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 편지

in #zzan5 years ago (edited)

"에잇! 또 밟았네?
학교 가면 애들이 냄새난다고 또 한마디씩 하겠는걸?
정말 재수 없는 나무야!"

빨간색 자전거를 탄 남자아이가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투덜거렸어요.

"앗! 구린내!
도대체 이런 나무는 여기에 왜 심어 놓은 거야?
당장 동사무소에 가서 민원을 넣든가 해야지!
올겨울에는 꼭 베어버리고 다른 나무를 심었으면 좋겠어."

동그란 안경을 쓴 여대생이 코를 막고 땅에 떨어진 은행알을 밟지 않으려
까치발로 종종걸음을 치며 지나쳤어요.

가을을 맞아 서로 경쟁을 하듯 알록달록한 옷으로 치장한
도시의 나무들은 올해도 역시 사람들에게 예쁘다고
칭찬을 받고 있었지만, 은행나무만큼은 그러지 못했어요.
그 이유는 바로 열매 때문이었죠!

은행나무는 자신을 이 도시에 심어준 사람들이 너무나 고마워서
몸에 좋은 열매를 맺어 나눠주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그 열매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고 요리조리 피해만 다녔어요.
아마 다른 곤충이나 새들에게 뺏기지 않고 사람들에게만
주려고 고약한 냄새를 풍긴 것이 사람들은 싫었었나 봐요.

하지만 은행나무는 사람들을 그리 원망하지 않았어요.
평소에는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거나 숨만 크게 쉬어도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거든요.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가지를 내밀어 그늘이 되어주고
도시의 더러운 공기를 들이마셔 맑은 공기로 내뱉는 일은
정말 즐겁고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십 년이 지나고 백 년이 지나도 이 일을 계속할 수만 있다면
너무나 행복할 것만 같았죠.

그러던 어느 날 바닥에 잔뜩 떨어진 낙엽을 쓸러 김 씨 아저씨가 오셨어요.
은행나무는 아저씨가 잠깐 쉬시려고 길가의 벤치에 앉으시자,
얼른 가지를 길게 뻗어 그늘을 만들어 드렸어요.
은행나무는 평소에 김 씨 아저씨가
자신이 떨어뜨린 은행잎을 힘들게 치우시는 걸 보고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어휴~ 힘들어!
여기는 나무가 많아서 봄에는 꽃잎 치우느라 힘들고,
가을에는 낙엽 치우느라 힘들구나."

"그나저나 내년 이맘때는 일하다가 앉아서 잠시 쉴 때,
이 고약한 은행 냄새는 안 맡겠구먼.
구청 사람들이 은행나무를 베어내고 다른 나무를 심는다지?"

김 씨 아저씨는 이렇게 혼잣말을 내뱉으시다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셨어요.

은행나무는 그런 김 씨 아저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어요.
그리고 김 씨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죠.

"나를 베어내고 다른 나무를 심는다고?"

은행나무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지만, 소리를 내어 펑펑 울지는 못했어요.
아직 코를 골며 늦잠을 자는 옆자리 벚나무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기는 싫었거든요.

은행나무에게는 특별한 사람이 한 명 있었어요.
사람들이 바쁘게 출근하고 학교에 가고 나면
가냘픈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앞으로 와서
새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소녀.

보통,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을 좋아해 주다가도
가을만 되면 피하곤 했는데 이 소녀만큼은 달랐어요.
휠체어 바퀴에 은행알이 끼어서 터지더라도 절대 은행나무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는 법이 없었죠.
오히려 가까이 와서 나무줄기를 쓰다듬으며
은행잎을 주워 책갈피로 쓰곤 했어요.

은행나무는 다짐했어요.
자신이 베어지기 전에 꼭 이 소녀에게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부탁하겠다고,
이 소녀라면 나무 요정의 약속을 꼭 지켜줄 것만 같았거든요.

"저기……. 저."

은행나무 요정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는 게 처음이라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저 소녀의 품으로 뛰어내려 귓가에 가까이 대고
말할 용기는 더더욱 나지 않았죠.

은행나무 요정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참새 친구들이 요란스럽게 주위를 끌어주자 그제서야
소녀는 은행나무 요정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어요.

"너는 누구니?
책에서만 보던 요정 같은 건가?"

"나…. 나……. 나는 은행나무 요정이야.
사람에게 영혼이 있듯이 나무에게도 각각의 요정이 숨어 살고 있지."

은행나무 요정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지만,
바람 친구가 와서 요정의 목소리를
소녀가 잘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전달해 주었어요.

"아 그렇구나!
우리 할아버지의 말이 그럼 사실이었구나!
우리 할아버지가 나무도 사람처럼 영혼이 있다고 항상 말씀하셨거든."

"근데 너는 왜 나를 피하지 않니?
다른 사람들은 이맘때만 되면 냄새난다고 다들 나를 피하던데……."

