠인 락커, 매니저 일을 하는 오빠였다. 우리끼리만도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시골에선 금세 밤이 찾아온다. 어두워지니 본격적으로 술자리가 열렸다. 술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싼 술이라길래 나도 몇 번 마셨지만, 대부분 양주였고, 양주를 먹을 주량은 못돼 헤롱이다가, 진짜 좋은 술이라는 권유에 다시 와서 한 잔씩 마시곤 했다.

술이 들어가고 마음이 너그러워질 때쯤, 사람들이 내 음악을 궁금해했다. 그 넓은 집에 내 음악이 나왔다. 부끄럽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그렇게 좋은 스피커로 내 곡을 듣는 게 나 역시 낯설었기 때문에, 그냥 좋게 생각했다. 그중 한 명이 곡에 귀뚜라미 소리를 넣길 참 잘했다고 말했다. 그 소리는 밖에서 나는 소리였고, 그때 우리가 가장 크게 웃었다. (나는 그 귀뚜라미 소리가 너무 좋아, 다음 앨범엔 꼭 저 소리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반쯤 취해 두런거릴 때, 우리를 데려온 분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이가 드니 한 달 한 달 지나가는 게 너무 마음 아프다는 말이었다. 돌연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나는 어려 그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덩달아 슬퍼졌다.

그 얘기를 들은 젊은 누군가가 6월이 오는 걸 기념하자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또 금세 마음이 풀려 그렇게 하기로 하고, 11시 50분쯤 앞마당으로 나왔다.

우리의 평균 연령이 적어도 40대 중반은 됐을 것 같은데, 마당에 쪼르르 서서 6월을 기다리는 모습이 참 재밌었다. 공기는 청명하고, 귀뚜라미는 끝없이 울고, 우리는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5월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행동이 빠른 어떤 이는 벌써 정확한 시계를 켜뒀고, 우리는 그 시계에 맞춰 카운트 다운을 외치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때 나는 참 어려서, 마음만 먹으면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1년 뒤, 예비 아빠는 딸바보가 되었고, 결혼을 앞뒀던 언니도 타국에서 즐거운 신혼 생활을 즐기고 있다. 락커였던 세 아이의 아빠는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고, 매니저인 오빠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그분을 따라다니는 것은, 내가 더 바빠지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분을 따라 이곳저곳 다니는 동안 결이 고운 사람을 많이 만났다. 아름다운 풍경과 맛있는 음식은 덤이었다. 지나고 나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호시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정원에서 새로운 달을 맞던 우리도 아마, 다시는 모이지 못할 것이다.

그 캄캄했던 밤을 더듬어보다가, 그 많은 사람의 이름을 되뇌어보다 문득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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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운치있습니다. 귀뚜라미소리와 함께하는 나루님의 음악이 같이 덧붙혀지면 느낌이 배가 될것같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이노래를 끼어넣었어요. 그 어르신들 낭만적이군요.

댓글 달면서 피터님이 남겨주신 음악을 들었는데요. 정말 1년 전 어제로 돌아간 것 같아서 마음이 두근두근했어요. 정말 그 밤의 정원이 성큼 제 눈앞으로 온 것 같아요. 낭만적인 피터 어르신께 정말 귀한 선물을 받았네요.

어르신...

나루가 나를 두번죽임. 흙흙흙..

오늘밤 11시에 무상임대 1기연장이 마감됩니다.
그동안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즐거운 스팀잇 되시길 바랄게요~~

럭키님!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네요. 덕분에 지난 두 달간 아주 즐겁게 스팀잇 즐길 수 있었습니다. 친히 들러주셔서 알려주시니 더욱 감사하네요:)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뵐게요! 즐겁고 행복한 날들이 가득하셨으면 합니다.

네~~앞으로도 쭈욱 스팀잇에서 함께 해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1년전을 떠오르게만드는거보면...
sns은 좋은점도 많은거같아요ㅎ

그러게요. 스팀잇이 아니었다면 그냥 스쳐 갔을 것 같아요. 덕분에 그 날 하루를 오롯이 되새겨볼 수 있었답니다!

하루 하루가 정말 소중합니다. 시간이란 지나가면 잡을 수 없기에 그냥 흘려보낼 수 없죠.

그러게요.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오늘 하루를 차분히 돌아보게 됩니다. 별일 없었던 것 같은데, 1년 후에 보면 또 그리울 날이 되겠지요? @tailcock님의 하루하루도 즐거운 날들이길 바랍니다!

목적지를 모르는 약속, 시골에서 낯선 사람들과 배를 타고, 또 알고보니 쨘 부자의 초대, 맛난 술,이야기, 그리고 음악.... 아니 뭐 정말..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이네요~ 하루라도 그런 체험을 해봤으면 ㅎㅎ

ㅎㅎㅎ 아잇! 그 정도는 아니에요~~라고 말하려 했는데, 오쟁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하루였습니다. 그곳에 피아노만 있었더라면 정말로 완벽했겠다고 생각했지요.

6월을 기다렸다는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네요.
귀뚜라미 소리 있는 음악은 어떻게 하면 들을 수 있나요? ㅎㅎ
비싼 스피커와는 다르게 싸구려 헤드셋이지만 들어보고 싶은데요

음... 우선 @dozam님의 말씀으로 보아 귀뚜라미 소리는 아닌 것 같고요ㅠㅠ

그렇게 생각만 하고 정작 곡을 만들 때는 넣지 못했네요. 나중에라도 잊지 않고 꼭 넣어야겠습니다:) 만약, 그 곡이 나오게 된다면 꼭 알려드릴게요. ㅎㅎ

읽다보니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그려봤어요

실은 사진을 올릴까 하다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면 더 재밌을 것 같아 사진을 올리지 않았답니다. P님이 그리신 풍경이 어떨지, 저도 궁금해요!

진기한 경험의 밤이네요. :> 기억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밤!

진기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기억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밤이라는 말도 참 좋네요. 어제 글을 쓰면서 아주 많이 그 밤을 그려봤어요.

맞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누구에게나 가장 젊은 때죠. 나이 한 살 먹을 때마다 내 몸이 달라지는 걸 알게 되는데 비로소 청춘이 흘러 갔음을 깨닫죠.

순간순간 행복하세요. 후회 없도록. ^^

몸의 변화로 알게 되는 군요. 저도 실은 조금씩 몸이 딱딱해지는 걸 느끼고 있답니다. 순간순간 행복할게요! 이 댓글을 보니 또 행복해지네요. 브릭님도 매 순간순간이 행복하셨음 해요.

뭐랄까.. 하루가 다르게 노화가 느껴집니다 ㅠㅠ

마지막에 짜잔~ 한 명이 취해서 누굴 때렸다든지 시집가기로 한 언니가 누구랑 바람이 났다던지 하는 지저분한 생각을 한 제가 부끄러워지는 결말입니다 ㅋ 어린시절의 낭만을 제가 잠시 질척되게 했습니다 ㅎㅎ
그나저나 그 회장님은 누군지 아주 궁금합니다

ㅋㅋㅋㅋㅋ 너무 잔잔한 이야기였죠? 이제 보니 한 명이 취해서 누굴 때렸다거나, 바람이 났다거나 충분히 그럴 법한데도 조용한 밤이었습니다. 추측할 여지를 살짝 남겨놓을게요. 저도 돌아보면서 다시 행복해지는 기억이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정말 어린 시절의 낭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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