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의 언어?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어제는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돼 1년 넘게 교류해오던, 실험영화감독인 H님이 20세기 소년을 방문했다. 내가 20세기 소년을 처음 방문한 날 오전엔 영화제에 선정된 그의 영화를 영화관에 찾아가 보았는데,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고민만 하다 20세기 소년에 오지 않거나, 결국 오게 됐다 하더라도 20세기의 여름에 맞춰 이곳에 진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작년에 열린 자신의 전시에 나를 초대했지만, 그 당시 나는 사람을 만날 상태가 아니었고, 몸이 안 좋아 거리상으로도 먼 그의 전시장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계속 나를 만나고 싶어 했으나 나는 나타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의 바람을 모른 체하며 서로의 일상과 생각만 꾸준히 공유했다.

그의 영화를 보러 간 날, 우리는 가벼운 장난을 했는데 그것은 상영날 만날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없고- 그것을 정하지 않고 운에 맡겨보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막연히 지금은 그를 볼 때가 아니라 생각하던 중이라 그것이 무척 다행으로 느껴졌다.


20세기 소년에서 나는 '직관'이라는 단어를 처음 귀로 듣게 됐다. 직관의 사전적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공간에서 쓰이는 직관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지난 몇 년 나의 인생이 늘 '직관'을 따라왔기 때문이다. 직관이라는 것은 매우 사소하게는 오늘 무엇을 먹을 것인가부터 시작해 크게는 너의 일부를 떼어내라고까지 말한다. 그것은 직관의 언어고, 그것이 온 순간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


요즘 나는 매일 20세기 소년에 가고 있고, 그곳에서 매일 마법사님과 대화하고 있다. 어제는 직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다, 내가 직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지난 30여 년의 인생에서 꽤나 정성껏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직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친동생과 가장 가까운 친구 둘 뿐이고, 그들 역시 그것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사님과 직관에 대해 이야기 하는 순간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위로와 해방감을 느꼈다.

마법사님은 나의 직관에 대해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냐 제안하셨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 나의 이런 면을 알면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래서 결국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야)

이 생각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져 온 나의 아주 뿌리 깊은 아킬레스건이었기 때문에 마법사님의 제안을 듣고도 명확한 대답 대신 겁이 난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H님과는 지하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그를 실제로 마주하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지만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그에게 대뜸, 직관을 아시나요?라고 물어보았다. 스팀 시티 바깥의 사람에게 직관이라는 단어를 써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직관을 매우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대답과 함께 칼 융,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가들 모두 직관을 매우 신뢰했다고 답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나 놀랍고도 반가웠지만, 그가 직관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인지 의심되었다. 그에게 직관에 따라 행동했던 일화를 들려줄 수 있냐 부탁했다. 그는 독일에 간 것 역시 자신의 직관이었고, 그로 인해 영화를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던 일들의 대부분을 직관에 따랐다고 말했다. 그것은 확실한 직관의 언어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안심되었을까. 그에게 나는 최근 내가 느낀 너무나도 수많은 나를 향한 직관에 대해 쏟아놓았다. 그는 가만히 듣고 있었고, 나는 계속 이상하시죠? 제가 생각해도 제가 이상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어떤 판단도 하지 않았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끝난 후로 우리는 평소처럼 음악, 영화, 예술, 창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와 나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서로의 예술 매체가 우리에게 종교이자 신이고 나아갈 방향의 지표가 된다는 생각을 나눌 수 있었는데, 나는 그 생각을 늘 따르고 있었으나 그것을 따르는 이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자체로도 역시나 엄청난 위로와 지지가 되었다.

20세기 소년을 나서 역으로 향하는 중에도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카톡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몇 안 되는 내가 선택한 사람 중 하나인데, 그래서 나는 앞으로의 삶에 그가 무척 특별한 존재가 될 것임을 막연한 직감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는 연신 나의 다음 작품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말했고, 나는 이렇게나 예술을 잘 아는 사람이 고작 나 따위에게?라는 익숙한 자학으로 빠질 뻔했지만, 그런 한편 그에게 내가 바라고 있는, 아직 나조차도 모르는 내가 만들게 될 음악을 들려주는 날이 오면 좋겠다 생각하게 됐다. 그는 무엇이 됐든 스스로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말했다. 내가 나의 직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앞으로의 삶은 얼마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나 역시도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고, 그것을 20세기 소년에서 상영하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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