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끝
#1
언젠가 한번 얘기한 것도 같은데, 나는 지난 몇 달동안 금주를 했다. 성인이 되고나서 술을 이렇게 오랫동안 안 마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맨 처음 금주를 해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스스로 가지기도 했다. 그런데 금주를 하면서 순간 순간 마시고 싶을 때도 있었으나, 큰 충동을 느낀 적은 없다. 나 스스로도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 많은 모임에서 술을 따라놓고 마시는 척을 할 때도 있었으나, 그 또한 나의 탁월한 연기(!)로 잘 넘어갔다. 그래서인지 내가 몇달동안 술을 안 마시고 있다는 걸 가까운 지인 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지인들이랑 만나서 술을 안 마시고도 재미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렇게 뿌듯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주까지만해도.
#2
몇 주에 지인한테서 “너도 X (뮤직페스티벌) 가는거다” 라는 문자를 뜬금없이 받았다. 요새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을 기피하는지라, “피곤해” 라고 답장하며 거절했다. 그런데 X 시작 며칠 전에 일본 친구가 자신도 가니까 같이 가서 놀자는거다. 외국에서 친구도 온다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면 가는게 인지상정이다. 무조건 칼퇴하고 잠실로 달려갔다. 음….. 역시 우리 사회는 참 좁다. 그 곳에서 내가 아는 사람을 최소한 30명은 본 것 같다. 다들 이제 나이먹어서 힘들어서 못 놀겠다고 하면서 이런 자리엔 꼬박꼬박 나오는 걸 보면 참 대단들하다 (나 포함). 쿵쾅거리는 리듬에 몸을 맡기고 소파에 앉으니 테이블 앞에 놓인 샴페인과 맥주, 보드카들이 보였다. 날도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아이스버킷에서 차갑게 칠링되는 샴페인 한 잔을 마시면 더위가 싹 가실 것 같았다.
'딱 한 잔만 마실까?'
#3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 오랜만에 마신 샴페인은 참 맛이 없었다. 너무 물같이 밍숭맹숭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맹물 같아서 벌컥벌컥 잘 들어갔다 (….) 마시다보니 한 잔을 금방 비웠고, 저절로 내 손은 또 한 잔을 따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잔을 마시고났더니 탄력을 받았다. 친구들이 권하는 보드카 샷도 하나 마시고, 맥주도 1캔 먹었다 …. 그래도 확실히 금주할 때와는 다른 흥겨움이 느껴졌다. 아, 이래서 우리가 술을 마시는구나. 술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다.
#4
한창 즐겁게 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 테이블에 와서는 내 일행한테 반갑게 인사하고는 몇 분 정도를 근황토크를 했다. 꽤 친한 사이처럼 굴었다. 그런데 내 일행 (A) 의 얼굴이 똥 씹은 얼굴인거다. 거의 대꾸도 안하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 (B) 가 자기 테이블에 돌아가고 나서 A 가 설명하길 - B 하고는 몇 년전에 자동차 동호회에서 만났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기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떠벌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많은 남자들이 기싸움하는 과정에서 허세가 들어가기도 마련이기 때문에, 내 지인 A는 그렇게 신경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랑질이 심하네 -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1-2달 정도는 주말마다 같이 서킷에 가서 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B가 자꾸만 투자를 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 지인 A는 관심없다고 말해도, 이것 저것 온갖 걸 들이밀었다고 한다. 귀찮게 생각할 무렵, 친구로부터 B 에 관해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동안 B 는 자기가 디자인/인테리어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A 에게 말했는데, 또다른 자동차 동호회에 가서는 부모님이 갖고 있는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로 놀고먹는 한량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그 어느 쪽도 진실같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에 A 는 동호회에 안나가서 B 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후, 동호회 회원으로부터 B 의 그간 말과 행동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한다. 디자인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도 거짓, 부모님이 건물을 갖고 있다는 것도 거짓, 심지어 사는 곳이라고 말했던 장소도 거짓이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차는 좋은 걸 타고다니면서 자동차동호회 활동을 하며 그곳의 회원 여럿에게 사기를 쳤다고 한다.
#5
A 는 그 소식 이후로 B 를 본 적이 없는데 X 에서 마주치니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B 가 자신한테 와서 철면피 깔고 인사를 한 것도 B 의 테이블에 있는 B 일행한테 자기가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B 는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려서 하루 벌어 하루 살 정도라고 알고 있는데 X 에서 어떻게 테이블 잡고 노는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그리고선 내린 결론은 “사기꾼/거짓말쟁이들은 어떻게든 자기 살 길을 찾나보다.” 였다. 지금도 B 는 한국 어딘가에서 자신의 신분을 거짓으로 꾸미고 살아가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6
누구나 살면서 거짓말을 한다. 나도 매일 매일 한다. 별로 고맙지도 않은데 “고맙다” 는 말을 습관처럼 쓰기도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사회적 교양을 갖춘 사람’ 이라는 가면을 쓴 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큰 거짓말을 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신분/정체성을 깡그리 뒤집는 거짓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직업 같은 경우는 사회에서의 신분증과 같은데, 그 직업/회사를 거짓으로 꾸며내기란 보통 마음가짐으로 하기 어렵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건, 그렇게 쉽지 않은 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눈치 채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넘어간다. 굳이 귀찮게 나서서 “너 거짓말 하고 있지?” 라고 말하지 않는다. 괜히 나섰다가 시간만 뺐기고 나에게 큰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 믿는 척 하면서 가만 놔둔다. 그 거짓말이 나에게 타격이 되지 않는 한,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생각으로 넘어간다. 나도 그런다.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믿는 척하면서 넘어간다. 그래서 누군가가 앞장 서서 거짓말을 지적해주는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래의 그 누군가에게 cheers !
