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지도를 상상하다

in #kr7 years ago (edited)

스팀잇에서의 두번째 글입니다.
오래 전에 수저게임*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8명 중 2명은 금수저, 나머지 6명은 흙수저 카드를 받습니다. 랜덤하게 뽑기 때문에 아무도 누가 흙수저로 태어날 지, 금수저로 태어날 지 알 수 없습니다. 금수저로 시작하는 사람은 부동산을 갖고 시작하고 흙수저들은 몇 푼의 칩(돈)으로만 시작하는데, 한 번 턴을 돌 때마다 월세와 등록금으로 칩을 내야 합니다. 금수저들은 월세를 받습니다. 그리고 국고에 일정량의 공공 칩이 또 있습니다.
턴을 한 번 돌 때마다 수저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로 법안을 제안해서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투표를 해서 금수저에게 유리한 규칙, 흙수저에게 유리한 규칙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수저에게 종부세를 물리는 법안을 투표할 수도 있습니다. 흙수저에게 월세 지원이나 기본소득을 주는 법안을 투표할 수 있습니다.
기억에 남았던 것은, 우리가 모두 같이 게임을 하면서 국고가 텅텅 비어가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습니다. 금수저들도 절세를 해서 많이 가져갔고, 흙수저들도 복지를 강화해서 게임은 서로 윈윈이 되어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의 규칙에는, 국고가 파산하면 모두가 패배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게임은 제로섬 게임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윈윈하자니 국고가 텅텅 비어가서 마이너스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안했습니다. “국채를 발행하고, 다음해에 이자를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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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갖고 있는 칩(돈)의 개수를 전부 볼 수 있었고, 국고에 얼마가 남아 있는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칩 몇 개씩 국고에 빌려줘도 아무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명이 국고에 칩을 빌려주고 마이너스를 해결한 뒤, 마지막 턴에 세금을 내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망하지 않았고, 모두 적절히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날의 게임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서로의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전부 볼 수 있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돈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많던 돈은 전부 어디 갔을까?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전부 가져갔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들은 갚아야 할 빚이 많기 때문에 돈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에서는 예산이 부족하고, 빚이 많아 졸라매야 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디에 돈이 넘쳐나는 걸까? 어디에 있는 돈을 어디로 나눠야 하는 걸까? 우리가 사는 사회는 너무 거대해서 누구도 한눈에 사회 전체를 볼 수 없고, 연결된 세계를 전부 볼 수도 없습니다. 모두의 사이 사이는 마치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처럼 가려져 있고, 모두가 가장 가까운 세계 너머를 보기가 힘듭니다.
스타벅스에 모이는 돈은 어디로 가는 걸까? 한해 몇백억 천억 대에 이르는 통신사의 마케팅 비용은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젊고 가난한 사람들의 번 돈의 대부분이 월세로 나간다면, 월세를 받는 주인들은 왜 자신들도 어렵다고 하는 걸까? 최저 임금이 올라 자영업자들이 피해를 본다면, 자영업자들이 지불하는 임대료를 낮출 수는 없는 걸까? 만약 어디에 있는 돈이 어디로 흐르고, 어디에 모이고, 어디서 나오는지를 모두가 남산 타워에서 교통 흐름 보듯이 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합의를 보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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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사회 전체의 돈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면, 지금 존재하는 수 많은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상화폐가 등장했습니다.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기술은 모든 거래를 투명하게 기록하게 만들었습니다. 익명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얼만큼의 자금이 한번에 움직이는지, 어디(거래소) 에서 어디(거래소)로 어떤 형태로 움직이는지, 어디에서 어디로 간 자금이 또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비트코인의 거래내역 패턴으로 돈의 주인을 추적하는 방법론이 사라 메켈존 Sarah Meikeljohn 과 동료들이 2013년 발표한 논문**으로 증명된 후, 비트코인 거래 데이터의 지도는 지금껏 범죄 자금이나 자금세탁 추적에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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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arah Meikeljohn 의 논문**에 등장한 비트코인 트랜젝션 데이터 시각화 자료. 가운데 원은 거래소. 동그라미 크기는 거래량)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가상화폐와 블록체인 방식의 거래를 도입할 경우, 투명한 ‘돈의 지도’ 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게다가 바로 전에 포스팅한 것처럼, 놀라운 시각화 작업(https://goo.gl/AiuWMK) 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갑’ 에 이름은 드러나지 않지만 종류와 특색을 라벨링하는 방식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20대 개인’ ’50대 자영업자’ 등으로 말이지요. 또 업종별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매업’ 에 쓰이던 돈이 ‘게임업’ 으로 이동했다던지, ‘물류업’ 에 과도하게 배치되었다던지, ‘신용카드 회사’ 에 과도하게 돈이 몰린다던지 하는 정보가 실시간으로 기록될 것이고, 실시간으로 지도가 형성되는 사회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는 통계청에서 수많은 공무원들이 조사해서 분기별로 발표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가까워도 4-5개월 전의 데이터밖에 볼 수 없고, 상업, 생계, 부동산 등의 통계 데이터가 저마다 따로 떨어져서 한번에 직관적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사회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돈의 흐름에 대한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은,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상화폐가 주는 하나의 놀라운 가능성일지도 모릅니다.


