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좋아
1 매주 일요일은 화분에 물을 주는 날이다. 테이블야자와 파초일엽 화분을 물이 담긴 양동이에 한 시간 정도 담가둔다. 아래에서부터 물을 빨아들이는 게 좋다는 엄마의 말을 들은 후로는 그렇게 물을 주고 있다. 흙이 잔뜩 물을 머금을 걸 생각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2 나른한 일요일. 동생이 취직한 후로 나도 휴일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내 주변엔 예술가(+프리랜서)가 대부분이고, 심지어 음악 쪽은 주말에 공연이 많기 때문에 쉬는 날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주말은 쉬면 쉬는 거고, 일 있으면 일하는 그런 날이었다. 일을 그만두고서야, 동생이 주말마다 내 방을 찾아오고서야 주말은 휴일이라는 걸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3 매일이 쉬는 날인 백수지만, 주말에는 특히 더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려고 한다. 늘 지켜오던 루틴 한두 개를 빼먹거나 평소와 다른 일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은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정리하는 시간이지만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져 그냥 글을 쓰기로 했다.
4 이번 주는 오버워치 리그 킥오프 클래시 토너먼트 결승이 있다. 11월까지 아직 경기가 많이 남아있지만, 괜히 결승이라고 하니 평소보다 더 시간을 내 보게 된다. 오늘 저녁 경기에서 동부 우승팀이 결정되고, 내일 새벽 경기에서 서부 우승팀이 결정된다. 네 팀 정도로 추려진 지금, 웬일로 동부-서부 모두 내가 응원하는 팀이 올라와 있다. 심지어 리그에서 가장 좋아하는 팀인 필라델피아 퓨전은 어제 상하이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이겨 결승전에 올라가게 되었다!
5 갈수록 리그가 더 좋아진다. 운영도 작년에 비하면 많이 깔끔해졌고, 무리처럼 보였지만 오버워치2로 리그를 연 것도 좋은 선택이 된 것 같다. 빨라진 한 타 흐름, 다양한 영웅 조합을 보는 재미있고, 블리자드 한국팀이 만들어주는 2차 컨텐츠를 보는 즐거움도 있다. 오버워치 리그 온라인 샵에 들어가 필라델피아 퓨전의 유니폼을 찾아보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필라델피아 퓨전의 촌스러운 로고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 사서 집에 걸어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난생처음 스포츠를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버워치 리그에 푹 빠져있다.
6 2주 넘게 사람을 잔뜩 만나고 다녔다. 금요일 오전을 끝으로 공식적인 약속이 모두 끝났다. 끝나고 보니 주말. 오랜만에 혼자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과 보낸 시간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식물을 돌보며 혼자 방 안에서 바쁘게 보내는 시간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순간이 오더라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7 얼마 전부터 다시 청계천을 달리기 시작했다. 일출을 따라잡는 건 계속 노력은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포기하기로 했다. 오늘은 새벽 6시에 나가 청계천을 가볍게 둘러보고 왔다. 오랜만에 달려보니 상체가 단단해진 것이 느껴진다. 달리지 못한 2주간 틈틈이 해온 근력 운동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아직 1.5km 남짓을 달리지만 1km 기록은 5분 40초 정도가 나온다. 내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6분보다 빠를뿐더러, 호흡과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고 안정적이다. 달리고 나서도 한참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8 보통 새벽 청계천을 달릴 때는 70~90년대 앨범을 주로 듣는데, 오늘은 레드벨벳 노래를 들었다. 흐린 청계천 아침, 레드벨벳의 청량하고 예쁜 목소리, 그만큼 예쁜 음악. 그 어떤 음악보다도 깊게 나를 위로해주었다. 레드벨벳, 오버워치 리그만큼 좋아. 며칠 전 보고 온 코스 옷들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예뻤고 그래서 잠깐 마음이 환해졌다. 잘 살기 위해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그 깊이만큼 세상과 연결되는 힘도 강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레드벨벳 - 다시,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