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엔터테이너와 살고 있다

in #kr-pen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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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요?"

이 남자, 뭐지? 조선시대에서 왔나?

"난 남자 여자도 친구가 될수 있다고 믿어요."

내가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조용히 반문했다.

"미안하지만, 난 아니거든요. 잘가요!"

그의 단호함에 덜컥 겁이 났다. 그렇게 쫓겨나듯 그의 집에서 나온 후 내가 뭘 잘못한건지 알수 없어 혼돈스러웠다.

한달 전쯤 친구의 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한국을 떠난지 일주일이 막 지났을 때였다. 친구의 집은 17층, 그의 집은 33층, 같은 아파트였다. 당시 친구집에 잠시 기거하던 나는 느즈막히 일어나 눈꼽도 제대로 떼지 않고 헝클어진 머리칼인 채로 고개를 까닥 낯선 손님을 향해 인사란걸 했다. 이후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뻔질나게 친구의 집을 드나들었다. 멋대로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건지, 첫눈에 반한건지, 한국여자가 귀했던건지 그의 구애는 좀 끈질긴 편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던 참이었다. 거리로 쫓기듯 나온 나는 낯선 나라에서 나를 반겨줄 곳도 갈곳도 없음을 새삼 느꼈다. 그날따라 깜빡이던 가로등 불빛이 너는 혼자라고 말을 거는듯 했다. 한국이 몹시도 그리웠고 서글펐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에게선 연락 한자락 없었다. 결국 조금은 텅빈 마음으로 내발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마치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맞아줬다. 이 남자, 뭐지? 선수인가?

"얼른 엘리베이터 앞으로 나와봐요!"

며칠이 지나서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했다. 난 사무실겸 집으로 사용하는 널찍한 그의 아파트에서 그를 위한 엑셀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를 엉망으로 못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요, 바로! 알았죠?"

무슨 일인지 물을 새도 없이 그는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는 달리 격양된 그의 말투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그의 목소리보다 더 다급하게 한번의 멈춤도 없이 33층으로 곧장 올라왔다.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를 맞아준건 커다란 꽃바구니였다. 크기도 엄청 큰데다가 꽃의 종류는 왜 이리 많던지 화사함의 극치를 보여준 꽃바구니였다.

"훗! 싱겁긴!"

묵직한 꽃바구니를 받아들고는 내심 기분이 좋아 돌아서려던 찰나 작은 메시지봉투를 발견할수 있었다.

'나와 결혼해 줄래요?'

그리고 그 뒤로 며칠동안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이 남자, 뭐지? 사람을 들었나 놨다, 자기 맘대로군!

예스라는 대답을 얻기 위해 그는 상당한 도박을 한듯 했다. 제발로 찾아오지 않거나 노라는 대답은 애초에 예상하지 않았었는지 모른다. 자신감인가. 무모한건가.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추질 않기를 1층에 서서 두손 모아 기도했다고 한다. 운명에 맡겼다나 뭐라나. 결국 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예스라고 대답을 했다. 뭔가 선수에게 낚인듯 한 기분을 뒤로 한채.

그는 자신의 꿈은 가수라 했다. 뛰어난 실력파는 아니어도 들어줄 만한 노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칭 롹커로 샤우팅도 그럴싸했다. 그는 또 개그맨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그의 발군의 개그 실력은 나이트클럽에서 돋보였다. 춤출때 그의 표정은 그 어떤 개그보다도 웃겼다. 웃느라 춤을 출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를 만나는 동안은 웃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까르르 까르르. 내가 한국을 왜 떠났는지에 대한 생각 따위는 말끔히 잊을수 있었다.

그의 엔터테이닝한 모습과 음주가무에 심취한 나는 결혼까지 골인하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만난지 2개월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그렇게 나는 계란 후라이는 커녕 라면 하나 제대로 끓일줄 모르는 그와 결혼을 했다.

아이들이 아빠와 왜 결혼했냐고 물을때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뭐에 홀린것 같았다고. 그럼 아이들이 그런다.

"아빠가 그러는데, 엄마가 맨날맨날 결혼해달라고 울면서 쫓아다녔다던데!"

선수답다.

오늘 아침 남편이 자신의 사주 이야기를 해주었다. 근래에 만난 사업 파트너가 사주를 봐주었는데, 평생 여자는 "한명"이라고 했단다. 그렇담 선수는 아닌건가. 아무튼 난 엔터테이너와 살고 있다.


이글은 @floridasnail 님의 이벤트에 참가하는 글입니다.

부활절 기념 포스팅 이벤트를 개최합니다.

부부의 사랑 고백, 감사편지를 읽고 싶습니다.
처음 만났던 이야기,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야기, 조그만 일에 감사하는 이야기,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배려에 새삼 고마워지는 이야기 등등, 배우자 자랑 이야기도 당연히 좋습니다.
권태기에 들어선 부부라면, 처음의 설레임과 사랑을 되새기며 새로운 사랑 고백을 하는 기회가, 이제는 정으로 산다는 중년 부부들은 인생을 함께 해주는 고마움을 담은 고백을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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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그러는데, 엄마가 맨날맨날 결혼해달라고 울면서 쫓아다녔다던데!"

적반하장

남편들의 심리 ㅋ

우와 신랑님 멋지신데요 저희 신랑은 유일하게 짜파게티 해줘요
그래도 인연이라 만난거라 생각합니다 ㅎ.,ㅎ
아마 두분도 인연이었을거에요

우리 남편은 이제 스파게티 정도는 할줄 알아요. 교육의 효과죠 ㅋㅋㅋ

에빵님은 러브스토리도 예사롭지 않네요!!
이벤트 참여라니...풀봇으로 응원합니다!
아자아자^-^

얏호! 풀봇이란다 으핫하하하!

부군이 엔터테이너+프로 도박러셨군요...

지금은 생활인입니다 ㅠㅠ 먹고 사는게 뭘까요 ㅋㅋㅋㅋㅋㅋ

멋진 스토리군요 +_+

감사합니다 ㅎㅎㅎ

넘 달달하네요ㅎㅎㅎ

ㅋㅋㅋㅋ 그런가요. 부끄러워요!

만나는 과정이 멋지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네요...

들었다 놓았다 하는게 참;;

잘 보고 가요

ㅎ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요!

에빵님 남편분 뭔가 여자마음 밀당의 귀재 느낌이에요 흐흣 결국 에빵님 마음을 얻으셨으니 성공한 밀당:)

ㅋㅋㅋ 그 뒤로 마음을 많이 잃었다는게 함정이죠 ㅋㅋㅋ 이젠 성대가 늙어서 샤우팅이...ㅠㅠ

어마 남편 분 매력이 넘치시는걸요~ 그런 남편분을 사로잡은? 에빵님은 얼마나 더 매력적인 분이실지! ^^*

그러게요 ㅋㅋㅋㅋ 근데 왜캐 오랜만이여요? 뭘 하셨을까 감시체제 돌입합니다 ㅎㅎㅎㅎ

너무 웃겨요ㅋㅋ재밌게 읽었어요

웃기면 성공한거임... 왜 항상 웃기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ㅋㅋㅋㅋㅋ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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