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내 청춘의 쉼터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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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장

 돈 없고 시간은 많던 이십대에는, <홈더하기> 같은 대형마트가 오갈 데 없는 청춘의 쉼터 역할을 했다. 생활권이 비슷한 친구들과의 만남은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친구들과 모임을 마치고 늦은 밤 들르는 곳도 이곳이었다. 식품 매장에서 사온 순대나 튀김을 영업이 끝난 푸드 코트 식탁에 풀어놓고 요기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이십대의 우리들은 짝사랑하는 교회 자매나, 우스꽝스러운 괴소문들이나, 주말을 어떻게 보낼지 등의 가벼운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렸다. 우린 서로의 어설픈 멘토가 되었다가, 사랑의 카운슬러가 되어주기도 했는데, 서로가 해준 조언을 들었다가 첫 데이트에서 폭망했던 얘기는 만날 때마다 끝없이 재생되었다. 그리고 들을 때마다 우린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어떤 때 우린 그곳에서 날을 넘기기도 했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푸드 코트에서 수다를 떨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청소카를 탄 아저씨만이 푸드 코트 주변을 오락가락 할 뿐이었다.

 약속 장소로도 더할 나위 없었다. 기다리면서 밥값에 육박하는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되었고, 조금 늦는 친구가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 매장을 둘러보고 있으면 되었으니까. 그래서 많은 시간을 이십대의 나와 친구들은 그곳에서 보냈다.

고독의 둥지

 <홈더하기> 마트는 만남의 장이기도 했지만, 도서관과 맞먹는 ‘고독의 둥지’이기도 했다.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당시 도서관의 위상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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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은 내 상태와 목적과 관계없이 언제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는 점에서 가장 포용적인 공간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지만, 언제나 내가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자리와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타적인 곳이다. 이곳은 생산력이나 효율을 강요하지 않고 멍하게 보내는 시간도 인정해주고 기다려준다. 안정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침묵이라는 편의를 제공한다. 날마다 책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한 아름 갖고 돌아올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도서관은 내게 최고의 공간이다.

 이 정도의 위상을 가진 도서관에 비견될 정도였으니, 그 시절의 대형 마트의 의미가 내게 얼마나 컸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그 대형 마트의 위상도 따지고 보면, 책과 서점의 존재로 비롯되었다. 대형 마트 안에 있던 대형 서점에선 곳곳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 몇 시간이고 퍼질러 앉아 새 책을 뒤적거려도 누구 하나 눈치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서관처럼 내게 대단히 포용적인 공간이자 생산성을 강요하지 않는 유희의 장소였던 것이다.

 대형마트는 집에서 내가 주로 활동하는 생활권의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곳을 지나치게 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길을 오가다가 이곳 대형 서점으로 들어가서 푹신한 소파에서 책을 펴들고 읽곤 했다. 오가는 길 30분은 이곳에 들러 책을 읽는다는 식으로 일정표에 달콤한 자투리 독서 시간을 넣기도 했다. 책은 여러 번 나눠서 읽어야 했다. 어떤 책은 며칠 동안 드나들면서 연속극처럼 연결해가며 읽어나갔다.

 도서관에서 읽는 것과 또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도서관에서 불티나게 대출되어 손에 쥘 수 없는 신간이 이곳엔 몇 권씩 있었다. 신간들이 내 손길을 받고 싶어 아우성을 쳤다.

 맘먹고 책장을 넘기려는데 근처 중학교 학생들이 옆의 소파에 주렁주렁 매달려서 수다라도 떨면,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책장을 펼치긴 했지만, 귀는 자꾸 아이들의 수다를 향한다. 내가 왜 그 학교 쫀드기 선생님의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에 대한 얘기를 들어야 하며, 재수 없는 반 친구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싶다는 섬뜩한 고백을 들어야 하는가. 처음엔 마음이 편치 않아서 떨렸던 몸이, 나중엔 섬뜩함을 느끼고 떨렸다. 위대한 중2 아이들은 전혀 내 눈치를 보지 않는다. 결국 내가 조용히 자리를 옮겨 먼 쪽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가끔 그런 난관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 곳은 나의 발걸음을 이끄는 매력적인 장소였다.

위상의 추락과 새로운 위상

 안타깝게도 하루 중 펑펑 쓸 시간이 별로 남지 않는 삼십대가 되자, 대형 마트의 위상은 추락했다. 급기야 대형 마트 설립을 반대하는 소상공인과 별반 차이 없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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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살 생각이 아닌 다음에야, 대형 마트를 가는 것은 꽤나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일단 대형 마트는 웬만한 학교 강당보다 크다. 구획된 매장들 사이로 이동하며 원하는 물건 하나를 골라서 계산하고 차 있는 데까지 돌아오려면 만만치 않은 시간이 드는 것이다. 한두 푼의 돈을 아끼는 대신, 서너 푼의 시간을 써야 하는 구조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주 많은 양의 물품 구입 건의 아니라면, 오가는 길에 있는 작은 동네 마트에 들러 물건을 산다. 대형 마트 위상의 추락 저변에, 자투리 시간이 절실해진 나이의 씁쓸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낳은 후 대형 마트는 아이가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고,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하는 곳이 되었다. 이십대와는 또 다른 위상을 갖게 되었다. 카트에 아이를 태우고 한 바퀴 돌면서 시식을 하고, 쇼핑을 하면 시간이 잘 간다. 아이와 부모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내 청춘기의 웃음과 고독이 묻어있던 대형 마트가 여전히 그곳에서 우리 가족의 발걸음을 불러들이고 있다. 내 웃음과 고독 위로 아이의 웃음과 발소리를 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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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묻어나오네요. 24시간 하는 킴가네시장도 가끔 들렀었는데 ... :)
추억에 빠져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우리 모두에게 저마다 추억의 장소가 있지요.^^
씨마네 추억의 장소, 그려보시든가요.ㅎㅎ

전 대형마트가 낯설어요. 제겐 재래시장이나, 기껏해야 동네 큰 대형 슈퍼마켓이 더 편했죠. 대형마트는 버스타고 큰맘 먹고 가는 곳이었는데..

