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러시아] 여행 첫날 현지 여자들한테 호구 털린 이야기
리스크가 높은 일에 베팅해 말도 안될만큼 엄청난 결과를 얻는 것과, 자신을 과대 평가한 덕분에 무모한 일에 도전했다가 장렬히 산화하는 것. 이 두가지의 메커니즘은 실은 꽤 흡사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 반면 칼 12세는 스웨덴 제국을 끝장 낸 골빈 무골 정도로 인식되는 것은 전자는 전쟁에서 이겼고 후자는 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략적인 실수를 실제로 더 많이 저지른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그가 벌였던 7년 전쟁은 양면 전쟁도 아니고 당대 최강대국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을 상대로 한 무려 4면 전쟁이었다.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보아도 전략적으로 이렇게 무모한 결정을 한 사례는 드물다. 반면 러시아를 상대로 한 칼 12세의 대북방전쟁은 전자에 비하면 충분히 해볼만한 승부였다.
하지만 무모한 결정 끝에 패전을 거듭해 독약을 들고 다니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는, 러시아의 총명한 차르 엘리자베타 여제가 급서하고 자신을 사생팬 수준으로 동경하던 표트르 3세가 그 자리를 이어 받는 행운이 나타났고 그래서 본인도 기적이라고 회고하던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반면 칼 12세는 재수 없게도 시찰 중 그 잘 생긴 얼굴에 유탄을 맞아 그냥 비명횡사하고, 그래서 마지막 반전을 노릴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현지 여자들에게 셋업당해 지갑을 털린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쓰려는 마당에 참 도입부가 길기도 하군. 자기합리화를 위해 역사적 사례까지 인용한 게 더 꼴사나워 보인다는 것은 딱히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는 전통적으로 남녀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늘 리스크를 기꺼이 감수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누군가 듣는다면 주작썰 취급을 할 일들이 실제로 내 삶에 일어나는 것도 여러 차례 보았다. 최근에는 비교적 신중해진 면도 있는 것과 별도로, 현실성 없는 일이라며 의심하고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마 그 무용담들의 수는 지금의 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건 그거고, 남녀의 문제를 떠난 이 사건, 생전 처음 와보는 나라에서 굳이 여행 첫날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냐고 힐난한다면 할 말은 없다.
전편에 말한대로 나는 공항에서 내리자 마자 소개팅 부스터부터 켰다. 당초 러시아 여자들에게 좋아요를 얼마나 받을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근데 매칭된 여자 중 한 명이 저렇게 합석하지 않겠냐고 말을 걸었다(보다시피 문법에 맞는 영어가 아니다). 일단은 의심을 하는 게 맞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나라 여자들을 만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래서 굳이 여행 첫날 무리수를 던질 정도로 흔치 않은 기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시각 새벽 3시,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11시까지 잠을 자지 않은 내가 나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로, 알렉사 루네바에게 보낸 문자에 답이 오지 않았다.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온 이유는 한 가지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만나는 것은 개중에도 꽤 중요한 이유였다. 그녀는 이 여행기 초입에 언급한 3명의 여자 중 유일하게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친구에 불과한 라리사나, 친구는 분명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떤 진지한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도 낮은 마리아와 달리, 어떤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판단되는 여자였다.
그녀는 가끔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보통은 두 번 연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껏 연락이 이어진 것은 대화가 잘 통할 때는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밤새 문자나 녹음한 목소리를 주고 받았고, 어떤 주는 서로 모닝콜을 해주고 그러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정말 연인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또 연락이 뚝 끊어져버리곤 했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원칙을 깨고 문자나 읽고 씹은 그녀에게 다시 연락하는 수 밖에 없었다(다만 자존심은 좀 상해서 한 달 정도는 텀을 두었다).
그렇게 이어진 관계가 어느덧 6개월이었다. 그녀의 실존을 한번쯤 확인하고 싶었다. 출국 하루 전 이틀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것임을 분명히 말했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시간을 내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작 먼 타지에서 도착한 '친구'의 문자에 그녀는 답이 없었다. 본 적도 없는 여자에게 멘탈이 흔들렸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아마 그녀에게 답이 왔다면 나는 첫날에 무리수를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호텔 근방 길거리에서 본 클럽과 후카바(물담배를 필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의 소규모 라운지바와 비슷)를 보며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그곳이 결코 가면 안 될 만큼 위험한 거리라는 정보가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호텔 직원이 안전을 보장했고 밖이 대낮처럼 밝았다면 어차피 그날이 아니었다고 해도 분명 하루는 그 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확률론적으로야 오늘가든 나중에 가든 리스크가 같다면 호기심이 가장 클 때 가는 게 더 맞는 선택인 것 같았다.
