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눈

in #krsuccess6 days ago (edited)

가장 해가 짧다는 동지가 지난 지 열흘도 되지 않은 한겨울의 이른 아침이었다. 막 떠오른 해는 아직 땅에 바짝 붙어있다. 나는 길을 따라 동쪽과 남쪽의 정가운데 사이로, 똑바로 해를 향해 걷는다. 차가운 겨울 햇빛이 사정없이 눈을 찌른다. 모자의 챙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선글라스를 꼈지만 나무와 건물 그림자가 드리우지 못하는 곳을 지날 때는 눈이 부셔서 손으로 한 번 더 눈을 가린다. 내 뒤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삐쩍 마른 키다리 아저씨가 되었다.

함박눈은 아니지만 나름 알이 굵은 눈이 촘촘하게 내린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아침이라기엔 사방이 너무 환해서 순간 시간과 계절 감각을 잃는다. 이런 여우 눈은 처음 보았다. 여기저기 구멍 난 어두운 눈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온 연한 오렌지빛 햇살이 땅 곳곳에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쏘아대는 것 같다. 이런 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하얀 눈송이가 빛 그 자체로 보인다.

수천수만의 차고 맑은 빛덩이가. 빛을 내뿜는 빛알갱이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 눈부시게 (실제로 눈이 부시고) 아름다웠다.

예전에 거대한 고가도로 밑을 비추는 멋진 빛살을 본 적이 있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빛처럼 웅장하고 뭔가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다리 밑의 차들이 지나가면서 일으킨 온갖 먼지와 매연이 빛을 반사한 덕분이었겠지만. 그래도 멋있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빛알 역시 눈송이가 빛을 반사한 것에 불과하지만 새하얀 눈송이가 반사한 빛은 탁한 매연과 먼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밝다. 게다가 빛살의 정지된 직선과 달리 이 빛은 나풀거리기까지 한다.

실제로 우리는 빛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빛이 흡수되거나 반사되는 매질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빛을 인지한다. 하지만 지금 내 주변 가득 나풀거리는 빛알은 뚜렷하게 보인다. 만질 수도 있다. 빛을 만져보고 싶어 빛알을 향해 손을 뻗는다. 차가운 빛알은 내 손에 닿는 순간 빛을 잃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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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올해 봤던 여우 눈이 멋져서 기록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를 다시 떠올려보니 그 광경이 순정만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분위기’가 흐를 때, 순정만화 특유의, 사방이 반짝거리는 ‘그’ 배경 기법. 첨부 그림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전 명작 <유리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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