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빨강머리앤을 기억하며... 이벤트 참여 독려글입니다.

in #kr-diary6 years ago (edited)

너무 낭만적이야~

성인이 되어서야 [빨강머리앤]의 모든 대사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주근깨 가득한 소녀가 두 손을 가슴께에 마주하고는 그 특유의 목소리로 하는 말, “너무 낭만적이야~”

문득문득 생각나는 그 꼬마소녀의 말들 때문에 이미 서른을 넘기고 아이엄마가 된 후 어느날 갑자기 “빨강머리앤” dvd세트를 구입했었다. 내가 자주 가던 중고 싸이트에서 누군가가 내놓은 중고 dvd 세트를 본 직후, 묻고 따지지도 않고 단방에 구입하고는 판매자와의 접선을 하러 나갔다. 내가 일하던 곳은 여의도였는데, 길도 잘 못찾던 길치인 내가, 경기도 광명의 어느 골목에서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도무지 빨강머리앤을 볼것 같지 않은, 산적같이 생긴 아저씨에게 그 중고 dvd세트를 건내받은 그 날, 돌아오는 내내 끝없는 행복감에 히죽거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보고보고 또 봤던 그 모든 에피소드들...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다짐했던 오늘의 할 일 보다는, 하루일과 중 어느 한 때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어떤 한가지의 갑작스러운 미션 하나에 내 온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그런 순간이 말이다.

갑자기 내가 보게 된 빨강머리앤의 dvd세트가 하루 일과를 미친듯이 마감하고, 이제는 누가 불러도 고개도 들면 안되는, 직장인들에게는 죽음과 생이 교차하는 바로 그시간, 퇴근 30분 전에, 몽유병 환자처럼, 내일 아침 그 분주해야하는 출근후 몇 분의 시간에 내가 맞닥뜨려야 하는 당혹감은 개나 줘버리고, 나를 기다리는 앤을 찾아 발소리 숨소리도 안내며 퇴근해 버렸던 그 순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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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란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이름이 있어서 그 사물이 아름다워졌다가 미워졌다가 하잖아요?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장미가 만약 돼지풀 이었다면 우리가 그 꽃을 아름답다고 했을까요? 장미이기 때문에 장미가 아름다운 거잖아요?

장미를 볼때마다 나는 앤의 말을 떠올린다. 내 이름이 싫은것도 그런 이유이다. 이름이 못나지는 않지만 흔하디 흔해서, 한 때 커피숖에서 누군가 커피숖 한 복판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면, 적어도 세 테이블에서 반응을 할 정도로 흔한 이름이다. 만약에 장미가 장미a, 장미b, 장미c ... 이렇게 줄줄이라면, 제아무리 장미라도 독보적으로 아름답지 않을텐데 말이다. 나는 내이름이 그래서 싫다. 그래서 딸아이 이름을 내가 지었다. 예쁘고 흔하지 않는 이름으로. 앤이 말했던 돼지풀이 아이의 예쁜 얼굴을 잠식하지 않도록.

전요, 뭔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것에 그 즐거움의 절반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즐거움을 기다리는 동안의 기쁨이란, 틀림없이 나만의 것이니까요.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기다리는 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했었나. 애정하는 스티미언님 @fur2002ks 님의 뻘짓과, 그 뻘짓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의 기다리는 즐거움은 또 어떠한가... 흐흐 이러면서 또 한 명 낚시 성공. 그리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이 순간의 즐거움.

가지고 온 책을 다 읽고, 이동하는 동안의 그 손떨림 현상을 어찌할 수 없어, 마치 금고라도 털 기세로 뛰어 들어간 작은 동네 서점에서 나는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책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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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록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싶어하던 앤이, 그야말로 무지하게 많이 나오는 이 예쁘기 그지 없는 책을, 경남 양산의 작은 서점에서 발견하다니... 그 때 내게 중고 dvd 세트를 건내던 털보 아저씨를 보는 심정으로, 멀끔하게 생긴 서점 주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그는 나를 보고 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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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록소매 드레스를 앤에게 선물하며 매튜 아저씨가 하는 말.

“네 낭만을 전부 포기하지는 말아라, 앤.
낭만은 좋은거란다. 너무 많이는 말고, 앤, 조금은 간직해둬.”

