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역사적인 시비, 현대까지 400년이나 지속된 병호시비(屛虎是非)
※ 맥락 위주로 단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병호시비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하루 이틀만으로도 매우 피곤한 일일 것인데, 무려 약 400년 가까이 지속해 온 역사적인 시비가 있으니, 바로 병호시비(屛虎是非)입니다.
경북 지역에는 유명한 서원이 많은데, 그 중 도산서원은 1천원권의 인물인 퇴계 이황을 기리는 곳이고,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을, 임천서원은 학봉 김성일을 기리는 곳입니다.
<병산서원, 출처: 안동하회마을 http://www.hahoe.or.kr/coding/sub2/sub1.asp>
그리고 호계서원은 이황, 류성룡, 김성일 3명 모두를 기리던 곳인데요.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류성룡과 김성일의 위패가 이곳에 들어왔지만, 둘 다 이황의 애제자들인데, 과연 누구의 위패를 좌측에 놓을 것인가로 후학들이 1620년부터 격돌한 것입니다.
류성룡의 위패를 좌측에 놓아야 한다는 병산서원 쪽과, 김성일의 위패를 좌측에 놓아야 한다는 호계서원 쪽이 논쟁중이라 하여 즉, 병과 호 간의 논쟁이라 하여 병호시비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아마도 병산서원 쪽은 류성룡 문중이, 호계서원 쪽은 김성일 문중이 많았나 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에 있어 산 자의 세상에서는 좌측이 더 높은 곳이었습니다. 서원은 후학들이 있는 곳이고, 단순한 묘지가 아니므로 좌측이 더 우선되었나 봅니다. 심지어 서원에서 기숙할 때도 선배들이 후배들보다 왼쪽 방향의 방에서 머물렀다 합니다. 간단하게는 "좌청룡 우백호"를 떠올리셔도 좋겠네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게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역사적인 시비는 1620년에 시작된 이래 당시 조정에서도 가리지 못하고 계속 논쟁만 거듭해오다가, 최근 (안동댐 건설로 이전되었던) 호계서원을 다시 제대로 이전복원계획하면서, 경상북도와 안동시의 중재로, 류성룡의 위패를 좌측에 놓기로 합의했다고 합니다.
대신 우측에는 김성일의 위패와 함께 이상정의 위패까지 2개를 같이 놓은 것으로 합의를 했다고 하네요.
2) 충무공 이순신에 묻힌 두 명의 문충공, 류성룡과 김성일
병호시비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류성룡과 김성일은 정파적으로는 동인이었다가 남인이 되는 사람들로, 류성룡은 그의 징비록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기에 어느정도 알려지고 있지만, 김성일은 조선통신사 파견 당시 "일본이 쳐들어오지 못할것이다"라고 했다는 부분 때문에 거의 붕당정치를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했었지요?
그러나 한 부분만 끄집어내서 다루다보니, 그런 면이 있지만 실제로 그 둘은 둘다 "문충공"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미처 모르게 학문적/국가적 공로가 컸다는 의미가 되는데요.
충무란 최고 무관의 시호인 것 기억하실 겁니다. 문신 우대 사회인 조선에서 최고 문관 시호가 없었다면 이상하겠지요? 바로 문충이란 시호를 내렸고, 조선 전체로는 12명에 불과합니다.
12명 중에서 임진왜란 극복 및 국가관리 기여를 통해 문충공을 받은 이가 5명이나 될 정도이니 오히려 당시의 충무공이 2명(이순신, 김시민)이었던 것 대비 훨씬 문관을 우대했음을 알 수 있네요.
왜란으로 생겨난 5인의 문충공 중 2명이기도 한 류성룡과 김성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류성룡: 이순신이 전사한 날 공교롭게도 역사 속에서 같이 퇴장한, 청렴한 선비
류성룡은 이황의 제자로서 어린 나이에 급제하였으며 평생 청렴했던 것으로 알려지는 학자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안동출신이지만 어린 나이에 급제하였기에 주로 한양에서 살면서 당시 현재의 충무로에 살던 이순신을 만나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을 대비해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한 사람이고, 비록 전란중이라고는 하나 속오군(양인 뿐 아니라 천민도 군대에 받아줌) 체제 도입, 수미법(토지보유정도에 비례한 조세 납부제도)을 도입하여 성리학의 대가인 이황의 제자였음에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마인드도 가졌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그는 병조판서(=국방장관) 시절에는 왜란을 대비 군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도 했었지만, 이는 바로 실시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제승방략체계라 불리는 군 체계는 전쟁이 터지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그 지방을 가서 각 지방의 군사를 모아서 지리를 파악한 후 지휘해야 하는 형태였습니다. 최악의 경우에 수도를 방어하는 중앙군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방식은 반란을 막기에는 좋지만, 실제 전쟁준비가 너무 늦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몇천명 수준의 침략에는 그런대로 대응이 되었지만, 임진왜란처럼 수십만이 쳐들어 올 때는 개전 초기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군력 자체는 적지 않았음에도 미처 지휘체계도 구성되기 전에 지방고을 무장들만 전사하면서 계속 각개격파를 당하고 한양까지 넘어가버린 것이었죠.