이게 셋업이 아닐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도 한 이유다. 예전 일본에서는 여자들을 상대로 매춘을 할 수 있다고 평범한 남자들을 꼬드겨 입회비 등을 받는 사기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면 그런 사기에 당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술 먹자고 먼저 연락하는 건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지금 틴더의 얘보다 더 예쁜 백인 여자에게 술 먹자는 말을 들은 적도 없지 않았고, 기쁜 마음에 이불을 박차고 나간 그 자리는 장르는 설명할 수 없다만 내 지갑을 털려는 그런 범죄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첫날 꺼낼 줄은 예상치 못했던 정장을 꺼내입고 머리를 손질하고 나가는 그 순간에도 셋업일 수 있다는 생각은 했다. 다만 아닐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그 리스크를 감수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분위기나 메뉴판이 이상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되니까. 이 시점까지의 사고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크게 후회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난, 영화 <호스텔>에 나오는 미국인들처럼, 난 미국인이니까 처음 본 동구권 여성들이 나에게 매달리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들이 나를 부른 후카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의 대로변에 있었다.
먼저 나는 그녀들에 앞서 그 후카바를 먼저 들어가보였다. 어두운 곳에 파란 조명이 빛나는 것이 다소 퇴폐적인 느낌을 주긴 했지만 한국 이태원에 있는 조그만 라운지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테이블을 잡는데 돈이 들거나 별도로 바틀을 시켜야하는지 물어봤지만 둘 다 아니라고 했다. 메뉴판을 보니 현지 물가를 감안하면 조금 비쌌지만 대단한 수준도 아니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도는 그 목 둘레가 평범한 여자들 허벅지 수준은 될 만큼 두꺼웠다. 근데 건전한 바라고 해도 덩치 큰 남자가 기도를 서는 게 꼭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특히 취객들 난이도가 한국보다 높을 이곳이라면 더더욱. 여기까지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 했다. 이때까지의 사고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딱히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바 이곳저곳을 탐방하고 있던 나에게 어떤 남자가 말을 걸었다. 자신을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소개한 그는 잠깐 술 한 잔을 하자며 내게 사겠다고 제의했다. 술에 뭐가 들어있을지, 얼마 짜리를 사주고 내게 그 반대 급부를 요구할지 몰라 정중히 거절했다만 그와 별도로 대화는 몇 분간 이어졌다. '켈트의 호랑이(아일랜드는 원래 빈국으로 유럽의 병자라고 불리었지만 21세기 들어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해 이렇게 불리곤 했다)'라며 아일랜드를 띄워주고 어설프게 알고 있는 아일랜드의 역사적 인물 몇 명을 읊자 상당히 좋아하더라. 하지만 일단 여자들과 바 앞에서 만나기로 했고, 더군다나 나에 대한 이 남자의 관심이 어떤 형태의 것인지(가능성은 낮지만 성적 관심이었다면 문제고, 그게 아닌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친한 척을 한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알 수가 없어 적당히 끊고 일어났다.
다시 바 앞으로 나가니 어떤 미국인(사실 국적은 알 수 없다만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미국인으로 추측되었다)이 구토를 하고 있었고 여자 세 명이 그 사람 앞에서 빨리 계산을 하라고 독촉하고 있었다.
여기서 어떤 힌트도 얻지 못한 것은 분명한 내 불찰이다. 분명 그림이 이상하지 않은가? 왜 한 명의 남성에게 여성 세 명이 붙어서 계산을 하라고 하고 있었을까?
남자 혼자가 왔는데 취객이 되어 계산을 못 한다면 수금의 주체는 여자 세 명이 아니라 기도가 되어야 한다.
만약 남자 혼자와 여자 두 명이 와서 남자가 꽐라가 되었다면, 여자 두 명은 억울하겠지만 적어도 카운터의 여자 종업원은 술 취해서 몸도 못 가누는 이 남자가 아니라 같이 온 두 명의 여자에게 계산서를 들이밀어야 한다. 적어도 실랑이라도 있어야지. 근데 이 여자 세 명은 한 무리처럼 보였다.