앤에게 볼록소매 드레스는, 그 작은 손을 꼭 마주잡으며 가슴에 대고 눈을 반짝이며 앤이 하던말, “너무 낭만적이야”의 실체였다. 가질 수 없고, 가지지 못해도 늘 갖고싶어, 그들이 가진 것을 보며 앙망하던 것, 앤이 살아가고자 하는 낭만적인 삶의, 그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게서 보고자 하는 가시적인 어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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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의 착오로, 농사일을 도와줄 남자 아이가 아닌, 주근깨 투성이의 빨강머리 계집아이를 마차에 태우고 황망하게 돌아오던 중년의 매튜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며 기다리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앤에게서 낭만을 본다. 그리고, “너무 낭만적이야”라는 그 아이의 말과 생각에 매료당해 앤의 낭만을 지켜주고자 한다. 앤이 그리는 낭만적인 삶의 눈에 보이는 형태인 볼록소매 드레스를 선물하던 날, 앤이 느꼈던 그 터질것 같던 행복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같이 울컥하며 그날밤 꿈에서는 볼록소매를 입은 수많은 앤과 내가 등장해 온통 낭만적인 꿈을 꾸었었다.

우리에게 있어 볼록소매 드레스는 무엇일까. 내가 선물받고 싶은 매튜아저씨의 볼록소매 드레스를 그려보고싶다. 우리가 기억하고싶은, 그들이 기억하는 낭만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여기와서 이야기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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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얼마 전에 생각나서 유튜브에서 찾아봤는데, 신기하네요. 정말 사랑스런 아이입니다. (스포일러) 커서 길버트랑 결혼함.

앗 그런가요? 남자 아이들은 잘 안 봤을거 같은데 역시 카비님 짱입니다. 혹시 딸쌍둥이인가용? ㅎㅎ

아들 쌍둥이입니다. ㅎㅎ 이렇게 말하면 다들 측은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시더군요. ㅋ

저고 다시 읽어보아야겠어요~!!
괜시리 아주미라는 이름에 저를 가두고 있는 듯해요
낭만을 가득 느껴보고 싶어지네요^^

낭만이라는 이름, 정말 설레지 않나요? ㅎㅎ

뭔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것에 그 즐거움의 절반은 있다고 생각해요.

기다림도 즐겁게 보낼수 있는 삶!! 얼마나 낭만적이고 행복한 삶일까요?
우린 너무 조급함에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불평하고, 빨리 빨리를 외치며 살아가는것 같아 너무 안타깝네요!!
이룰수 없는 희망일지언정 한 주, 한 달, 1년의 희망을 갖고 살아보는건 어떨까 싶네요!!

오셨군요 ㅎㅎ 너무 빨라요 한국사람들... 필리핀에서 느릿느릿함에 기겁하다가 저도 느려지고 있었나봐요. 낭만을 찾으며 살고싶어뇨 항상

ㅋㅋ저거 유투브에 있자나요!

ㅜ 제이미님 팩폭... 그때는 없었어요ㅜ 모든 경로를 통해 다운 받아보려고 시도했으나 안됐음요. 연식 드러나는 중

아, 이 포스팅을 보고 명언을 남기는 앤을 보고 싶었는데 유튜브로 찾아 보면 되는 것입니까?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세상 역시 오래 살고 볼....읍읍읍.

요거 봐야 할 책인가봅니다
친구도 추천하고 ㅎㅎㅎ
자꾸 눈에 보이네요

그런가봐요 여기저기 아는 사람이 많아요 ㅎㅎ

낭만은 양서소장가님의 마음속에 있습니당

ㅎㅎㅎ 저를 말씀하시는건가용

어른이 되어 읽으면 다르더군요. ^^

네 어릴때는 홍당무라 놀리던 길버트 때문에 상처받고 다이애나와 숲속에서 소꿉놀이하는것만 보이더니 이제는 그 말이 보이더라구요 ㅎㅎ

아이한테 보여주고 싶은 만화 하나 생각났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앗 저도 감사합니다. 너무 어린 아이 보다는 십대 정도의 아이가 보기에 그만일거 같아요. 훤히 알지 못해도 뭔가 알아가는 그런 나이의 아이들요

오우... 전편 다시보고 싶어지네요:) 며칠전 미드로 앤을 보고선 저도 이 나이에 앤의 낭만을 이해해게 되었지 뭐에요.

네 맞아요. 어른이 되고나니 더 이해되는 명작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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