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은 우울증과 만성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다.
철인왕후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면서 이 기회에 철종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나이가 어리거나 정치 기반이 약한 왕을 세우게 되면 당연히 외척들이 국정을 농단하는 세도정치를 하면서 중전을 내고 후궁을 들이면서 한 번 손에 쥔 권력을 이어나갔다.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8살의 나이로 등극하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그리고 수렴을 거두자 외가인 풍양조씨 가문이 득세를 하게 되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당시 이원범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채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바로 철종이다. 철종은 헌종이 죽은 지 이틀 만인 6월 8일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다음 날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당시 철종의 나이 19세였지만 친정을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세도정치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철종의 재위기간은 처음부터 순탄할 수 없었다. 그의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가까운 형제들도 없었다. 그런판에 말로만 듣던 왕실의 윗전들이 세도정치의 존속을 위한 도구로 불안한 자리에 있어야 했다. 온갖 멸시와 모멸이 그를 따라다녔다.
철종은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항렬로만 따지면 헌종의 아저씨뻘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통상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순조의 아들로 삼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왕통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펼쳐졌다. 이른바 기유예론(己酉禮論)이다.
예론 문제는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헌종의 삼년상이 끝나갈 때 헌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대신 친(親)이 다한 신주를 내오는 문제에 부딪쳤고 이 싸움에서 승리한 안동 김씨 세력은 조정에 남아 있던 풍양 조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세도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진 철종의 실상은 진실과 일치했을지 의문이다. 19세기 후반을 풍미한 지식인 면암 최익현이 과거 시험장에서 목격한 내용에 따르면, 만 24세 때의 철종의 새로운 면보를 보여준다. 철종의 지식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점은, 머지않아 조선 사상계를 주도할 최익현을 그 시험의 장원급제자로 발탁했다는 사실이다. 철종이 이미 대단한 지식의 소유자이며 유생들을 평가할 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철종은 권신들과 맞서기도 했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지방 수령들의 이름을 자기 침실에 적어놓았다며 경고 했다. 당시 철종의 경고는 세도가문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했다.하지만, 철종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세도가문을 상대할 힘이 없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이 세도가문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됐다는 점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철종의 건강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과도한 고민과 우울증 등으로 인한 '만성 소화불량'과 함께 자녀 출산 및 부부관계를 위한 '지나친 강장제 복용'이 철종의 건강을 반영하는 최대 특징이었다. 철종의 건강은 조선 민중의 삶이 극단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마음으로는 백성들 편에 있어도 실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세도가문의 이해관계 때문에 왕자 출산 문제를 고심해야 했다.
철종은 철인왕후를 비롯한 후궁들과의 사이에 딸 여섯과 아들 다섯을 얻었다. 하지만 비교적 오래 생존한 자녀는 영혜옹주뿐이다. 옹주는 13세까지 살았다. 옹주가 죽기 직전에 결혼한 남자가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였다. 이들 부부에게도 소생은 없었으니 기우는 나라의 불우했던 철종의 실질적인 계보는 여기서 끊어지게 된다.
국정농단이 한 개인과 국가에 얼마나 큰 불행을 초래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선은 붕당과 외척으로 왕권 강화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지명 받은 왕이니 더 그랬겠지요.
심지어 숙종이 인현왕후와 장희빈 그 밖에 후궁들까지
왕권강화를 위한 카드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그 틈에 죽어나간 여자들은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