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서 원전과 원문의 자구(字句)를 따지는 이유(on philology in humanities)

in #kr6 years ago

외부에서 볼 때, 인문학에서 원전과 원문의 자구 하나하나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원어(희랍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고전한자 등) 한 글자까지 꼬장꼬장 따지느냐 말이다. 그야말로 관념의 유희이자 신선 놀음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종류의 고증 논쟁은 인문학의 최후의 전장(戰場)에서 벌어지는 가장 흥미진진한 전쟁이다. 단지 하나의 전투가 아니라, 전투들이 쌓이고 쌓여서 최종 승패를 좌우하는 전쟁의 마지막 장면.

대체로 일은 이렇게 벌어진다. 두 학자가 한 주제를 놓고 논쟁적 대화를 하는데, 같은 전거(典據)에 대해 이해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말하자면 학자 A는 그 대목을 a라는 뜻으로 이해한 반면, 학자 B는 b라는 뜻으로 이해한 것.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그렇다면 한 번 확인해 보자, 하는 일이 벌어진다. 어떻게 A는 a로, B는 b로 이해하는 일이 벌어지느냐고? 그러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구를 둘러싼 논쟁까지 이어지는 거다.

자연과학에서 방정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과 유사하다. 가령 양자역학에서 코펜하겐 해석을 비롯한 여러 해석이 논쟁을 벌이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과학은 측정과 실증을 통해 논쟁이 해소되는 반면, 인문학은 실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으니 계속 싸움질을 이어간다는 차이가 있다는 정도일 테다. (물론 이런 일반화에는 과장이 포함되어 있으니, 너무 진지하게 반론하지는 마시라.)

young Marx & Nietzsche.jpg
젊은 시절의 '맑스'와 '니체'

이제 인문학의 예를 두 개만 보자.

사례1. 한 번쯤은 접해 봤을 문장 하나를 보자.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상이하게 해석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이 문장은 「포이어바흐 테제」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맑스의 11번째 테제이다. 1885년에 쓴 이 구절은 맑스 자신이 출판한 게 아니고, 맑스가 죽은 후 친구 엥엘스가 자신의 저서『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1888)에 '부록'으로 수록하며 출판했다. 사실 맑스는 제목도 달지 않았었다.

엥엘스의 저서는 사실이지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개를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해설한 책이다. 문제는 엥엘스가 맑스의 테제 하나하나를 자기 식으로 교정해서 발표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맑스는 '해석'과 '변화'를 서로 반대되는 작업으로 봤을까? 엥엘스는 저 11번째 테제에도 두 문장 사이에 원문에 없던 '하지만(aber)'이라는 접속사를 삽입했다. 엥엘스는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하지만'을 넣었다.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을까? 그렇다면 원문을 보아야 한다.

사실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은 모두 엥엘스의 판본으로 「포이어바흐 테제」를 읽었다. 맑스의 원래 노트는 1925년에야 공개되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es kommt darauf an, sie zu verändern." 엥엘스의 '하지만' 대신 세미콜론(;)이 들어 있다. 최소한 맑스가 앞뒤 두 문장을 일방적으로 '대립'으로만 의도한 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된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테제 전체를 맑스의 원문으로 다시 검토해야 의미가 분명해지리라. 저명한 맑스주의 철학자 블로흐는 "대립은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1885년 무렵의 맑스의 '실천' 개념 전체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11번째 테제를 접할 때 맑스의 원문과 엥엘스의 교정이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고, 나름 새롭게 해석해서 학술대회에서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공식 출판하지는 않았는데, 너무 길어서 수록해 줄 학술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직관적으로 해석 차이가 느껴지면 원문을 확인하고 검토하는 쪽으로 향하는 건 인문학자의 본능이다.

사례2. 이번에는 니체를 보자. 외국 사정은 잘 모르겠고, 한국에서는 니체의 첫 저작『비극의 탄생』(1872)에서 니체가 '아티트스-형이상학'(또는 '예술가-형이상학')을 개진했다고 주장된다. 하도 많은 연구자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 주장을 의심하는 사람은 못 봤다. 그도 그럴 것이 니체가 떡하니 '서문'에서 『비극의 탄생』이 '아티스트-형이상학'을 담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사정은 단순하지 않다. 아니, 니체가 자기 입으로 말했는데? 물론 그렇다. 그런데 그 말은 14년 뒤에 한 말이다. 니체는 1886년에 「자기비판의 시도」라는 서문을 써서 붙이고 『비극의 탄생, 또는 희랍 문화와 염세주의』라고 제목도 바꾸어 신판을 냈으며, 우리가 통상 접하는 『비극의 탄생』은 바로 이 책이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1872년 원판의 제목은 『음악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이며, 여기에는 '아티스트-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이 담긴 서문도 물론 없다.