예전 무리를 이끌고 여행을 하던 어떤 현자는, 도착한 마을 입구의 나무에 탐스러운 열매가 맺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입에 대지 않았고 일행에게도 먹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유인 즉슨 이렇게 열매가 먹음직스럽게 생겼음에도 마을 사람들이 손도 대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열매에는 독약이 들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머리가 잘 돌아 가는 사람이었다면 입구에서 의아한 점을 발견해냈을 것이다.
두근거림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수면부족으로 판단력이 정상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만 나는 결국 그 이상한 부분을 캐치해내지 못 하고 말다.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그때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이 계집은 떠들며 완패하며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그 계집이 소년을 붙잡고 입을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서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여러 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성경 잠언 7장
오호라!
마침내 그녀들과 조우했다.
여기서 또 하나 치명적인 판단 오류를 범했다. 바로 그녀들의 외모를 보고 상당히 안심했다는 것이다. 못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또 미인과도 거리가 먼 정말 평범하게 생긴 대학생들이었다.
이 사진은 유명한 일본 뚱녀 꽃뱀 사건의 범인이다. 3명의 남자와 결혼하고 그들을 죽였다. 결혼 사기를 당하고 살해 직전에 살아난 남자는, 이렇게 못 생긴 여자가 자기를 상대로 그런 사기를 칠 것으로 상상도 못 했다고 진술했다. 내가 지근 거리에서 본, 외로운 노처녀에게 결혼을 하자고 접근하여 돈을 빌려간 남자 역시도 사십대 중반의 머리가 벗겨진, 보잘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런 점에서 이 여자 둘이 외모가 평범했다는 이유로 방심했던 내 멍청함에는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어리석게도 나는 상당히 우쭐했었다. 한 명도 아니고 여행 도착 첫 날 현지 여자를 둘 씩이나 대동하고 바에 들어갔으니까. 아까 술을 사주겠다던 그 아일랜드 남자가 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더라. 그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과장된 제스처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다만 내가 그 시점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 뿐이다.
다시 메뉴판을 보았고 이 여자들이 무엇을 주문하고 무엇이 나오는지 신중하게 보았다. 역시 문제는 없었다. 다만 자리에 앉을 때 세번째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 그녀들은 내 반대쪽 자리가 아니라 바로 내 양 옆에 앉은 것이다. 이건 여자들 나오는 그런 술집에서 접대할 때나 하는 행동 아닌가? 내가 무슨 그루피들이 쫓아다니는 인기 가수나 재벌 2세도 아니고, 설령 호감이 있다고 해도 반대쪽이 아니라 여자 두 명이 처음 보는 남성의 양 옆에 앉는다니.
근데 이미 그때는 호르몬이 뇌를 먹어 버린 뒤였다.
호기롭게 한 잔을 들이켰다. 평범했던 그녀들이 점차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한 잔을 더 마셨고 함께 물담배을 피웠다.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 연기가 몽환적이다. '우리'는 풍선을 들이키며 놀았다. 헬륨 연기를 마시자 목소리가 웃기게 변하더라. 그 상태로 로비의 가라오케에 가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마치 이곳을 전세 내고 노는 기분이었다. 아까 그 입구를 지키던 기도가 웃으며 같이 노래를 부르는데 끼더라. 오히려 덩치가 커서였을까, 살짝 비굴하게 보였고 그래서 더 기가 살았다. 남태평양에서 원주민 여자들을 양 옆에 끼고 원주민 남성들에게는 일을 시키는 식민지 총독 같은 기분이 살짝 들었으니까.
술에 취했던 나는 나를 불렀던 여자에게 온갖 허세를 늘어놓았다. 내일 쇼핑을 시켜줄테니 백화점에 가자느니, 비행기 티켓을 보낼테니 8월에 한국에 놀러오라느니 등등, 그 말을 하는 내가 얼마나 가찮아 보였을지 생각하니 좀 얼굴이 화끈거린다.
만취한 채로 화장실을 갔다. 거기서 다시 그 아일랜드 남자와 마주쳤다. 화장실 안에는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내게 몇 마디 말을 건내더니 갑자기 내 귀에 얼굴을 갖다댔다.
"난 네 친구야. 그리고 내 말을 믿어. 쓸데 없는 데 네 돈을 낭비하지 마. 저 여자애들은 여기 매일 오는 애들이야."