은행나무 요정은 조심스레 소녀에게 물어보았어요.

"아니 나는 이 냄새가 별로 나쁘지 않아!
냄새 때문에 사람들이 잘 오지 않으니까 책도 조용히 읽을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새소리도 마음껏 들을 수 있거든."

"그리고 이 열매는,
할아버지가 아프지 말라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구워주셨어.
비록 건강해지지는 못했지만, 나에게는 참 고마운 열매야.
그런데 무엇보다 좋은 건 여기 와서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
나는 어려서부터 휠체어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하늘을 한번 날아보는 게 소원이거든."

"그랬구나! 나도 네가 찾아올 때마다 너무나 좋았어.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줄 수 있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말이야."

"당연하지!
겨울이 오면 추워서 자주 오지 못하겠지만,
눈이 오면 꼭 찾을게.
네 가지에 하얗게 눈이 쌓이면 정말 아름답거든."

"그래 고마워…….
그럼 이 은행잎을 가지고 있다가 겨울에 눈이 하얗게 쌓이면,
와서 되돌려 줄 수 있니?
나무 요정들은 추운 겨울이 오면 나무속으로 들어가서 겨울잠을 자거든.
그런데 덮고 잘 이불이 없어서 항상 너무 추웠어…….
네가 은행잎을 가져와 준다면 올겨울은 따뜻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아…. 그랬구나?
나무요정이 겨울잠을 잔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네.
물론 나무요정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지만 말이야. 하하하!
내가 겨울에 꼭 찾아와서 따뜻하게 은행잎을 덮어줄게."

소녀의 약속을 받은 은행나무 요정은 뛸 듯이 기뻐서,
바람 친구에게 부탁해 바람을 휘몰아쳐 은행잎들로 방석을 만들었어요.

"휘이익~"

그리고는 소녀를 공중에 띄워 그 방석에 앉혔죠!
참새들도 어느새 날아와 은행잎 방석을 작은 발로 잡아끌며 힘을 보탰어요.

"꺄아악~
어머 내가 지금 하늘을 날고 있잖아?
하늘을 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이었구나."

요정은 소녀를 자신이 서 있는 나뭇가지 끝까지 띄워 올리고는
유난히 크고 노란 은행잎을 소녀에게 내밀었어요.
그 은행잎은 마치 편지처럼 예쁘게 접혀있었죠!

"겨울에 여기 왔을 때 내가 자고 있으면
은행잎을 펼쳐서 안에 적힌 주문을 읽어봐.
그럼 내가 다시 깨어날 거야!"

그리고는 소녀를 다시 조심스레 내려 주었어요.
소녀는 요정이 준 은행잎을 자신이 아끼는 책 사이에 꽂아두었답니다.

소녀는 그 후에도 은행나무의 잎이 거의 다 떨어질 때까지
자주 찾아왔고 요정은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마다
나타나 소녀와 즐겁게 시간을 보냈어요.
물론 은행잎으로 방석을 만들어 하늘을 나는 놀이도 하면서 말이죠!

소녀는 어느 날 은행나무 요정에게 말했어요.

"나 사실 그동안 여기 앉아 아이들이 바쁘게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부러웠는데 이제는 하나도 부럽지 않아!
나는 걷거나 뛰지는 못하지만 날 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황금빛 가을도 어느덧 가고,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이 찾아오자,
소녀의 발걸음도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어요.

"부릉부릉~
위위위위윙~~"

요란한 소음이 들리자 은행나무의 가지들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깜짝 놀란 새들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도망가기 시작했어요.

"얼른 베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고!
오늘 베어야 할 은행나무가 아직 많이 남았다고,
빨리 일 끝내고 감자탕에 소주나 한잔 해야지!"

요정은 그 소리를 듣고 마지막을 예감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 시간이 다가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옆자리 벗나무에게
내년 봄에도 예쁜 꽃을 피워달라는 말을 아직 하지 못했는데…….'

'아침마다 찾아와 예쁜 목소리로 지저귀며 잠을 깨워주던 새들에게
고마웠다는 말도 아직 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힘들 때마다 늘 곁에 와서 지켜주던 소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도 못했는데…….'

마지막으로 힘껏 부르면 소녀가 나타날 것만 같아서
은행나무 요정은 목청이 터지라 불러보았지만,
소녀를 부르는 소리는 시끄러운 전기톱 소리에 묻혀서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았어요.

그 후로 며칠이 지나고 첫눈이 펑펑 내리자,
소녀는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했어요.
은행나무 요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날씨가 좋지 않아 나가지 말라고 가족들이 말렸지만,
소녀는 노란색 목도리를 둘러메고 힘차게 휠체어 바퀴를 굴렸어요.
품에는 요정에게 돌려줄 은행잎과
서툰 솜씨로 직접 짠 조그맣고 노란 목도리도 함께 말이죠.

