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오늘에 대한 기록]

in #story6 years ago

람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이다.
그득히 사람이 들어찬 지하철 속에서 몸을 비비며 람은 수첩을 꺼낸다.
만년필은 수첩 위에서 휘적휘적 움직인다.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은 뭐 하나 변한게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인생에서 하루는 그저 지워졌을 뿐이다.”

두 눈을 끔뻑거리며 람은 물끄러미 자신이 쓴 글씨를 바라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을 감는다.

‘한성대입구역’ 에서 내린다.
계단을 오르니 편의점이 반긴다. 주점과 함께 있는 편의점을 보며 늘 람은 고개를 갸웃 거린다.
삼각김밥 두 개를 보지도 않고 잡아든다. 그리곤 음료 코너를 유심히 살핀다.
슬몃 웃고는 커피 음료 세 개를 집어든다. 삑! 소리와 함께 “투 플러스 원 상품입니다” 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낭랑하다.

람은 가방을 뒤적거린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주머니 속 카드지갑을 꺼내 계산하지만, 여전히 람은 가방을 뒤진다.
삼각김밥을 전자렌지에 넣고 돌리는데 가방 속의 물품을 하나 둘씩 꺼낸다.
“없다”
람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눈알을 굴린다. 그러곤 고개를 젓는다.

세 입째. 우물거리는 입 속으로 삼각김밥 하나가 사라진다. ‘진주비빔밥’ 스티커가 붙은 비닐엔 붉은 양념이 번들거린다.
입은 쉬지 않고 우물거린다. 그러면서 남은 김밥은 다시 렌지에 넣고 돌린다.
커피에서 빨대를 떼서 꽂는다. 볼이 움푹 들어가도록 빤다.
미처 김밥이 데워지기도 전 빈 커피를 휴지통에 던져 넣는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마저 익은 삼각김밥을 꺼낸다. 비닐을 버리고 편의점을 나선다.

유리문에 붉은 해가 부딪힌다. 저 너머 보이는 산등성이 아파트 단지의 허리에 해가 걸려있다.
걸음을 옮긴다. 뒤축이 닳은 운동화에서 고무가 펄럭인다.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웅장한 트럼본 소리와 함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이 흐른다.

람의 손가락은 통통 튄다. 손가락이 바빠지고 걸음은 빨라진다.
1악장이 끝남과 함께 람은 40년 된 언덕 위 아파트 속으로 사라진다.
그 앞길로 포르셰 카이엔이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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