흠, 술이 확 깨는군. 어쩐지 너무 일이 잘 풀리더라. 내 양 옆에 앉은 애들은 나 같은 외국인 호구를 낚는 어부들이었구나. 하긴 그러고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기는 했다. 내 양 옆의 여자들은 이 아일랜드 남자와 구면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상당히 꺼려하는 느낌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왔다. 라운지에서는 내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박자도 틀렸을 뿐 아니라 흥도 깨졌다. 나는 피곤해서 가야겠다며 빌지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받아든 빌지에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상식적으로 당연히 공짜라고 생각했던, 노래방 기계에서 부른 노래가 부른 횟수만큼 비용이 청구되어 있었다(이걸 이야기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 재밌는 건 가라오케에서 한 곡을 부르는 것이 칵테일 한 잔 값보다 더 비쌌다는 사실. 두 자리 수로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한 곡을 3명이서 불렀을 경우 이걸 3명 분으로 청구한 덕분에 함께 10곡이라도 불렀다면 칵테일 30잔 값을 내야했을 것이다. 흡입하며 놀았던 풍선 비용도 깨알같이 청구한 것은 덤.
술 값 자체는 예상에서 아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뭔가 좀 더한 느낌이었다. 메뉴판은 잘 영어로 써놨으면서 빌지는 러시아어로 적혀있어 어차피 확인도 어려웠다.
총 얼마나 나왔냐면, 한국에서 테이블 잡고 바틀을 까는 것에 비하면 덜 나왔다. 많이 나왔다는 말이다. 게다가 기분도 썩 좋지 않았다. 만약 한국에서 어쩌다보니 한국을 관광 중인 외국 여자 두 명을 만나서, 그녀들과 이 정도 분량의 시간을 재밌게 보냈다면 실은 그 금액을 지불하는데 좀 더 기꺼웠을지도 모른다. 근데 가라오케나 풍선 비용에 대한 일체의 언질도 없이 마치 공짜인 것처럼 내게 그것을 권유했다는 것 등, 사람을 작정하고 속이려고 했다는 점에서 당연히 기분이 좋았을리 없다.
실은 지금부터는 이제 밑장을 드러내도 상관 없을 다시 안 볼 사람들 앞에서, 만약 막 화를 내거나 또는 빌어서 디스카운트를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근데 계산을 하러 온 여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 안 내겠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벌써 어딘가 화를 내고 나를 응징할 준비를 끝낸 기분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외지도 아니고 한국에서, 자신이 마시지도 않은 술 값이 청구된 것을 따지다가 그 술집과 짠 경찰들에게 잡혀 현행범으로 체포된 사례도 있다(다행히 친척이 검찰 고위직이라 역관광이 나오긴 했다).
현지 경찰과 짜고 나를 가두고 보석금을 나누어 가진다거나, 아니면 술값 미지불을 핑계로 사실 상 나를 납치한다거나 등등, 여기서 이걸 지불하지 않을 때 내가 부담해야 하는 리스크는 상당히 커보였다.
만약 영화 <옹박>처럼 플라잉으로 술병을 아까 저 기도의 양 미간에 내려꽂는다면 승산이 있을까? 얌전해 보이는 호구가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할테니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근데 여하간 이들이 내 생명이나 장기를 노리는 것도 아닌데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실패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큰 일이 난다.
나는 그냥 결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얼굴을 찌푸린 채로 계산하면 없어보일 것 같아서 씩 웃으며 결제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가난하지만 착한 형이 운전하는 흰색 프라이드 베타를 타고 바닷가를 간 적이 있는데, 옆 차선에 스포츠 차를 타고 예쁜 여자를 태운 남자가 창문을 열고 길을 물어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정말 길을 물을 의도로 말을 건 것이 아니었다. 그 형은 자기 차 창문이 수동인 것이 신경쓰였는지 느릿느릿 일정한 템포를 유지하며 창문을 올렸는데, 표정 관리를 하며 카드를 긁는 내 심경이 딱 저러했다.
내 옆 자리에 앉은 여대생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치 마녀처럼 분장한 어마어마한 미인인 그 바 직원은 이 카드가 내 카드냐고 몇 번이나 물었고, 신분증과 카드 명의인을 대조해보자고 말했다. 자기들이 생각했을 때는 내가 쉽게 결제하지 못할 큰 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어떤 식으로든 내가 항의를 할 것으로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잔뜩 술을 마신 상태였던지라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내가 결제를 못 하길 바란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나는 느긋한 척을 하며 소파에 몸을 기대고 내게 돈을 뜯어 먹은 이 알바녀들과 사진을 찍었다.
원래는 얼굴을 다 공개할 생각이었지만 난 신사니까 데헷. 다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똑같은 실수를 할 사람들을 위해 가게의 위치는 아래 포스팅해드림.