오랜만에 외출해서일까?
아니면 선물을 받은 은행나무 요정의 반응이 궁금해서일까?
소녀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하얀 눈을 맞으며 은행나무가 있던 곳에 도착했죠.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늘 같은 자리에 있던 은행나무는 보이지가 않았어요.

"어? 은행나무는 어디 갔지?
은행나무 요정아? 너는 지금 어디서 자고 있니?
아 참! 은행나무 요정을 깨우려면 은행잎을 펼쳐서
주문을 외워야 한다고 했지?"

소녀는 책갈피에서 은행잎을 꺼내서 잽싸게 펼쳐보았어요.
하지만 은행잎에 주문 같은 것은 적혀있지 않았죠.
대신 또박또박한 글씨로 편지가 쓰여있었어요.

"네가 이 편지를 볼 때면 ,
아마 나는 이미 베어지고 이 자리에 없을 거야.
아마 사람들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걸 원하지 않는가 봐!
하지만 나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아.
아주 오랜 시간 나를 친구처럼 좋아해 줬었거든!"

"혹시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다시 오면,
예전처럼 다시 여기 와서 새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어줄 수 있니?
내가 사라져 버려도 말이야."

"그리고 너는 이 세상에서 나무요정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네가 부르면 어떤 나무요정이든 너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거야.
그러니 여기 다시 심어질 나무에게 이 편지를 전해줄 수 있니?"

<나를 대신할 나무요정에게...>


"빨간색 자전거를 탄 꼬마 남자아이가
힘들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올라오면 바람에게 부탁해서
꼬마의 등을 힘차게 밀어주세요.
그 꼬마는 아직 자전거 타는 게 서툴러서 오르막길을 잘 못 오르거든요!"

"또, 동그란 안경을 쓴 여대생이 아침에 이곳을 바쁘게 뛰어가면,
햇살에게 부탁해서 그녀의 젖은 머리를 좀 말려주세요.
그녀는 늦잠꾸러기라서 아침마다 머리를 덜 말린 채 학교에 가거든요."

"그리고 김 씨 아저씨가 청소하러 오셨다가 잠시 쉬려고 앉으시면
가지를 길게 뻗어서 그늘을 만들어 주세요.
김 씨 아저씨는 청소하러 오시면 항상 이 곳에 앉아서 쉬시거든요."

"마지막으로…….
짙은 갈색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가 휠체어를 타고 찾아오면
나무요정들과 새들에게 부탁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를 열어주세요.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마음씨가 예쁜 사람이거든요."

소녀는 그제서야 그루터기만 남은 은행나무를 보았고,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구슬 같은 물방울이 떨어져
노란색 편지를 적셨어요.

그리고 누군가 부르는 노랫소리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주변 나무의 요정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나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노래로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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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돈님!!! 얼른 스팀잇으로 다시 돌아와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장원을 축하드려요. ㅎㅎ

우연히 뉴스에서 은행나무 베어낸다는 기사를 접하고
만든 글인데 아름답다고 평가를 받으니 너무 기분이 좋네요~
고맙습니다!

정성과 감성이 잘 어우러져서 가슴 깊이 들어오네요. 축하드립니다. 키돈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간을 좀 들였지만 이런 댓글들을 받으니
그 시간들이 전혀 아깝지 않네요~

와~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아요. 입상 축하드립니다!!! ^^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감동과 여운이 남는 동화네요.
저도 언젠간 이렇게 멋진 동화를 쓰고 싶습니다. ^^
이달의 작가 대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천한 글에 과찬을 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헛 일러스트는 직접 그리신건가요! 일러스트와 동화가 너무 잘 어우러져서, 힐링 잔뜩 받고 갑니다. 은행나무를 보게 되면 이제 냄새로 눈을 찌푸리는 일은 없을 것만 같아요 ㅠ_ㅠ

몇 개는 그렸는데 몇 개는 다운받아서 합성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달의 작가 대상 수상을 축하 드립니다. 대상 소감을 포스팅 하셨으면 보너스로 스팀짱의 좀 묵직한 파워로 보팅을 올려 드리려 했는데 아직 수상을 하신 사실도 인지 하지 못하신듯 합니다. 상금으로 5000zzan을 드렸는데 가능하면 기념으로 스테이킹 하시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눔하는 기쁨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제야 글을 봤네요...
늦게 글을 봐서 죄송합니다.
제가 작년까지는 나름 헤비유저였는데 올해는 스팀잇에 잘 안 들어와서
현재의 시스템을 잘 모릅니다.
ZZAN을 어떻게 스팀달러로 교환하는지도 잘 모르겠구요~
가능하면 5,000zzan은 좋은 곳에 쓰고 싶은데~
일단 스팀짱의 시스템에 대해서 먼저 공부를 하고 포스팅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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