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린's 100] 소통하자며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소통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건 소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족한 소통이 오해를 불러오고, 오해만 풀 수 있으면, 오해가 생겨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평화가 유지될 거라는 환상은, 실은 사람들이 내 입장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우회적인 불평인 것이죠. 여기에 헛된 믿음이 개입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내 입장을 설명하면 모두 나를 이해하거나 배려해 줄 거라는 믿음. 몰라서 그러는 거라는.
그건 어쩌면 한 번도 김치를 담가보지 않은 사람이 배추랑 고춧가루만 맛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며 열심히 좋은 재료만 찾으러 다니는 것과 같은 일인지 모릅니다. 김치는 재료뿐만 아니라 배합의 비율과 버무림도 중요합니다. 소통은 관계의 좋은 재료일까요? 버무림일까요? 성숙한 관계를 위해서는 소통만으로 부족하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섣부른 소통은 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게 되는 것이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기도. 소통이면 되는 관계라면 개개인이 매우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경험과 넓은 아량,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러나 그런 여러 가지를 충족시켜도 오랜 관계가 아니라면,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으니까요.
경험이 적을수록 함부로 소통하려고 듭니다. 그래요. 마음 열고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얘기, 자기 감정을 꺼내놓아 봅시다. 꺼내진 그것들은 누가 처리할까요? 누가 감당할까요? 어떻게 분류하고 정리하고 치유할까요? 대부분의 경우, 차라리 묻어두면 좋았을 것을, 시간이 치유하도록, 시간이 간극을 메우도록 놓아두면 좋았을 것을, 괜히 열었구나 싶을 때가 더 많습니다. 왜냐구요? 우리는 다들 덜 익었으니까요.
그래서 소통의 자리가 오히려 인민재판의 자리가 되거나, 자아비판을 강요하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각자의 입장과 감정을 모두 내어놓고 나면 누가 누구에게 맞출까요? 불일치가 드러난 자리에서 방향성은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합니까? 조금씩 양보하면 되지 않겠냐구요? 누가 얼만큼 얼마나 양보하죠? 네가 했다고 나도 해야 합니까? 내가 말했으니 너도 말해야 합니까? 네, 대부분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귀결되거나, 연민과 동정에 기댄 비합리적인 소수성에 대한 일방적 배려로 마무리되곤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모두 깨닫게 됩니다. 아, 그게 아니었는데.. 그럴 게 아니었는데..
차라리 묻어둘 것을, 시간의 신에게 불일치를 화평케 할 자비를 구할 것을. 그래서 공동체의 현명한 어른들은 오히려 침묵하고 심지어 방치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드러내어 해결하려는 노력이 다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소통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경우, 먼저 소통하자고 드는 이들은 문제의 해결보다 상황의 격화를 불편해하는 관계 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문제의 해결보다 불편한 분위기의 완화와 중단을 갈구합니다. 회피할 수 있으면, 결국 함께 도모해온 일이 실패하고 심지어 커뮤니티가 깨져나가도 할 수 없습니다. (바란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건 익숙한 내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니까요. 며칠 울고 자책하면 되는 일입니다.
성숙한 소통은 적절한 타이밍과 기회가 생겨나기까지 무거운 감정과 분위기를 감당합니다. 침묵하고 서로에게 시간과 공간을 최대한 허락함으로써 들어 맞지 않는 아귀들이 서로 합을 맞춰가도록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것이죠. 물론 이런 때에도 일방이 희생해선 안 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음 약한 이들이 스트레스를 전담하는 방식으로도 안 됩니다. 매일 싸워도 회피하지 않고 계속 대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깎여나가는 중이니까요.
신중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왜 그러는데?'
소통만 하면, 서로의 생각과 입장이 어떻게 다른지 알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접근은 때로 무모합니다. 만일 불일치의 근원이, 바꿀 수 없는 개개인의 성향과 취향, 세계관이라면, 우리는 건널 수 없는 수많은 다리들을 목격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아, 이 사람들과 내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지.'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미숙의 증거입니다. 어떤 관계가 처음부터 착착 맞아 들어가겠습니까? 세상에 어떤 관계가 갈등이 없고 문제가 없겠습니까? 갈등은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일 뿐입니다. 드디어 우리의 상호작용이 거품을 걷어내고 본격적인 무대에 올랐다는 표지입니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은 대화가 전부가 아닙니다.
갈등과 감정이 쌓이면 그것을 푸는 것은 수용과 인정입니다. 대화가 아니라. 너가 왜 그러는지 안다고 인정과 수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대화를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져들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자기 입장을 고수한 채 대화에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정과 수용이 전제되지 않은 소통은 자기방어와 반격의 말꼬리 잡기만을 제공해줄 뿐입니다. 그런 관계는 차라리 침묵하며 중단하는 것이 낫습니다.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며.
너무 오랜 시간 입을 틀어막혀 그런지, 이 시대는 모두 봇물 터지듯 내 말, 내 입장을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모두 '소통'을 명분 삼아 자기 말을 하고 있지만 수용과 인정의 자세는 보이지 않고 극단으로만 치달으려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알게 됩니다. 혼자 떠들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괜한 말들이 얼마나 족쇄가 되어 돌아오는지, 발목을 잡힌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냥 닥치고 있을걸.
진정한 소통은 관찰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저 이가 왜 저러는지 충분히 관찰하고, 모르겠거든 묻고, 그리고 설사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겁니다. 닥치고 내 말 들으란 소리를 하고 싶은 거면서 대화가 부족하다고 핑계 대지 말구요. 관찰부터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정하고 수용하기 위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겁니다. 내 입장을 주장하려고 대화를 시도하는 게 아니라, 너의 입장과 너의 생각을 듣고 받아들이기 위해 대화를 청하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할 게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수용하거나 침묵하거나. 양보와 조정은 각자 하는 겁니다. 그건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양보와 조정을 합의 보려고 하는 강박이 각자의 입장을 도리어 강화시킵니다. 말로 꺼내놓으면 감정은 격해지기 마련이니까요. 들으면 들을수록 너의 생각은 더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입장을 좁혀갈 수 있을까요? 우리 사이의 이 간극은 무엇으로 메울까요?
시간의 신에게 주도권을 주어 보세요. 본디 입장이란 것이 서로의 선 곳을 달리하면 또 달라 보이는 것이니, 시간의 신은 각자의 입장을 뒤바꾸어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는 마법을 베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마법은 언제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를, 소통을, 포기하지 않고 등 돌리지 않은 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것이 열정이고 믿음입니다. 시간의 신이 서로의 입장을 변화시켜 이해와 수용의 자기장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고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습니다. 누구도,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어 있을 테니까요.
누가 범인입니까? 소통하자며 자기 입장을 강요하려는 자는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은 절이 싫다며 떠나는 중이고 기다림을 배제와 소외라 우기는 이들입니다. 추방하는 이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다립시다. 사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