돈을 많이 써서 속이 쓰리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한 잔을 더 살까....... 이런 상병신 같은 생각을 3초 정도 했다만 그냥 상병신 말고 병신 정도로 끝내면 될 거 같아서 그녀들과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까 그 아일랜드 남자가 내게 작별인사를 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만 아마 나는 그에게 혀가 꼬부라진 영어로 다음처럼 말했을 것이다.
“야 씨발 너 존나 좋은 놈이야.”
그 아일랜드 남자는 내 말에 씩 웃더니 내 등을 두들겼다. 그러더니 자신이 살테니 한 잔을 더 하고 가라고 말했다. 만약 이 남자가 준 술에 약이 들어 있었다거나 그럼 그것도 치밀한 반전이겠다만 나를 납치할 의향이었다면 아까부터 수많은 기회가 있었을텐데 굳이 지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사준 진토닉을 넙죽 받아 마셨다.
그는 이 바의 배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코멘트를 피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왜 자신이 러시아에 있는지는 말해주었다. 원래 자신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길거리 공연을 하다가 만난 러시아 여자 친구를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 여자 친구는 빚이 많아 이곳에 일하고 있고 그래서 자기도 함께 살며 일을 도와주고 있노라고. 내가 어딘가 좋은 사람처럼 보여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사람도 반쯤은 내 돈을 뜯어먹은 이 바의 소속인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정말 흥미로웠다.
내가 시간과 돈이 많은 그런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 바를 몇 번 더 갔을 것이다.
미스테리한 바. 내 편이 되어준 정체불명의 아일랜드 남자와, 어마어마한 미모의 신비롭지만 어딘가 섬뜩한 카운터 직원. 매일 등장하는 새로운 희생자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목이 두꺼운 기도 등등, 호기심을 자극할 데가 많았다. 하지만 난 부자도 아닐뿐더러 유적지 관광도 해야 하고 모스크바도 가야 한다.
방에 들어오니 소개팅 앱에서 나를 불렀던 그 여자에게 연락이 왔다. 답은 했다. 몇 일간 계속 연락이 오더라.
어쩌면 내가 그 바에서 똑같은 호구 짓을 해줄지 모른다는 기대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하게, 이런 호구라면 쇼핑을 시켜주거나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보내는 일도 진짜 해줄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어서였을까.
처음 접근하는 목적은 돈인데, 나중에 역으로 그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모든 것을 준다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는 의외로 흔하다. 한국대표문학 김동인의 <감자>에는, 자신의 몸을 사던 왕서방이 어느 날 정식으로 처를 들이자 낫을 들고 신방에 들어가는 복녀가 등장한다. 어릴수록, 그리고 아버지의 무능력한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란 여자일수록 두 감정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고작 스무살이었고, 명문대생인데 이런 알바나 하고 있었으니 두 요건에 모두 해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젊었을 때는, 그런 게임을 실제로 해본 적도 있다. 자신을 약았다고 믿는, 그런 목적이 뻔히 보이는 애들이 나중에 심리적으로 매달리고 자기 지갑을 여는 걸 보고 즐기던 시절도 있었다. 다만 그때는, 20대에 변호사가 되어 당시 내 나이에는 과분했던 월급 전부를 노는 데 지출했을 때이고, 한도가 1억원이 넘던 마이너스 통장도 겁 없이 쓰던 시절이다. 몇천만원짜리 호텔 회원권을 들고 있는 진짜 금수저들이 보기에는 그때도 가소로웠겠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여유가 있었다. 난 이제 서른 중반을 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장도 퇴사해 수입도 없다. 부자도 아닌 사람이 부자 연기를 해서 남는 것도 없지만 지금은 그런 연기를 할 여력도 없다. 게다가 나에게 사기까지 친 여자라면 더더욱.
원래 개잡주였던 주식을 파는 걸 손절이라고 말하기도 웃긴다만, 여하긴 밑장이 나와버린 이 관계는 그냥 끝내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짜증을 좀 풀 수 있을까, 3만원을 줄테니 호텔방으로 오라고 조롱할까(그 가격에 응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응했다고 해도 매춘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면 엄청난 금액을 제시하고 호텔방으로 오라고 한 뒤 다른 호텔의 엉뚱한 객실을 가르쳐줄까, 한참 고민하다가 몇일 뒤 둘 중 하나를 실행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화를 많이 내는 것을 보고 약간은 기분이 풀렸지만 어차피 그렇다고 내가 호구였다는 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 생각하면 내가 계산할 때 분위기나 이런 게, 약간은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자기라고 좋아서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테니 기왕 벌어진 일에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있었는가는 의문은 남는다.