네 사는 곳에 따라 주변 인프라가 다르겠네요. 전 운좋게 오가는 길에 대형마트가 었었이요^^

도서관 얘기하는 부분에서 빠져들었어요..저도 저를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그 공간의 이타적인 매력에 빠졌었던거라는걸요.

그 매력에 빠져 계셨던 한 분 추가요! 지금도 도서관은 조그마한 짬만 나면 달려가는 곳이지요. 그 매력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ㅎ

마트는 이제 가족의 주말 공원이 된 것 같아요.
요즘같이 미세먼지 심한 날은 더더욱 마트를 찾게 되지요.
마트 먼지 농도는 얼마인지 모르겠지만요.
전 돈 아낄때 마트 안가요.
시장이 훨씬 싸거든요. 근데 시장 재료는 손이 많이가고 주절주절 설명을 해야 된다는 불편함이 있어요.
백수가 되면 나름 지침서를 냉장고에 붙여 놓는데 거기엔 항상 '마트 가지 말기' 적어놓습니다.

청춘들이 마트에 모였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전 그런적이 없어서 그런가봐요.
마트가 그런 역할도 했군요.

네 미세먼지와 황사로부터 나들이 가고 싶은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줄 공간이죠.ㅎㅎ 저희 집 주변엔 재래시장이 있는데, 거기서 온누리 상품권 쓰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김밥과 튀김 맛집을 다니며 저녁 식사 거리를 사는 것도 좋구요.
어떻게 보면 우리 친구들은 독특한 점이 있지요. 맥도날드에서 모여 수다를 떨거나, 대형마트 식당에서 대화를 하는 걸 좋아했죠. 스무살 넘어서도 고딩 마인드가 남아 있었다고나 할까요.ㅎ

대형마트에서의 의미... 백화점의 경쟁자가 롯데월드다 라는 의미가 함께 떠오르는 글이에요. @kyslmate 님의 추억이 머문 곳에서 또다시 자녀와의 추억을 쌓아가는것.. 멋지네요.

반갑습니다. 보보님. 보보님도 소싯적 기억이 스며든 추억의 장소가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장소의 의미도 바뀌네요. 자주 뵈어요. ^^

네, 다음에 한 번 소개를 해보고는 싶지만 아직 엄두가 안나네요 : ) 자주뵈어요! 팔로우하고갑니다.

마트에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전 도서관에서 나는 책 냄새가 너무 좋아서 좋아한답니다. ㅎㅎ
서점에선 새책냄새, 도서관에선 헌책냄새, 각자의 매력이 있죠

오래된 책 냄새가 주는 묘한 안도감이 있지요^^ 마트는 아이들에겐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죠ㅋ

일단 눈치를 안 준다 , 서점과 의자가 있다, 날을 넘기도록 열려있다 모든 것이 제가 알고 있는 대형마트들과 달라서 이 글을 읽는 내내 고개를 까딱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의 대형마트는 몇달 전 처음으로 11시까지 영업을 천명하였습니다.

이 글에 담긴 모습은 십수년 전의 풍경이라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아직도 대형마트의 대형 서점은 부담없이 찾아갈 수 있는 장소지요ㅎ

제 고향은 십수년 전부터 이랬습니다..흑흑흑... 까르x 이마x 홈더하기 다 저리 갓 나도 다른지방 살래

작은 소도시인 모양이군요.ㅎㅎ 이 없으면 잇몸으로요!

이 글을 보니, 저도 나름의 짜투리 시간이 많을 때 생각이 나네요.
그 때는 분당에 살고 있었는데, 전철역에 지금은 없어진 삼성플라자라는 준백화점이 있었습니다.
전철을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백화점을 지나야 했고, 양 옆으로 로데오 거리도 있어서 아주 핫한 공간이었답니다.
물론 바로 옆 건물에 대형 서점도 있고요.

오가며 거기서 보낸 짜투리 시간이 엄청 많았었는데, 이제는 대형마트에도 차를 타고 가야하고, 서점도 없고...ㅜ
아마도 제게도 마트의 위상이 추락한 듯합니다.

여유있게 홀로 마트에 들어가 죽치고 앉아,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었던 게 언제인지 모르겠네요ㅎ gghite님도 언제나 갈 수 있었던 공간이 있었군요^^

저도 아이와 함께 주말 마트 나들이를 자주 하는 편이에요 ㅎ 마트는 그대로 있는데 나이들어감에 따라 같은 장소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네요 ㅎㅎㅎ

네 마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장소들도 그런 거 같습니다^^ 혼자일 때와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있게 된 후는 다른 세계잖아요ㅋ

저도 20대때 도서관에서 책 펼쳐놓고 8할의 시간을 빈 공간을 쳐다보며 멍때리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트에서도 동일한 체험을 하셨다니 신기하네요 ㅎㅎ

도서관빠셨군요^^ 관대한 도서관에서 청춘을 보내셨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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