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16. 대대장이 되다.

대동강일원에서 철수를 하는 과정에 부대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바로 대대장 대리 임무를 수행했다. 대대장이 곧바로 부연대장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대대장 대리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가 6사단 제2연대장이던 함병선 장군이 제2사단장이 되면서 다시 제2사단의 대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2사단은 피해를 많이 입어서 대대장들이 다 시원치 않았다. 함병선 장군이 우수한 대대장을 선발하라고 했다. 제32연대 부연대장 이남호 중령의 추천으로 3대대장으로 보직되었다.
대대장으로 보직되어 금성전투와 저격능선 전투를 치렀다. 대대장이 되어서는 주로 고지전투를 수행했다. 51년 10월 휴전논의가 처음 시작될때, 중공군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월봉산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이대용 대대의 우측에는 미군 제24사단이 공격을 했다. 이대용 대대는 수월하게 공격을 해서 목표를 점령했으나, 미군은 정령을 하지 못했다. 미군은 전차 22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목표를 점령하지 못한 것이다. 약 이틀 동안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미군부대를 뒤로 빼버리고 이대용 대대에게 계속 공격하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밤 12시경에 명령을 받은 이대용은 대대원을 이끌고 이동을 하고 있었다. 이동하는 과정에 3-40 구 정도의 미군들 시체들이 그대로 널려 있었다. 미군들은 부상자까지는 후송을 했으니 너무 지쳐서 미처 전사자까지는 후송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대용은 이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저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여기와서 죽어야 하나 ?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모자를 벗고 묵념을 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미군대대와 교대해서 공격을 했다. 속으로 많은 걱정을 했다. 그러나 이대용의 대대가 공격해 가자 적도 그냥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미군들과 전투를 하다가 적도 많이 지치고 죽고 했던 것이다. 별로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않고 점령했다. 저격 능선 전투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미군과 교대해서 공격을 했는데 적이 물러서고 말았던 것이다.

고지전투를 한참하고 있다가 미국 보병학교로 교육을 받으로 떠나게 되었다.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군 장교들에게 전술교리를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겠다고 해서 150명을 선발했는데 거기에 뽑힌 것이다. 원래는 제1차 교육은 전쟁경험이 풍부한 장교들을 대상으로 지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대용은 지명대상자였으나 연대장이 전투 중이라고 교육받으러 갈 수 없다고 해서 가지 못했다. 제2차 파견 부터는 시험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제2차 시험에 응시했으나 시험기간중에 전투를 하느라고 가지 못했다. 제3차 시험에 시단으로 가서 면접을 했다. 면접관이 6사단장하던 김종오 장군이었다. 김종오 장군은 이대용을 바로 알아보고 “ 자네 압록강까지 갔던 이대용 아닌가 ?” 하면서 구술시험에 100점 만점을 주었다. 영어시험과 수학시험을 보고 그대로 선발이 되었다.

51년 8월에 제1차로 교육을 받으러 갔으며, 6개월마다 한번씩 보냈다. 이대용은 제3차로 52년 8월에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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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is very interesting sir,i support and agree your works sir @wisdomandjustice

당시 미군 및 유엔군의 피해도 상당했지요..
참 가슴아픈 역사 입니다.ㅠㅠ

미군뿐만 아니라 함께 참여한 국가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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