류성룡은 동인으로 입문하여 추후 온건파인 남인이 되었으며, 영의정까지 올라 국난극복에 애를 썼습니다.
(주로 서인들에 의해) 그가 속이 좀 좁았다는 등 단점들도 지적되는 바가 있으나, 그가 국가의 위기 극복을 위해 가능한 정파를 뛰어넘어 노력했고 실력위주로 유능한 인물들을 등용하고 양반 위주의 법을 개혁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청렴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부분들은 점차 재조명되는 분위기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는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에 가서는, 그가 양반과 기득권 층 입장과 반대로 무리한 개혁을 시도하고 영의정으로서도 남인인 그가 다소 독단적으로 행동했다는 점 때문에, 이미 많은 양반계층들과 서인, 북인 등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되었고,
선조의 입장에서도 전쟁이 끝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며 특정 정파가 더 강해지는 것을 막아야하기에 실권을 쥐었던 정파 쪽을 잠시 내치는(소위 환국정치라 일컫는) 그런 것도 필요했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그를 반대하는 모두가 계기만 찾던 터, 류성룡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을 치려고 한다'는 이상한 소문을 해명하러 명나라로 가라는 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파직되었습니다. 이런 황당한 소문의 진원지는 당시 명나라 내부의 정파 싸움 때문에 생겼던 일이기에, 그 전부터 류성룡은 이에 끼어들지 말고 지켜보자는 입장이었음에도 당시 조선은 이에 끼어들다가 불필요한 화를 부른 사건이었는데요. (당시 명도 국력이 쇠해가던 상황이었지요. 결국 이 사건을 해결하러 명나라에 간 이정귀는 탁월한 문장력으로, 오히려 발단이 된 명나라의 정응태가 파직되게 하는 대단한 공을 세워 문충공을 받기도 합니다.)
여튼 공교롭게도 1598년 11월 19일(음력)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기도 한데, 류성룡 역시 같은 날 파직을 당해 역사 속에서 홀연히 퇴장했습니다.
선조는 전란 후 조선의 재정비를 위해 곧 그를 다시 복권하여 불러들였지만, 류성룡은 다시 복귀하지 않고 안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징비록을 집필 후 사망했습니다.
② 김성일: 이황학파의 수제자로, 왜란 중에 진주성 전투를 주도하고 죽은 강직한 학자
김성일은 정파 싸움으로 인해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역사에 기록되면서 다른 부분이 모두 묻힌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을 주도했던 퇴계 이황이 인정한 수제자로서, 김성일을 따르던 학자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학자적인 부분에서는 류성룡보다 더 인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류성룡은 전란 중에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김성일은 경상도초유사라는 영의정에 비하면 크게 낮은 직위를 지냈음에도 400년간 병호시비가 발생할 정도로 말이죠.
이렇게 현대에까지 병호시비가 존속될 정도로, 나름 대단한 인물이었던 김성일의 입장을 조금 이해해보면서 당시의 스토리를 풀어보겠습니다.
그는 평소 강직한 선비로서, 조선통신사 파견시절에도 그는 비록 정사가 아닌 부사에 불과했지만, 사절단들이 혹시 말 잘못 꺼냈다가 죽기라도 할까봐 마냥 히데요시를 기다리던 시기에 히데요시를 얼른 만나게 해달라고 주장하고, 히데요시의 답서 내용도 엉터리니 고쳐라고 하는 등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그의 이런 강직함과 자신감이 오히려 일본에 대한 판단미스를 불렀을 여지도 있을 겁니다.