#7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노니까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서 집에 들어와 뻗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하루 종일 피곤에 쩔어있었다 (…..) 왠지 몸 체질이 술을 안 받는 체질도 변한 것 같다. 매우 슬퍼졌다.
‘금주의 끝’ 일기 끝.
#8
눈코틀새 없이 바쁘다는 이유로 스팀잇에 거의 일주일만에 들어왔다. 원래는 7번까지 써놓고 올리려고 했는데, 스팀잇의 황폐한 피드를 보고는 조금 더 쓴다. 어마어마하게 피드가 밀려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많이 밀리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오늘 하루 안에 반가운 분들의 모든 글에 방문하지는 못하겠지만 … 왜 이렇게 황폐해졌는지 이유를 찾아보니, 스팀이 곤두박칠쳐서 그런가보다. 2달 전 쯤에도 지금과 비슷한 현상을 겪었는데, 다시금 겪게 되었다. 이 현상을 두 번째 겪으면서 내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모든 것에는 인연이 있다.” 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맨 처음 썰물현상을 겪었을 때는 사라진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속상해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특별히 슬퍼하지도, 속상해하지도 않는다. 스팀잇만이 놀이터가 아니고, 스팀잇만이 투자처가 아니니까. 내가 이 곳을 편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나같이 느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스팀잇과 자기 자신이 인연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떠난 사람을 ‘하락장에서 버티지 못하는 유리멘탈’ 이라고 욕할 권리는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리고 떠난 사람은 스팀 가격이 하락해서 떠난 게 아니라, 그저 이 곳이 불편해져서 떠났을수도 있다. 물론 그 떠난 사람이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매우 아쉬울거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다른 곳에서 즐겁게 살아가기를 나는 진심으로 응원할거다. 물론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온다고 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Farewell for now, amigo !
진짜 끝 !
Fin.
이번주엔 많은 이벤트들이 있었던 탓인지, 저도 며칠만에 들어왔네요.ㅎㅎ 서울님이 발이 넓으신 거 아녜요? 30명이나 우연히 볼 정도면! ㅋ 오늘도 불금! 달리시나요? ㅎ
다들 이번주가 바쁜 한 주였나봅니다 ㅎㅎ 그래도 솔메님의 한 주는 즐거운 이벤트로 가득한 일주일이었으면 좋겠어요 :)
오랜만에 불금을 경험하고 났더니 그 유혹을 끊기가 쉽지가 않습니다....ㅠㅠ
뭔가 mylifeinseoul 님의 글을 쭉읽고있으면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것 같아서 참 좋아요! 언제나 좋은글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물 같이 밍숭맹숭... 맹물 같아서 벌컥벌컥... 그 마음 알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어요...! (왜...) 피드 뒤에서부터 쭈욱 올라오고 있는 중인데 거의 끝에 말라잎님 새로운 글이 딱 있어서 반갑게 읽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이 새벽을 시작...
역시 라운디님은 맹물같은 술맛이 뭔지 아실 줄 알았습니다 +_+ 그나저나 3시간전에 새벽을 시작하시다니 ㅠㅠㅠㅠ
전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_@
......? 써니님 칼님한테 추천한 그 와인잔... 구매... 하신다고...
앉은 자리에서 와인 750ml야 가능한데, 물 750ml는 글쎄요.....
헐......... 와인 혼자 마시면 1/3 ~ 1/2 밖에 못마시겠던데요. 다른 의미로 정말 물 같던데요... ^^;
ㅋㅋㅋㅋㅋㅋㅋ 그럼 하늘님은 술을 물처럼 느끼시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써니님 너무 좋아요
A, B의 이야길 읽으니 제 친구의 경험이 생각나네요. 언젠가 써봐야겠어요. ㅎㅎ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왠만한 자동차동호회에는 거짓인생들이 최소 한 명씩 포진하고 있더라구요. 말 나누기 전부터 인상에서 딱 느껴지는. ㅎㅎ 그런 사람을 요즘 카푸어라고들 한다지요 ... 참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다른 블로그 서비스에 비해 뭔가 더 정이 가요. 현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그걸로 좋은 것 같아요^^
맞아요, 편하게 두런두런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흔치 않은만큼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
이번 썰물은 좀 강력하네요
말씀대로 생각보다 피드가 쌓이지 않아서 놀랐어요
이웃을 더 늘려봐야겠다 싶기도 합니다
B같은 사람은 만나기 싫네요 ㅎㅎ
저도 하루 날 잡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좋은 이웃을 만나러가야겠어요 :)
그래도 역시 조금 아쉽기는 해요. 오겡끼데스까아-
셀레님 한동안 뜸하셔서, 아 이제 안 오시나 했었어요.
저도 함께 오겡끼데스까아아아아아 -
혹여 제가 떠나게 된다면 스팀잇 동네방네 말하고 떠나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스팀잇을 떠나고 , 오고 . 그런건 개인의 마음이니 평가해선 안되죠
오시는분들 저도 두팔벌려 환영해야 겠어요
떠나신 분들이 다시 오게 되는 날 따뜻하게 환영하려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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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거짓말은 정도가 너뮤 지나치면 사기꾼이.아니라 리플리 증후군 환자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그런 사람에게 당해본 적이 있어서.. 너무 충격적이어서 차라리 그렇게 환자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ㅠㅍ
맞아요 ㅠㅠㅠㅠ 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 중 꽤 많은 수가 스스로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증거를 들이밀면서 추궁해도 방방 뛰면서 억울해하는 황당한 경우를 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