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시간]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

in #books2 years ago (edited)

지난 일 년 동안 집을 지었다. 봄에 들어선 후, 화초를 옮겨다 심고 텃밭을 만드느라 비가 오지 않는 날엔 온종일 밖에서 일을 했다. 공사 막판에 이르러 집 내부의 구석구석을 완성해야 할 목수가 나타나지 않아 내가 목수의 연장을 들고 일하게 되었다. 일꾼이 오지 않은 날, 홀로 안과 밖을 오가며 바삐 일하다 지쳐 파란 봄 하늘을 바라본 순간 오래전 읽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생각이 났다. “그는 작은 배를 타고 홀로 낚시를 하는 노인이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해 망망대해에서 고전분투하던 노인. 내가 그 노인이 된 듯했다. 어린 시절 세계문학전집에서 이 글을 읽고 너무 쓸쓸한 노인의 모습이 가슴 아파 골목길에 홀로 앉아 있는 노인만 봐도 마음이 아리곤 했었다.
친구를 찾는 심정으로, 홀로 일하며 오디오북으로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발표한 해가 1952년, 그가 꼭 내 나이에 이른 시점이었다. 그 스스로 일생의 최고작이라 했고, 그에게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가져다준 이 작품을 그는 8주 만에 초안을 완성했다 한다. 20대 초반에 작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해 20대에 이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의 작품을 내고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로 대히트를 친 후, 10년만에 <강 건너 숲 속으로 (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라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악평을 받았다. “그가 어떻게 이전의 작품들을 썼는지 의심스럽다", ”그는 이제 끝났다"와 같은 악평을 받고 격분해서 써 내려간 글이 <노인과 바다>였다.
몇 해 전 미국 작가 수업을 들으며, 그의 첫 발표작인 <인디언 캠프 (Indian Camp)>를 읽었다. 네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글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삶과 죽음, 백인이 인디언을 대하는 인종차별, 그의 어린 시절을 투영한 주인공 소년의 심리 묘사 등을 완벽하게 써낸 글을 읽고, 마치 미켈란제로의 다비드상을 보는 느낌이었다. 대학교 때 영문학 수업을 들으며 그의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문체를 좋아해 누군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으레 헤밍웨이라 답하곤 했다.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완벽한 미를 바라볼 때의 전율을 느낀 것은 중년에 들어 <인디언 캠프>를 읽고서였다.
대학시절, 영문학 수업을 들을 때 한 교수님이 말했었다. “언어는 일상에서 누구나 쓰기 때문에 사람들이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예술로서의 글은 미술이나 음악처럼 일정 기간의 교습을 통해 끊임없이 연습해야 어느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글에선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장인의 향이 난다. 그런 그도 “글쓰기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도전으로 내가 지금껏 했던 그 어떤 일보다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해도 글쓰기가 쉬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의 가치를 확신했고 무엇보다 글쓰기를 즐겼다. 즐겼기에 그는 끊임없는 도전을 마다하지 않고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갔을 게다.
헤밍웨이는 신랄한 악평을 받고 50대 중반에 접어든 자신을 작품 속 노인에 담은 듯하다. ‘나의 대어는 분명 어딘가에 있다’고 믿으며 날마다 홀로 바다에 나가 고래를 잡고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결코 패배할 수는 없다'며 상어와 고전분투 해 뼈만 남은 고래를 해안에 가져온 후 잠에 들어 어린 시절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사자의 꿈을 꾸는 노인 - 산티아고. 헤밍웨이는 한 편지에서 이 <노인과 바다>를 “쉽고 편하게 읽히는 짧은 글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면이 담겨 있고 동시에 인간의 정신세계도 담고 있습니다. 지금 내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글입니다.”라고 했다.
고전은 살면서 어려서 한번, 성인이 되어 한번, 노년이 되어 한번,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 한다고 했던가.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었을 땐 고집불통이라 홀로 쓸쓸히 사는 노인이 무모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중년에 이르러 보니, 내가 어느덧 그 노인이 되어 있다. 홀로 견디어야 하는 시간은 누구의 삶에나 찾아온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이 홀로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선 그 노인처럼 나이 들어서도 아직도 잡지 못한 대어를 꿈꾸며 일상을 맞이한다. 나는 산티아고의 “내가 너무 멀리 나온 것인가"와 같은 푸념 어린 독백, “희망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 그건 죄다”와 같은 꺾이지 않는 기백을 들으며 나의 집을 완성하였다. 나도 이제 산티아고처럼 편안한 잠에 빠져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눈부신 햇살, 나무 그늘아래 평온히 낮잠을 즐기던 어린 사자의 꿈을 꾸고 싶다.

[내가 완성한 책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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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이지 않는 기백'을 실천해 홀로 완성한 책장이 멋집니다! 작가님의 글에서 희망이 넘실대는 산티아고의 푸른 눈빛을 봅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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