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이번 생은 망했어: 그 두번째 이야기
네모 반듯한 거실,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 그리고 더 작은 방 하나. 거실에는 두꺼워 보이는 투박한 TV가 놓여져 있고 TV 위에는 큰 가족 사진이 걸려있다.
액자 안에는 넷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고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한다. 그 넷은 나와 신랑, 사랑스런 내 아이들이 아닌 바로 아빠, 엄마, 언니, 그리고 나.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다름 아닌 우리 엄마. 날씬하고 더 예뻐진 우리 엄마.
“얘가 뭘 그렇게 놀라? 엄마 가게 열쇠 놓고 가서 다시 왔어. 넌 아직도 밥 안 먹고 뭐해! 너 오늘도 늦겠다. 맨날 지각해서 어떡하려고 그래!”
몸이 얼어붙은건가. 자다 일어나서 아직 몸이 안 풀렸나보다. 그리고 내 정신도.
“어딜…? 나 어딜 맨날 지각하는데…?”
그래. 내가 맨날 지각하긴 하지. 우리 딸 유치원. 불쌍한 우리 딸, 엄마 때문에 항상 지각이지.
“얘가 진짜 너 오늘 왜 그래? 학교지 어디긴 어디야! 빨리 한숟갈 먹고 나가!”
두꺼운 TV위에 있는 사진 속 내가 점점 크게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치마 정장, 그리고 짧은 검은 단발머리를 억지로 고데기로 한껏 바깥으로 삐치게 만든 맥라이언 머리. 아주 촌스러운, 그러나 이쁜 줄 알았던 그녀의 그 머리.
엄마는 밥 한숟갈이라도 뜨고 갈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곤, 열쇠를 집은 채 종종걸음으로 나가신다. 나는 이제 혼자다. 이 어색한 집에 나 혼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아직 잠이 덜 깨서겠지.. 마치 실물 사람이 앉아있는 마냥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가족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색한 치마 정장에 어색한 머리를 한 소녀 옆에 어색한 미소를 짓고 머리를 무스로 한껏 빗어넘긴 중년의 아저씨가 있다. 오랜만에 보는 나의 아버지..
아빠를 보는 것은 십수년만이다. 엄마 아빠가 헤어지신 후 얼마 안 있어 결혼한 우리 언니 결혼식에 굳은 얼굴로 참석하신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다. 그때 아빠는 혼자서 뷔페 음식을 드셨더랬다. 왠지 핼쓱해 보이기도 하고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아빠답지 않게.
우리는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안 했었다. 비록 사진 상이지만 십수년만에 본 아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건지. 안부를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또 못 본 척 눈을 돌려야 하나.
이제는 아빠에게 미움조차 없는데. 그리고 연민조차 없는데. 다행히 사진 속 아빠는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이다. 언제나 자신만을 가꾸고 챙겼던 멋 부리기 좋아하는 아빠. 그 모습이라 참 다행이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가슴을 부여잡고 아까 나왔던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작아 보이는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눕힌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머리가 빙빙 돈다.
나 지금.. 꿈 속에 있는거지? 꿈인데.. 엄청 생생하네.. 꼭 진짜처럼..
언젠가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었지. 꿈 꾸는 도중에 이게 꿈인걸 눈치채면 그 꿈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건 모든지 할 수 있다고..그래서 정말 시도해봤는데 그게 정말 되던데. 갑자기 하늘 날기 같은거 말이야.
나 지금 꿈인거 눈치챘어. 그러면 이제 날 수 있을거야. 나는거 말고 또 딴거 뭐 없나? 현실에선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그런거. 음.. 생각 안난다. 그냥 날아보자. 아니, 우선 침대에서 붕 떠보자. 근데 어떻게 하는거였지? 생각만 하면 되는거였나?
나는 날고 있다.. 몸이 점점 떠오른다.. 하늘 위를 날아간다.. 훨훨 날아간다…
응? 아직도 침대네.. 그냥 생각만 하면 되는게 아니였나? 음…
아.. 모르겠다.. 그래.. 꼭 날아야만 꿈인건 아니잖아~~ 꿈 내용을 보면 꿈인걸 알 수 있지. 말도 안되는 진짜 말도 안되는 그런 일이 현실인 것처럼 일어나면 꿈인줄 눈치 까는거지.
근데.. 내 심장은 아직도 미친듯이 뛰네.. 그래.. 꿈은 정직하다고 꿈에선 이제 영원히 안 느낄줄 알았던 그런 강력한 감정들도 나도 모르게 느끼더라구.. 꿈은 꼭 재현해야 하나봐.. 과거를.. 아니면 나의 감정을. 속죄하는건지.. 아니면 속죄받고 싶은건지.
그냥 이렇게 누워있다보면 어느새 우리 아들 우는 소리에 화들짝 깨겠지? 요즘 이가 나려는지 잠도 자주 깨니.. 내가 요즘 잠을 깊이 못 자서 그래서 이런 꿈도 꾸는거겠지.. 깊이 자면 꿈도 기억 안 나잖아.
