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이 그림을 아십니까

in #kr6 years ago

1951년 1월 18일 이 그림을 아십니까

파블로 피카소라는 이름은 20세기의 미술계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나는 찾지 않는다. 다만 발견할 뿐이다.” 같은 별 재능 없이 태어난 장삼이사들의 부아를 돋구는 멘트를 날리던 이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는 언감생심 제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닐 겝니다. 추상화를 볼 때마다 “쳇 이건 나도 그리겠네.” 뇌까리기 일쑤인 주제에 무슨 토를 어디에 달겠습니까. 다만 1951년 1월 18일 완성됐다는 이 그림 앞에서는 조금 그 생각이 달라집니다.

피카소는 이 그림에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éee)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1951년 1월 18일이라면 한반도라는 판이 두 번의 싹쓸이(?)를 거친 뒤입니다. 전해 6월 터진 전쟁은 8월경 낙동강 교두보만 남기고 거의 끝나는 것 같았는데 인천상륙작전을 이은 반격으로 이번엔 남한과 그를 돕는 미군이 압록강 두만강가까지 진격해 올라갔고 급기야 중공군의 개입으로 썰물처럼 후퇴하여 서울을 내 주고 중공군의 남진을 죽을 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는 시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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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고 덤덤하게 전황 얘기를 하고 있지만 그 와중에 남과 북의 백성들은 그야말로 부지기수로 죽어갔습니다. 전쟁통에 적군의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대개는 같이 뒹굴고 자라났던 사람들, 동네 이웃들의 손에 의해서 무수하게 서로 죽고 죽였습니다. 물론 무력을 보유한 정규군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죠.

80년대 수정주의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 일월서각> 의 표지를 장식했던 이 그림은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났던 대학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배를 내민 임산부, 영문을 모른 채 총 앞에 선 남녀, 아직도 흙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와 영문을 알아차릴만큼은 철이 들어 공포에 질린 채 엄마에게 달려드는 아이를 향해 중세 기사들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한 군대가 총을 겨누고 있지요. 이 신천대학살에서 신천군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3만 5천명의 신천군민들이 죽어갔다고 합니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서 볼 수 있듯 미군이 그랬다기보다는 오히려 교세가 막강했던 기독교인들과 좌익들의 대립 와중에 발생한 ‘우리끼리의 대학살’이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 한데, 어쨌든 신천 대학살 소식은 동유럽과 유럽의 좌익들에게 전해지고 국제 취재진까지 구성되어 파견되는 등 관심의 핵이 됩니다. 아마도 피카소도 그런 경로로 신천을 알게 됐겠죠.

그런데 막상 이 그림은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들에게 그렇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도대체 저 군대가 어느 나라 군대인지 알 수 없잖나!”가 그 이유였죠. 80년대 민중화가들같이 코 크고 수염난 엉클 샘을 대놓고 그린 것도 아니고 무슨 표식 같은 건 하나도 없는 데다가 백인인지 아시아인인지도 모르게 얼굴들을 칭칭 투구로 싸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선전재료로 써먹기에는 몇십 퍼센트가 부족했던 겁니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자유 세계’로부터는 예술성이 없다는 비판은 기본으로 들어야 했고 20세기 예술의 거성 피카소를 정치적 감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에는 가 본 일도 없는 피카소를 FBI가 25년이나 감시하며 파일을 작성하는 수고를 한 것은 이 그림 덕분일 가능성이 크죠.

이 소식이 한국에 알려진 뒤 하나의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전시수도 부산의 한 다방에서 분노에 찬 (?) 예술가들의 “피카소와의 결별식”이 열린 거죠. 주역은 한국 서양 미술 1세대로 평가되는 화가 김병기, 공초 오상순 등이었습니다. 김병기는 막심 고리키의 장례식 때 추도사를 읽을 정도로 사회주의에 경도돼 있었지만 이후 소비에트의 현실에 접하며 생각을 수정해 나가다가 해방 이후 “예술가 동무들이 정물이나 그리고 앉으면 되갔소?”라고 책상을 치는 ‘혁명가’들에 신물을 내고 월남하게 되죠. 그런데 자신의 우상이라 사표라 할 피카소가 미국의 학살을 규탄하는 그림을 그리다니! 그는 피카소에게 보내던 경의를 포기하는 편지를 써서 낭독합니다. 물론 전쟁 북새통에 부치지 못한 편지로 남습니다만.

20세기 최고의 화가 피카소를 어쩔 수 없이 언급하면서도 피카소의 이름은 전쟁 겪은 대한민국에서 불온의 딱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딱지의 꽃봉오리(?)라 할 사건이 1969년 6월 7일 벌어집니다. 삼중화학이라는 크레파스 제조사에서 크레파스에 ‘피카소’의 이름을 붙여 팔았다가 벼락을 맞은 겁니다. 검찰은 “피카소는 좌익계 화가로서 1944년 공산당에 입당, 소련으로부터 레닌 평화상을 받은 이이며 ‘한국에서의 학살’ 등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재료에 이용되는 그림을 그린 화가라는 점을 중시”, 그 이름을 상표로 쓰거나 그를 찬양하는 행위를 반공법 위반으로 다스리겠다고 으르렁거립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TV 프로그램에서 “피카소같이 훌륭한 그림”이라고 언급했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씨도 불려들어가서 경을 치고 맙니다. “피카소가 훌륭해? 이 자식 이거 사상이 불순하네......” 곽규석씨는 나는 피카소가 그런 놈인줄 몰랐다고 자백해야 했고 삼중화학은 “피닉스” 크레파스로 (피씨는 같은 피씨네) 그 이름을 개명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피카소를 대놓고 빨갱이로 몰아 버리기에는 그 이름이 너무도 컸던 모양인지 검찰은 요런 단서를 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그냥 걸어두거나 그의 예술에 대해 연구 논평하는 행위는 괜찮다.” 참 대한민국 검찰의 꼼수는 유래와 전통이 있습니다.

좌익으로부터 비판받고 우익으로부터는 눈에 가시 취급을 받은 피카소의 그림을 다시 봅니다. 한국이라고는 언젠가 유럽 순회 공연하던 최승희의 무용 정도로 밖에 본 적이 없었을 것 같고, 평생 한국 근처도 와 본 적 없는 피카소는 지구 반대편에서 수만 명의 생명이 일시에 죽어갔다는 소식에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립니다. 하지만 좌익으로부터 “가해자가 불분명하다”고 비판받은 그 이유로, 이 <한국에서의 학살>은 예술가로서의 직관이 훌륭히 드러난 명작으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피카소 자신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나는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고 밝힌 바 있거니와 그의 그림은 무력을 소지하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는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에 기꺼이 참여한 국가와 권력이 무고한 수백만의 인민들을 앗아간 한국전쟁의 단면을 칼로 쪼갠 듯이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살은 황해도 신천 뿐이 아니라 왕년의 조선 팔도 전역에서, 남과 북에 충성하는 각각의 무력 집단에 의해 자행됐으며 피학살자들의 마지막 순간은 어김없이 <한국에서의 학살> 바로 그 모습과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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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픈 그림이에요 피카소가 그렸다는것도 의외군요

네 가슴아픈 그림이죠..... 정말로 파괴적인 전쟁이었어요

게로니카 일화도 유명하죠 독일군이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린 사람이오?' 하니까 고개 뻣뻣이 들고 '아니, 당신들이 그린 거요' 라고 대답했던... 이런 사람한테 공산주의 딱지라니 허허

공산당 가입한 건 맞긴 한데...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일화가 있군요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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