다만 요새 들어서는 점차 김성일이 단순히 정파싸움 때문에 일본이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한게 아니라, 그런 강직함과 자신감 있는 마인드를 가진 그가, 당시 이미 그런 소문 때문에 경상도/전라도 지역의 민심이 동요하는 상황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가는 전쟁 대비를 할 수 없게 되는 부분을 감안해서 한 이야기라는 측면을 재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선통신사로서의 직위가 더 높았던 정사 황윤길이 먼저 전쟁이 날수도 있다고 하니, 이를 수행한 부사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부연설명에 가까운 의견을 낼 수도 있지 않았나 싶긴 합니다.
민심이 동요하여 다들 미리 도망간다면, 누가 성을 고치고 축조하고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가 전쟁은 예상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일본이 그렇게 많은 군사를 데려올지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의 통일 상황 등을 정확히 짐작하지 못했던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전쟁이 날수도 있다고 한 "황윤길" 쪽에서도 그렇게 많은 군사를 데리고 올거라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요.
결국 조선은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의 의견을 다 들어보니, 일본이 쳐들어올 수도 있으니 전쟁대비를 하되, 하삼도(경상/전라/충청) 지역의 민심이 미리 동요하지 않도록 과도하게 전쟁 우려를 부각하지는 말자는 관점의 판단을 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이 전쟁 대비를 아예 안한 것도 아니었고, 그 전의 이탕개의 난 등을 진압한 경험이 있어 상당부분 대비를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다만, 일본과의 조선통신사 파견은 무려 147년만의 일이었던 터, 147년만에 가본 일본의 모습을 잠깐 보고서, 세력다툼만 하던 일본이 통일하여 그렇게 큰 군력을 가지게 될 줄 미처 짐작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개전 초기에 실제로 조선은 일본군 전체 규모를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한 기록이 꽤 있지요. 물론 일본군이 나누어서 상륙한 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제승방략체계의 한계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빠른 대응도 못한 것이었지요.
여튼 그럼에도 조선통신사로서의 판단 미스를 한 것은 분명한 부분이지요.
결국 그는 왜란이 발발하자, 누군가 책임을 져야할 터, 선조에게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류성룡 등의 건의로 이를 면제받고 오히려 경상도초유사에 임명되어 경상도 민심을 다스리고 전쟁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 부분만 보더라도, 평소 김성일이 조선 조정과 경상도 지역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뭐하나 잘못하면 그냥 유배나 사형이었지요. 그럼에도 사형을 면제받고 초유사가 됩니다.
그는 이미 한번 죽었을 목숨이라 보고, 열심히 전란을 극복하는 일을 합니다.
의병장 곽재우 등 여러 의병을 모집 규율하고 관리하였으며, 경상도 지역의 민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애를 썼고, 무엇보다도 산속으로 떠나있던 진주판관 김시민을 진주목사 대행으로 임명하고 급히 진주성 전투를 대비하게 한 점이 알려지지 않은 큰 공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김성일은 일본이 당시 불리해진 전황을 극복하기 위해 호남 지역을 차지하여 식량을 확보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길목인 진주에 총집결할 것이라는 미리 알았습니다.
그는 김시민을 진주목사로 임명하여 수많은 관군과 백성들이 하나로 뭉치는데 기여하였고, 결국 진주성 전투를 끝으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일본이 쳐들어온 책임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케하는 부분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불과 2년도 안되서 그는 병사를 했습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비록 그는 일본의 침략을 미리 확신하지는 못한 큰 죄(?)를 지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그의 목숨을 다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사망한 것입니다.
이런 점이 부각되어 그에게도 문충공의 시호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사실 전쟁은 예상했다 하더라도 어차피 일본이 그렇게 무려 16만에 이르는 대군을 데려올걸로 본 이는 사실상 당시 조선에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147년간 일본과는 국가적 단위의 교류가 없던 사이라고는 해도, 왜란 대비가 부족하여 수많은 백성들의 고초를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사실 류성룡과 김성일 뿐 아니라 당시 조정 관료와 선조까지 모두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두명의 판단만으로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전쟁이었죠.
개국 후 큰 전쟁이 없었던 조선에서 그만한 전쟁을 예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점점 부각되고 있는 류성룡에 비해, 김성일에 대해서는 저도 많이 모릅니다만, 조심스레 둘 다 문충공을 받았다는 점, 400년이나 병호시비가 지속되었다는 점 등의 분위기를 고려해 그 기준에 맞추어 나름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회마을에 가시면 근처 서원들도 둘러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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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 최고로 황당했던(?) 전투, 고려와 후백제 간의 일리천(=구미) 전투
한 희생의 나비효과: 어쩌면 "Korea"란 단어가 사라질 뻔 했던, 공산(=대구 팔공산) 전투에서의 왕건의 기사회생
조선시대, 그것도 임진왜란 때 무려 정2품(장관급)까지 올랐던 파격적인 일본인이 있었다?
