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자신이 특별하며, 뭔가 위대한(혹은 의미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느낀다
인간이라면 한 명도 예외 없이 공통으로 가지는 느낌이 있다. 바로 자신은 특별하며, 삶에서 뭔가 위대한 일을 할 것이라는 감이다.
이 느낌은 지극한 사실이면서 동시에 지극한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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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인 측면은 다음과 같다.
실로 모든 인간은 각자 특별하다. 보통은 실제 특별한 일을 하거나 그런 능력, 재능, 성취 등이 있어야 특별한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착각이다. 어떤 경우든 특별함의 '기준'은 정해지기 나름이다. 여기서는 특별함의 기준이 되는 것이 저기서는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반대도 많다.
다시 말해, 특별함의 기준은 가변적이며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그 기준에 의해 판별되는 특별함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간이면 누구나 다 동의하는 공통 기준 같은 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공통 기준마저도 여전히 가변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만약 어떤 기준에 의해서든 특별해질 수 있다면,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맞는 각각의 기준에 의해 특별해질 수 있으며, 실제 특별하다.(만약 특별해질 수 없다 여긴다면, 이제까지 특별하다 여겨왔던 모든 것도 특별해지지 않게 됨을 유의하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이 특별하다 여기는 것은 타당한 사실이다. 이 당연한 확신을 바탕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가 되면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듯이 타인도 똑같이 존중해 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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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하게 된다 느끼는 '위대한 일' 또한 마찬가지다. 위대함의 절대적 기준 같은 건 당연히 없으며, 여러 시대, 여러 장소에서 그 기준은 바뀐다. 물론 인간이면 누구나 다 동의하는 공통 기준 같은 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공통 기준마저도 여전히 가변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만약 어떤 기준에 의해서든 위대해질 수 있다면, 모든 인간이 하는 어떤 일이든 각각의 기준에 의해 위해질 수 있으며, 실제 위대하다.(만약 위대해질 수 없다 여긴다면, 이제까지 위대하다 여겨왔던 모든 것도 위대해지지 않게 됨을 유의하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의 일이 위대하다 여기는 것은 타당한 사실이다. 이 당연한 확신을 바탕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일을 잘 하면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듯이 타인의 일도 똑같이 존중해 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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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인 측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러한 특별함과 위대함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착각 부분이다. 그래서 실제로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실제 뭔가 위대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착각 부분이다.
둘째, 그러한 특별함과 위대함을 타인과의 비교로 결정하려 하는 착각 부분이다.
이와 같은 '나의 특별함'과 '내 일의 위대함'은 모두 착각이자 환상이다.
앞서 분명히 모든 인간은 특별하며, 각자가 하는 모든 일은 위대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경우 특별함과 위대함은 '절대적으로, 본래부터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본래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본래 존재하지 않는 앎, 개념, 분별, 이름'을 만들어 내는 기능을 가졌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근본 무명, 근본 무지'라고도 하며, 기독교에서는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행했던 '이름 짓기'로 상징하기도 한다.
사실 이것은 무명과 무지도 아니며 원죄(선악을 알게 됨)도 아니다. 본래는 존재하지 않지만 편의와 유용을 위해 '이름(분별, 앎, 개념)을 짓는' 것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기능일 뿐이다. 잘 사용하면 아주 유용한 기능인 것이다. 인류는 이제까지 이 기능을 잘 사용해서 여기까지 왔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러한 '이름 짓기'의 남용, 오용이다. 혹은 스스로 이름 지어 놓고 스스로 그 이름에 갇히는 착오이다. 본래 없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설정하여 유용하게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본래 없는 것을 '실제 있는 것'인양 스스로 착각하고 믿어서 불필요한 고통에 빠진다. 그래서 무명, 무지가 되고 원죄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무명과 무지도 아니고 원죄도 아니다. 그냥 '잘못된 사용 혹은 착각'일뿐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러한 '이름 짓기'의 본래 정체(목적, 본질)를 돌이켜지지 않게 눈치채고, 더 이상 스스로 만든 '앎'을 사실과 진리인 양 착각하지 않게 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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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경우에 따라선 실제 사람들이 인정하는 '특별한 사람'이 되거나, 사람들이 인정하는 '위해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인정'은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그냥 그 시대, 그 지역에서의 '일단의 무리들의 기준'일뿐이다. 그런데 왜 그런 가변적 기준에 나의 특별함과 내 일의 위대함의 여부를 의존하는가? 그럴 필요 없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흐름에 따라, 내가 타고 가는 흐름에 따라 나만의 특별함, 나만의 위대함을 만들어 가면 된다. 그 특별함, 위대함이 가변적인 것임을 알면서 말이다. 내가 그러한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지 그 '이름'이 나를 결정짓는 게 아님을 알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너무 타인과 세상이(그리고 그에 의존하는 내가) 정한 기준에서의 특별함과 위대함을 이루거나 성취해야 한다고 할 것 없다. 꼭 구체적인 어떤 일, 드러나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고 조급해할 이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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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또한 큰 환상 중에 하나이다. 비교가 아니어도 애초에 특별함이나 위대함 등이 다만 가변적인, 그러나 유용하게 사용할 무엇에 불과한데 거기에 비교라는 행위까지 더 해지면 그 환상성은 더욱 커진다. 물론 그만큼 마음은 더 번거로워지고 괴로워진다.
이것은 '비교하지 말라'가 아니다. 그전에, '애초에 비교할 무엇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비교는 저절로 힘을 잃게 된다.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억지로 하려 해도 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비교와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도 하다.
비교에 의해 자신의 특별함, 위대함의 여부를 결정하고자 하는 행위, 비교에서 떨어진다 여겨지면 위축되고, 비교해서 뛰어나다 여겨지면 우쭐대는 그 행위는 '순수한 착각'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하다. 또한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가치의 높고 낮음에 의존하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애초에 '나의 가치' 등에 사용되는 그 '가치' 자체가 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설사 존재한다 해도 왜 나의 가치를 타인 가치의 높고 낮음에 의존하는가? 그럴 필요 없다. 나의 가치는, 그냥 나의 가치 그대로 충분할 뿐이다. 물론 타인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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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특별하다.
나도 특별하다.
당신이 하는 일은 위대하다.
내가 하는 일도 위대하다.
이렇게 잘 사용하면 된다.
그 설정과 도구에 불과한
특별함, 위대함을
서로 인정해 주면서,
그것을 사실화, 절대화하는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
특별함과 위대함의
(종이 아닌) 주인이 되어.
잘 읽었습니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것은 좋은데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같습니다.
네. 자신이 특별하면 남도 동일하게 특별함을 알면 되겠습니다. 함께 특별할 수 있으니까요.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