*<불만의 품격>저자 최서윤씨가 제작한 수저게임. 상세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gamespoon/
**Sarah Meiklejohn, et al. (2013) “A Fistful of Bitcoins: Characterizing Payments Among Men with No Names” p.9
http://www0.cs.ucl.ac.uk/staff/S.Meiklejohn/files/imc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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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주제 잘 읽었습니다. 실제로 각 거래소들은 이러한 거래 내역을 바탕으로 사용자들의 매매 패턴을 분석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 그리고 이러한 취향이 스팀 혹은 스팀의 독자들에게 잘 맞을지는 모르지만 - 올려주신 것처럼 레퍼런스가 달려있는 글을 참 좋아합니다. 더 궁금한 사항을 깊게 찾아보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가급적 레퍼런스를 꼼꼼히 올리려 노력중입니다.^^

아니...왠 글이 이렇게 품위넘치고 자양분이 꽉 차있나요?
팔로 걸고야 말겠습니다.^^

스팀잇에 오신것 을 환영합니다.^^
저는 krwhale이라는 아기고래와 코인시세 챗봇을 운영하고 있어요 :)
- 아기고래에게 Voting 받는 법
- 코인시세 챗봇
1주일 뒤 부터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거에요~^^

돈에 어두운 저는....어렵기만하네요.

사실 저도 '돈에 어두운' 건 마찬가지랍니다..>.<

가상화폐가 그 자체의 가치보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적인 매력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오히려 블록체인의 익명성이 통계적 다양성과 활용 가치를 높이는 것 같아 재밌네요!
아 그리고 저 게임 자세히 찾아봐야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쉽게도 수저게임 보드게임은 현재 판매하고 있지 않더라구요... ㅜ 하지만 이 게임에 대한 여러 후기들이 존재합니다. 'SBS 상속자 게임'이 이 게임으로부터 컨셉을 얻은 방송이었답니다.:)

정보의 불균형은 공공의 합의를 도출하기 어렵게 하지요. 하지만 모두에게 공개된 정보는 또 다른 불만을 만들어 내기에 인간 사회가 더욱 어렵지 않은가 싶습니다.

저도 스팀잇을 지켜보며 말씀하신 지점을 생각해보고 있어요. 스팀잇은 어쩌면 좀 큰 버전의 수저게임처럼 '분배' 가 공개되어 있는 세상이니까요. Kmlee님이 지적하셨던 죄수의 딜레마와 스팀잇에 대한 환각 이야기 보면서, 정보를 공개하고 '무책임한 소비자들에게 모든 결정을 맡겨버렸다는 것'에 대해 복잡한 생각이 많이 들었었답니다. 결국 이곳은 이기심이 이기느냐, 협력이 성공하느냐, 하는 하나의 거대한 게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부터 읽으신겁니까! 가입 전부터 관심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또 제 오만이 배를 불리는군요.

게임에 참여했던 분들이 공동체 전체의 번영과 안위를 선택해서 다행입니다. 현실에서는 다음 턴이 어찌되든 이번 턴에서 내가 다 먹고 죽겠다는 사람들이 태반이죠. 레퍼런스까지 신경 쓰신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아마 서로 얼마나 가졌는지 투명하게 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앞날도 안 보이니 마이너스섬 게임처럼 느껴질 겁니다. ㅜ 댓글 감사합니다.

우와. 내용 너무 좋아요. 시각화 자료도 그렇구요. 스팀잇 청서 번역도 감사해요. 처음 시작하는작은 실험인데^^
설령 공개키로 주체를 특정할 수 없다 해도, 정보의 불균형 해소가 사회 전반적으로 미칠 파급효과는 생각만해도 즐거워요.
정보 독점으로 보는 이익을 적절히 분배할 수 있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약간은 회복할 수 있겠죠.

넵 개인 프라이버시만 보호할 수 있다면 어떤 종류의 데이터에 대해서도 정보 공개가 미치는 영향은 클 겁니다. ^^ 청서 번역 때문에 수고 많으세요~

감사합니다. 대댓글엔 일주일의 시간 제한이 있는것도 아니니 긴 호흡으로 가려구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보내주신 스달 잘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내용이 흥미로워서 순식간에 읽었네요! 현실에서는 부의 투명성 뿐만 아니라 계층간 지식,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준차이도 무시못하죠. 수저게임 보니까 투표의 중요성도 생각나네요. 다음 선거때도 투표합시다!

넵. 사실 힘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투표였지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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