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만드는 오후

in #stimcity2 years ago (edited)

오늘은 저녁 식사 전 한 시간 정도 악보를 만들었다. 고작 한 시간인데도 평소보다 집중해 피로가 몰려왔다. 저녁 시간까지는 2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저녁으로 먹을 빵을 살 겸 굳은 몸과 머리를 풀 겸 산책을 나섰다.

오늘 한 일은 악보를 악보 프로그램으로 옮겨 키를 바꾸는 작업이다. 정확하게는 보컬 악보를 색소폰 악보로 옮기는 이조 작업이다. 있는 악보를 프로그램에 그대로 옮기는 게 일의 90% 이상인 간단한 작업. 이 일을 나는 2~3년 전부터 가끔 해오고 있다.

이 작업은 키를 옮기는 과정이 있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미 존재하는 악보를 프로그램으로 옮기는 것이 주된 일이라 무척 간단하다. 비유해보자면 완성된 글을 다시 문서 프로그램에 타이핑하는 일과 비슷하달까. 이 작업에는 별다른 창의성이 필요하지 않다. 글을 읽을 줄 알고, 그것을 타자로 칠 수만 있으면 된다. 가끔 오탈자를 교정해도 되지만, 그대로 둬도 된다. 기본적으로 상대가 내게 원하는 것은 건넨 글을 그대로 옮겨주는 것이다.

작업 기한이 비교적 여유로워 보통 다섯 곡 정도로 묶어 내킬 때 처리하는 편인데, 처음에는 이 일을 하는 게 전혀 내키지 않았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보다는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전문성을 발휘해 더 많은 돈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도, 늘 귀찮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이 작업은 하고 나면 언제나 마음에 따뜻한 여운을 남긴다. 고민할 필요 없이 존재하는 음을 읽고, 그 음을 옮기고, 조표를 입력하고, 겹세로줄 때로는 도돌이표를 입력하고, 악보를 보기 좋게 정렬하고, 가사를 입력한다. 그저 내가 매개자일 뿐인 그 간단한 작업에는 정답이 있다. 이미 만들어진 선율도 있다. 나는 그저 음을 쓰다듬어가며 한 자 한 자 빠르게 옮기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이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사는 삶을 상상해보았다. 얼마 벌지 않더라도 그 수입에 맞춰 소박하게 사는 그런 삶을 꿈꿨다.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무엇보다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것’, ‘나만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이 있을까? 어쩌면 악보를 그대로 옮기는 그 단순함 안에서도 나이기에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동안 무시했던 일상의 사소함들이 미안할 정도로 반짝이게 느껴진다. 주어진 악보를 고스란히 옮기는 내 모습도 나름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하기로 한 몇 개의 과업을 차례로 해나가야겠지만, 그 일이 끝나면 삶을 좀 더 단순화하는 것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목표로 하는 일들, 어쩌면 ‘대업’이라고 느껴지는 그 일들도 악보를 옮기는 것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이라 생각하며 해나가고 싶어졌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고, 그렇기에 정성을 다하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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