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7-6 정전협정 소련의 북한 설득, 중조간 마지막 논쟁
평양을 설득하는 작업은 모스크바가 담당했다.
9월 4일 김일성과 스탈린의 회담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과 조선사이에 원칙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중국 동지가 제안한 방안에 대해 우리도 동의한다. 그러나 현재조선인민이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빨리 정전협정이 체결되기를 더 원한다”
스탈린은 즉시
“우리는 이번에 중국 대표단고 이 문제에 대해 이미 토론했으며, 또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미국이 제안한 전쟁포로 문제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며, 자신의 주장은 고수한다. 만약 미국이 중국과 조선인 포로 20%의 송환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포로 20%도 그들이 중국과 조선의 포로를 더 이상 억류하지 않을 때까지 송환시킬 수 없다.”(416, 주 162, 심지화, 조선전쟁해밀문건, pp.1214-1221)
김일성은 더 이상 정전협정 체결 주장을 반복하지 않았고 소련으로 부터 더 많은 물자를 지원받는 문제에 집중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이후 소련의 대외정책과 전쟁방침에 변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정전협정이 촉진되었다.
이승만은 전쟁의 중단을 원치 않았고 임의로 전쟁포로를 석방하는 방식으로 협정의 서명을 방해했다.
중국은 다시 한차례의 전투를 전개해 유리한 조건을 만들자고 주장했으나, 북한은 즉시 정전협정에 서명하자고주장하면서 이승만의 포로 석방행위를 문제 삼지 않았다.(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전쟁을 지속하기위한 술책도 포함되어 있었음, 만일 포로 문제라면 끝까지 반대하면 될 일이었음, 이승만이 반공포로석방으로 무엇을 노렸는가도 중한 포인트)
펑더화이는 김일성의 주장을 무시하고 마오쩌둥의 지지아래 비교적 대규모 돌격전을 전개해 성공을 거두었다.(417, 주164, 팽덕회, 팽덕회자술, p.352)
김일성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장기적으로 끌고 가는 것 보다는 빨리 전쟁을 종결하고 경제건설로 전환하여 자신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 중요
그러나 마오쩌뚱은 아시아 혁명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적 책임 때문에, 반드시 동서 양진영이 대립하고 있는 총체적인 상황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동북아, 아시아 전체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중국과 조선사이에 대립이 발생했을 때,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지지를 받았다. 사실 그것이 스탈린의 구도이기도 했다.
steemzzang은 @wisdomandjustice님 과 함께라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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