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행전 3부] 먼산

in #stimcity4 month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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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결국 먼산에 도착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먼산지기는 그것들이 모두 선택의 결과이므로 이곳에 내려놓을 수는 없다고 안타까운 듯 말했다.



"대신 하산은 여유로우실 거예요."



먼산지기는 하산의 경로는 다양하고 군데군데 쉼터도 많으니 완만하고 느긋할 수 있을 거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그렇다. 올랐으니 이제는 내려가야 한다. 먼산의 정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건 마법사도 이미 알고 있었다. 먼산에 오른 것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지친 마법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예전에는 절반쯤은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네. 예전에는요. 그런데 짐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내려놓으시려는 거예요?"
"네? 무엇이 들었죠?"
"그건 마법사님이 아시겠죠.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아..."



마법사는 짊어진 짐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른다. 메고 지고 올랐을 뿐이다. 마법사는 이제까지 무겁다고만 생각했지, 한 번도 짐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짐을 풀어 본 적이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매번 무언가 더해지기만 했을 뿐."
"네, 다들 그러시죠. 그럼 이번엔 하산하시면서 하나씩 풀어보셔요. 그래서 예전에는 내려놓을 수 있던 것이 지금은 금지되었답니다. 사람들이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르면서 단지 당장 무겁다는 이유로 내려놓고 가버리는 바람에, 여기 창고가 더 이상 보관할 수 없을 만큼 가득 차 버렸거든요."



먼산지기는 보관 비용이 자꾸 증가하고 있다고 불평을 했다. 꽤나 소중한 것들로 보이는 데 언제 찾으러 올지 모르니 함부로 처분할 수도 없어 난감하다며.



"어떤 사람들은 생활 쓰레기 버리듯 몰래 남겨놓고 떠나버리기도 해요. 저희는 수거물 목록을 작성해야 해서 열어보게 되는데, 상상치 못한 것들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것들이죠?"
"개인정보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음..일종의 메모리와 같은 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기억들. 장면들. 그리고... 여보세요."



먼산지기는 무언가를 덧붙이려다 멈추고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아마도 자신의 무단투기물을 확인하려는 전화인 것 같았다.



"네네. 직접 오셔야 해요. 택배는 안 되구요. 누가 여기까지 짐을 가지러 오겠어요. 자기 것도 아닌데 끔찍하게 시리. 올라와 보셔서 아시잖아요. 네네. 등기도 당연히 불가하고요."



누군가 자신의 짐에 무엇이 들었는지 뒤늦게 확인한 듯했다. 그리고 그것이 찾고 싶어졌나 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되찾으려 이 먼산에 다시 오르는 건 어려운 일이다. 힘든 일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나을만큼.



마법사는 먼산지기가 덧붙이려다 만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서성였다. 그러나 전화를 건 이는 애원을 하고 있는지 통화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루해진 마법사는 오피스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오피스 뒤편으로 연결된 창고의 문틈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법사는 주변을 한 번 휙 둘러보고는 슬쩍 창고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둠이 밀려왔다. 눈이 어둠에 익어야 했다.



눈이 익기 전에 먼저 냄새가 밀려왔다. 익숙한 듯 낯선 냄새. 마치 어린 시절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현관에서 풍겨나오던 그 집만의 냄새 같은. 친구에게서 나던 익숙한 향과 처음 만나는 그것의 진원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낯선 감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냄새가 동시다발적으로 밀려왔다. 공항 대합실에서처럼.



눈이 차근차근 어둠에 익자 창고의 풍경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끝없이 늘어선 선반 가득 각종 짐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 어떤 것은 박스에, 어떤 것은 짐짝에, 어떤 것들은 배낭 가득 담겨 있었는데, 그중 어떤 것들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내용물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선반을 따라 나가다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포대자루 하나를 발견하고는 살짝 들춰 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낮은 비명을 뱉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포대자루에서 삐져나온 그것은,



얼굴,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누구나 당신 때문에 울고 있어요." 얼굴이 눈도 뜨지 않은 채 지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당신은 나를 버린 게 아니에요. 나를 놓아둔 것도 아니에요. 당신은 나를 짊어졌어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이제 기억도 할 수 없게 되었죠."
"아.. 저기.. 나는 당신의 누군가가 아니에요." 마법사가 당황하며 얼굴에게 말했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에요. 짊어진 것도 당신이고 먼산을 오른 것도 당신이죠. 그리고 누구나 울고 있어요. 짐이 무겁기 때문이죠. 먼산이 너무 험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얼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얼굴의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선반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짐들 속에서 투명한 액체가 일제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짐들이 울기 시작한 것이다. 쏟아져 내리는 액체가, 눈물이, 홍수가 난 듯 빠르게 창고 바닥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기요. 마법사님? 마법사님 어디 계세요?"



마법사는 자신을 찾는 먼산지기의 목소리가 들리자, 눈물이 차오르고 있는 창고를 황급히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며 호흡이 급격히 가빠왔다. 그러나 달리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얼굴이 쫓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얼굴은 마법사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은 아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의 얼굴이었지만 그것을 놓고 간 누군가와 그 얼굴의 관계가 떠오르자 달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 얼굴을 놓고 간 것이다. 그 누군가는 자신의 짐에 얼굴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놓고 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누군가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물론 먼산지기의 말을 유추해 보면 짐 속에 든 것은 얼굴만이 아닐 것이다. 메모리 같은 것이라고 했으니, 기억들, 장면들, 얼굴들.. 사람들이 놓고 간 것들은 그런 것들이다. 떠올리고 싶은 것들. 아니 짐이니까 잊고 싶어 놓고 간 것일까? 아니지. 짊어지고 온 것이라면 잊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 거야. 그런 것은 짊어지지도 않았을 테니. 짊어질 만한 것이었으니까, 버릴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짊어지고 먼산을 오른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데, 왜 놓고 갔을까? 무엇이 들었는지 몰라서 그랬다고는 해도, 이 먼산까지 애써 짊어지고 오른 것을 왜 두고 간 걸까? 나는 왜 내려두고 싶었던 걸까?'



마법사는 달리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서둘러 하산을 할 수도 없었다. 짐을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짐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짊어지고 먼산을 올랐을 뿐이다. 먼산지기는 마법사에게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제 금지되었다. 하산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대신 짐을 열어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리고 얼굴이 말했다. 누구나 당신 때문에 울고 있다고. 마법사는 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만, 하산을 할 수 있고, 하산을 하며 짐을 열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_ [마법행전 3부 3장] 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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