나는 여기에서 '아티스트-형이상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지는 않겠다(이미 내용을 발표한 바 있고, 게으름 탓에 공식 출판은 미뤄지고 있지만서도). 아무튼 직감으로 이상한 점이 포착됐으면, 사정을 따져야 하는 것이 인문학자의 본능이다. 그래서 열심히 문헌을 팠다. 니체 문헌을 전수조사했더니(이 작업은 시간도 많이 걸리는 노가다이다),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니체는 1886년 「자기비판의 시도」를 집필하기 전인 1885년 가을 ~ 1886년 가을의 노트에서 「“비극의 탄생”에 붙여」라는 제목의 유고를 남기는데(유고 노트 번호 VIII 2[110]), 바로 여기에 “아티스트-형이상학(Artisten-Metaphysik)”이라는 용어가 두 번 등장하고, 같은 노트에서 『차라투스트라』 전까지의 자기 작품의 특징을 짧게 요약하면서 『비극의 탄생』을 '아티스트-형이상학'으로 묘사했고(유고 노트 번호 VIII 2[124]), 이 표현은 「자기비판의 시도」에 3번 더 등장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1885년과 1886년에 걸쳐 총 6번 등장한 개념이 바로 “아티스트-형이상학”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다른 학자들의 해석과 달리, 나는 젊은 니체가『비극의 탄생』에서 명시적이고 직접적으로 '아티스트-형이상학'을 주장한 게 아니라, 성숙한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아티스트-형이상학'이 암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개진되었다고 발견하고 해석했다고 본다. 그러니까 사후 평가인 셈이다.

어쨌건 니체가 '아티스트-형이상학'을 주장한 것 아니냐고? 뉘앙스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성숙한 니체는 사실상 『비극의 탄생』을 비판한다. 1886년에 쓴 서문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기비판의 시도' 아닌가! 여기에서 니체는 자기 책을 엄청 조롱한다. 그러면서 딱 하나 그래도 건질 게 있다면 '아티스트-형이상학'이라고 전반적으로 혹평했던 것이다. 이런 차이를 감지하고 그 차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인문학자가 하는 일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아마 감이 오겠지만, 인문학의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굉장히 오랜 시간과 내공의 산물이다. 내가 맑스의 '실천' 철학의 의미와 니체의 '아티스트-형이상학'의 내용을 이 글에서 펼치지 않은 것은 그 작업이 책 한 권 분량씩 필요해서다. 그걸 쓰고 다듬어 발표하는 일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제대로 인문학을 하려는 학자에게는 건강과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문학은 사생결단이지, 시간 때우기 위한 교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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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유와 분석
그리고 비평
인문학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사생결단입니다.
감사합니다.
리스팀합니다.

인문학 한걸음 더 다가서기~!

글 감사합니당~ ^^

전투전쟁
<Vom Kriege>

bluengel_i_g.jpg Created by : mipha thanks :)항상 행복한 하루 보내셔용^^ 감사합니다 ^^
'스파'시바(Спасибо스빠씨-바)~!

단어 하나 번역 잘못했다가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를 보면 그럴법하지.

서로의 주장이 얽히고 섥힌 말다툼-논쟁이 바로 인문학의 본질인가요? 어떤의미에선 전쟁이네요...ㅎㅎ

잘 읽고 갑니다. 이런 글은 리스팀해서 널리 알려야죠😁👍

잘 보고갑니다...
또 다음 글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

형이 "들뢰즈를 읽자"에서 들뢰즈 번역어를 정리정돈해주는 걸 보고 인문학은 정말 버거운 학문이라는 생각을 했었어. 학술장의 논쟁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보여줘서 고마워. 그런데 포이에르바하 테제 맑스 원문은 어디서 볼 수 있어? 형 책들이 출판되기 전까지 그거라도 보고싶어서 그래.

어...근데 이거 kr-gazua 태그 맞지?

아래 주소를 참고해.
그 곁에 엥엘스 판본도 있으니, 비교해 봐.
http://www.zeno.org/Philosophie/M/Marx,+Karl/Thesen+%C3%BCber+Feuerbach/%5BThesen+%C3%BCber+Feuerbach%5D

여기 가즈아 맞음 ㅋㅋ

같은 시대의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끼리도 (인위적이든) 해석차이가 있다면, 도대체 다른 나라말로 된 서적을 어떻게 번역해는 건지 궁금하고 대단하게 생각되네요. 많이 싸울 듯..
( 0과 1만 배운 공돌이가)

건강에서 확 공감됩니다... 그런 미묘함도 놓치치 않으려면 건강해야할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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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하시는 분들이 사생결단으로 해주시기 때문에 저같은 보통 사람이 교양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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