… 근데 이런 꿈도 있네.. 갑자기 뜬금없이 아빠 얼굴이나 보여줘서 괜히 마음 심란하게 만들고 뜬금없이 추억하고 싶지 않은 촌스런 옛사진이나 보여주고. 그리고 누워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스펙타클한줄 알았는데 참 지루한 꿈이네…하암…
내 꿈은 내가 꿈인줄 눈치챈거 아직 모르겠지? 그러니까 안 깨고 계속 이러고 누워있는거겠지… 근데.. 아까 꿈에서 본 엄마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롭네.. 엄마가 그때는 정말 젊고 날씬하셨지.. 지금도 연세에 비해 한미모하시지만..ㅎㅎ
근데 나 언제까지 계속 이러고 누워있어야 되지? 이 꿈은 뭐 깨지도 않네.. 오늘따라 우리 아들이 잠을 깊이 자나보네.. 나 좀 깨워주라... 이 꿈은 왠지 하는 일 없이 누워있기만 하는데도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곤한 느낌..
아.. 우리 딸래미 이제 유치원에서 할로윈 파티 하는데 무슨 옷을 입혀서 보내야 되나.. 너무 튀어도 그렇고.. 또 너무 평범해도 재미없고..
갑자기 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온다.
…? 여기 어디? 나 설마 꿈 속에서 살짝 잠든 거? 이런 경우도 있나? 자다 일어났는데도 아직도 꿈 속이네?? 아… 진짜 아들아 나 좀 깨워달라니까…
점점 커져오는 발소리.. 방문이 살짝 열린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꿈인데 그냥 깰 때까지 젊은 엄마랑 대화나 많이 나눠보자..꿈 속에서나마 효도 좀 하자..ㅎㅎ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엄마~ 왜 또 오셨어요? 또 뭐 놓고 가신거에요?^^”
헐……………………….
이번엔… 사진 속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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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에 계속...
<이번 생은 망했어: 그 첫 이야기>편 다시 보기
https://steemit.com/kr/@megaspore/5pzucd
드디어 2편이구나 싶어 집중해서 읽으려는데
라는 문장에 갑자기 마음이 턱 하고 막혔어요. 문맥도, 글의 내용과도 상관 없이 그냥 엄마의 청춘을 다시 마주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이 됐거든요. 그 땐 엄마 나이가 아주 많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현재의 제 나이쯤이 아니었나 싶어요..
아빠와의 이야기도 기다릴게요. :)
아 메가표 소설 재밌어요. 메가님 본인이 주인공이라 더 생생한 이야기인 거 같아요ㅎㅎ(자전적인 픽션 맞죠ㅋ)
읽으면서 계속, 꿈일까 아닐까 가슴 졸였답니다. 다음 편엔 진실이 드러날까요. 아버지와의 만남도 기대됩니다^^
사실 꿈을 모티브로 한거 빼곤 그냥 과거 얘기 서술 중..ㅋㅋㅋ (역시 사람(글) 볼줄 아시는 좀처럼 속일 수 없는 미친 필력 쏠메님...)
1편부터 보고 왔습니다~~
소설인듯 소설 아닌 거 같은데..완전 픽션인거죠?ㅎㅎ
꿈에서 가족을 만나는 일이 전 참 드문데..아무래도 가끔이라도 만나기 때문이겠죠? ㅎㅎ
담 편에 아버님..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꿈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실지..^^
그냥 픽션을 가장한 과거 얘기 주절이 주절이...
깜짝 놀랐어요. 액자의 4명은 오호...과거로~
꿈인걸 인식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요? 오..난 그런 상황이 되면 뭘 할까나 생각 좀 해봐야겟어요. 다음편도 바로 올려주세요~~
반갑습니다
꿈속에 꿈 저도 가끔 꿈을 꾸면서
내가 꿈속에서 하는걸 보고 있어요
정말 신기하죠 ㅎㅎㅎ
가을입니다
여기 저기 물감을 뿌린듯
황홀한 가을색채가 외롭다고 아우성입니다^^*
내가 꿈속에서 하는걸 보는 일이 익숙해지면 그 일이 자주 일어나더라구요~~ 꿈 속에서 현실에선 할 수 없는 일도 해보구요~~ 꿈이니까 실패의 걱정 없이,,^^
소설도 쓰시는거에요?
타임슬립을 경험하신 경험담은 아니시죠?
ㅎㅎ
결혼식장이야기는.. 저도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네 ㅎㅎ 세상에 없었던 이야기를 창조한다는 재미에 소설 쓰기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ㅎㅎ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느끼는 흔치 않은 일 중 하나네요~~^^
앗.. 너무 재미있는 부분에서 끊는거 아닙니까.. ㅠㅠ
예식장에서 아빠의 마지막 모습 슬프네요^^;;
넘넘 리얼해요. 꿈도 감정도 너무. ㅎㅎㅎ
저도 가끔씩 학생때로 돌아가고픈 생각을 하곤 해요 ^^ 글 읽어보니 왠지모르게 두근두근 하더라구요 :) 다음화가 기대되네요 :)
헉 아빠..!!
과연 오랜만에 만나신 메스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지? 마음 속에 담겨있던 감정을 유추볼 수 있겠네요!!
재밌당 ㅎㅎㅎㅎㅎ
네 제가 생각해도 꽤 재밌는거 같습니다 ㅎㅎㅎ (겸손은 저리 가라~ 휘이 휘이~)
맞아요 ㅎㅎ 묘사가 정말 잘 되었어요 ㅎㅎㅎㅎ 그리고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몰입하는 순간 영화 보는 느낌이에요 ㅎㅎㅎ
제가 생각해도 묘사가 참 잘 된거 같습니다 ㅎㅎㅎㅎ
겸손은 개나 줘버렸! 이란 계모의 마음가짐에서 오늘도 하나 배웁니다
계모..라고 하니 왠지 못돼보이는..(돼 이렇게 쓰는거 맞나요.. 왜케 어색하죠..)
다음 편 기대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