재밌는 건, 신문방송학과를 다닌다던 그녀와 그 세시간 동안 전설적인 이탈리아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와 러시아의 신문 프라우다지의 지루함에 대해 논했다는 것이다. 비교적 격조있던 대화는 저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만 그 대화 자체를 나쁘게 기억하지는 않는다. 시작도 끝도 잘못된 인연이었지만 그 사이에는 무언가 볼 것은 있었다. 나는 원래 완전히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삶이란 흑색과 노란색이 섞인 강냉이처럼 아름다움과 추함이 곡곡이 박혀 있는 것일 뿐이니까.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는, 그 밤도 그냥 하나의 추억으로 기억한다.
호텔방으로 돌아오니 오전 6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카운터를 보던 여직원은 바뀌지 않았더라. 아까 정장을 입고 머리에 잔뜩 힘을 주고 나간 나를 보고 웃던 그녀는,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귀엽다.
하하 이것 참 아메바도 아니고 역시 나란 놈은 대책이 없군.
방에 들어오니 아침 6시 반이 넘었다. 한국 시간으로 나는 밤을 샌 뒤 오후 2시까지 전혀 잠을 자지 않은 셈이다.
- 호구에 속물 변호사가 법률 상담을 받습니다. 희망하시는 분은 [email protected]으로 이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청 자세한 일기!!!!!!저 술집은 영원히 가지 않아야 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부자시라면 가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당 아 최근 포시틍 중 쓰는데 제일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거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우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행기 쓰려고 일부러 여행 다녀온 것만 같은 스토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넘 재밌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좀 긴 글인데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고맙습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가장 파란만장한 밤이 아니었나 싶네요
감사합니다!!
여행기의 정석을 보았습니다!!ㅋㅋㅋㅋ
정석인지는 의문이지만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데헷
유쾌하게 잘쓰셨네요. 그냥 액땜했다고 생각하세요^^
더 좋은 일이 있을껍니다~!!
ㅎㅎ 긍정적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더 좋은 일을 기대합니다~!
더블 보팅 기능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과찬이십니다 ㅎㅎ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ㅎㅎ
풍류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뭔가 행복행복한 여행기만 보다 욕망의 기저를 자극하는 헤비메탈 같은 여행기 보니까 너무 좋습니다
남은 여행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ㅎㅎ 파란만장하면서도 심심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쩐지 무탈한 삶과 극적인 삶의 안 좋은 점만 취한 기분 ㅡㅡ
헤비메탈 같은 여행기라니 ㅋㅋ 훌륭한 문장이네요 영광입니다^^
본격적인 러시아 여행기로군요. 책으로 내셔도 되겠는데요? 너무 무척 정말 진짜로 재미있게 천천히 다 보았습니다. 남녀관계에서 프리드리히가 되느냐 칼12세가 되느냐! 칼12세와 비슷하게 되었지만 생존하여 작은 복수는 성공하셨군요ㅎㅎㅎ
긴 내용이었는데 너무 무척 정말 진짜로 재미있게 천천히 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ㅋ뭐 사실 제대로 털린건데 도망가면서 빽 소리지른 수준이라 큰 의미는 없죠... 기왕 벌어진 일 그냥 허허 웃고 넘겼으면 그나마 대인배스러웠을지도요 ㅎㅎㅎㅎ
Congratulations @admljy19! You have completed the following achievement on Steemit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Award for the number of comments received
Click on the badge to view your Board of Honor.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To support your work, I also upvoted your post!
Do not miss the last post from @steemitboard:
SteemitBoard and the Veterans on Steemit - The First Community Badge.
ㅋㅋㅋ 책 내세요 ㅎㅎㅎ 유니크한 여행기가 될듯요 ㅎㅎㅎ
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보팅도 부탁드려요 데헷
앗 보팅을 안했군요 깜박한 거예요 전 늘 보팅하고 글쓰는데 ㅁㅋㅋㅋㅋㅋ
데헷 보팅 감사드립니다 ^^;;;
많은 경험을 쌓고 계시군요. 잘 정리하셨다가 소설책으로 출간하셔도 될 듯합니다.
ㅎㅎ 이번 편이 반응이 좋네요 ^^; 꾸준히 써봐야죠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너무 잼있게 읽고 갑니닼ㅋㅋㅋ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당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