외국의 침입이 없었음에도 임금이 파천(播遷)했던 1624년의 아픈 역사와 그 나비효과
서로 많이 달랐던 한/중/일 "내시(內侍)" 제도로 3국 문화 이해해보기.
steamsteem님이 lostmine27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steamsteem님의 [스팀蟲: 글모음] 자주 찾는 글 모음 2018.11.30 (@SteamSteem Creativity 독창글)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오늘 블록체인 전문 콘텐츠를 만드는 「Keep !t」의 웹진 구독서비스를 시작합니다. 스팀잇 사용자를 위한 75% 할인구독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평화를 추구하던 시기군요. ㅋㅋ 역사를 배우면서 선조도 노답이고 밑에도 노답이다 싶었습니다. 상상초월 괴물 이순신이 없었다면 몇 백번 망했을 나라죠. 아쉽게도 요즘도 선조랑 비슷한 인간들이 많습니다.
멘트 감사합니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당시에는 좀 약했지만 지금에 이르러 충분히 평가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당시 문충공을 받고 400년 가까이 현대에서도 병호시비가 있을 정도의 인물로 평가되는, 전체 전란을 총괄지휘했던 류성룡과 이황의 수제자이자 일본의 침입이 없을거라는 판단 미스를 인정하고 전란을 막으며 진주성에서 목숨으로 갚았던 김성일에 대해 조금 새롭게 생각해 봤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류성룡도 김성일도 큰 역할을 했네요. 김성일도 이해가 갑니다. 조정에는 평화병이 들어서 개판인데, 전쟁을 알았든 몰랐든 말 한마디로 지배적인 여론을 뒤집기는 힘들었을 듯 합니다.
네 좋은 지적 주셨네요. 당시 그리 큰 전쟁을 치루고도 다시 그 상흔을 쉽게 잊었던 사례가 마침 하나 있어, 다음 글에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홀. ㅇ_ㅇ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약간 드라마 보는 기분) ㅋㅋ
곰돌이가 @urobotics님의 소중한 댓글에 $0.004을 보팅해서 $0.019을 살려드리고 가요. 곰돌이가 지금까지 총 1740번 $23.202을 보팅해서 $21.501을 구했습니다. @gomdory 곰도뤼~
곰돌이 감사합니다. ㅎㅎ ^^ ㅎㅎㅎ
안동이 그리 멀지않은데 하회마을은 한번도 못가봤네요..
역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지곤하는데..
그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살아온거 같아요..교육도 또한 그렇구요..
네 멘트 감사합니다.
역사를 떠나서도 안동 지역은 푸근하고 초가와 한옥이 조화롭게 있어 볼 것이 꽤 많더군요. 지방이다보니 좋은 숙소가 적다는게 좀 아쉽지만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네 두서없는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쿨제로님 즐거운 시간 보내시구요^^
김성일이란 이름이 낯선데 병호시비가 일만큼 훌륭한 분이셨나봅니다. 사형을 면하고 열심히 일하다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안타깝네요. 좌의정 우의정 중 누가 높은지도 새로 알았습니다.
네 조선통신사 부사로 다녀온 점 때문에 그 후 더 승진을 못하고 더군다나 왜란 중 진주성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반인들보다는 조정과 지역과 학자적 시각에서 인지도가 있었던 듯 합니다. 55세에 사망한 점은 사형선고의 스트레스가 극심하지 않았을까 싶어지네요. 그런 그가 문충공을 받은 것을 보면 당시 진주성전투가 상당히 중요했음도 알수 있겠구요. 반대로 류성룡은 전란 중에 계속 승진해서 병판에서 영의정까지 지냈지요.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재미있네요. 이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 현존하는 유적과 잘 이어져야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는데.. 지금까지는 이런 게 너무 약했습니다. 좋은 이야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좋은 멘트 주셨네요. 아무래도 그러면 좀 더 재미가 있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한 시간 보내세요^^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초기 역사글들이 사실 요새보다 좀 더 정성껏 정리한 것들이니 정말 한가하실 때, 심심하실 때 같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푹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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