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책 표지 안쪽 작가소개가 가장 심플했던 것은 밀란 쿤데라였다.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정착했다."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디디의 우산> 황정은 작가는 이보다 더 심플했다. 황.정.은. 끝.. 마치, 주절주절 나열하지 않겠다, 작품 하나로만 승부를 보겠다, 이 소설을 읽으면 내 이름 석 자가 뇌리에 박힐 것이다, 라는 작가의 자신감이 책을 펼치자마자 엿보인다. 얼마전 내 작업실을 방문한 어떤 사람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러 일을 하는 우리는 도대체 자기소개를 어떻게 해야할까- 라는 주제였다. 뭐 했고, 뭐 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이렇게 말고.. 그냥 이름으로만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안녕하세요 오재형입니다. 혹은 오쟁입니다. 끝. 나도 언제쯤 이렇게 소개할 수 있을까.
P 24
세운상가 활성화 종합계획이 발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본문에 다섯차례나 언급된 재생,이라는 말이 여소녀는 마음에 걸렸다. 무엇을 재생한다고? 왜? 미래와 빤하게 연결된 미래, 이상에 이르지 못하는 실재, 비대하고 멋대가리 없는 외형, 시대의 돌봄을 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 알아서 먹고살며 시대를 이루었고 이제 시대의 뒤꽁무니에 남은 사람들.... 여기를 제대로 재생하려면 거짓말하지 말고 그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최소한 이 공간에서 인생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 정도는 펼쳐져야 하는 거 아니냐......
소설에는 세운상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도시재생, 이라는 말로 세운상가에서 얼마나 많은 행사가 열렸는지 나는 안다. 그것을 주도했던 서울문화재단에서 5년간 일하며 취재했기 때문이다. 관공서는 그런 것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예전에 흥했지만 지금은 낡은 장소를 찾아 예술인들에게 지원금 대주며 힙한 행사 열고 자랑하는 것. 물론 예술인들은 그 장소의 역사를 담아보려고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될 리 만무하다. 그런 행사를 목격할 때마다 로컬 피플과 힙한 예술인들 사이에 백만광년 정도의 거리가 느껴진다. 이게 도대체 뭐여.. 라는 표정들. 행사 주체와 나같은 사람들은 서둘러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리고 허겁지겁 사라지기 일쑤다.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궁금해진다. 그들은 도대체 뭘 어떻게 재생한다는 말일까? 세운상가는 힙한 예술의 무대로 재생시키고, 을지로는 때려부수는 방식으로 재생시킨다는 말일까.
P 126
전쟁 때 떠난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 칠십년 동안 문이 닫힌 채로 방치되어 있다가 발견되는 방들. 그런 방에 남은 사람들은 그 자체가 유령인 것처럼 보여. 뚜껑 열린 향수병과 분첩이 놓인 화장대, 마지막으로 차를 마신 흔적이 그대로 남은 탁자, 그런 것들은 어떤 순간의 직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그 순간까지 그 방에 머물던 사람이 어딘가에서 영영 증발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 증발의 순간이 아주 갑자기, 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박조배는 말했다.
<디디의 우산>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죽음이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 '그냥 슥' 찾아온 죽음, 이미 죽었지만 목격되지 않은 죽음... 작가도 인터뷰에서 밝혔듯 이런 이미지는 세월호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는 언제나 갑자기 이유도 모른채 죽을 수 있는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생중계로 알게 된 사건이지 않나.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의 죽음도 굉장히 갑자기, 건조하게, 증발하듯이 죽어버린다. 내가 없어진다면. 라는 상상을 안 할수가 없다. 키보드를 잠시 멈추고 방을 둘러보았다. 이 물건들.. 아무래도 나의 일부다. 이건 모두 나다. 내가 증발하면 이 남겨진'나'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별 수 없이 미지근하게라도 변해야 되는 것인가.
P 134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 라는 것이 따로 있을까? 그것이 따로 있다면, 이렇게 끝날 조짐도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 이어지고 있다. 조짐도 무엇도 없이 이것은 이렇게 이어진다. 박조배는 금방이라도 세계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d는 의아했다. 망한다고? 왜 망해. 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그냥 다만 적나라한채 이어질 뿐.
망함조차 없는 세계란 무엇일까. 누군가의 유가족이 되는 기분은 그런 것일까. 기나긴 고통의 무의미가 삶 전체를 삼켜버리고 난 후에 찾아오는 단계. 나는 가늠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다.
P 256
우리에게는 각자의 침대와 각자의 방이 있다. 대화나 포옹이 필요할 때 혹은 그저 서로를 봐야 할 때 우리는 서로의 방으로 건너가고, 잠들기 전까지 같은 침대에 누워 대화하다가 그대로 잠들거나 잠들기 직전에 각자의 침대로 돌아간다. 같이 잘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우리는 서로의 사물과 습관과 기척에 익숙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내가 지향하는 연애의 이상향을 완벽하게 묘사한 문장들을 보고 반가웠다. 같이 잘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대채로 자기만의 공간이 절대적으로 확보되는 관계. 대화나 포옹이 필요할 때 그 공간을 넘나드는 관계. 나는 동거가 싫고 혼자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지만, 훗날 사랑하는 이와 동거를 하게 된다면 제 1조건은 위와 같다. 같이 잘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각자의 침대와 각자의 방이 있을 것.
P 256
그와 같은 일상이 문득 중단되는 순간을 우리는 상상한다. 때때로 나는 출근길 전철 안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던 횡단보도 앞에서, 서수경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집에서, 이를 닦다가 세면대 앞에서, 서수경의 퇴근을 기다리며 간단한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부엌에서, 이를테면 내가 피곤하고 평화로울 때, 고요할 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 추락을 경험한다.
엄마를 보는 나의 시선이다. 엄마가 한번 쓰러지고 난 후에는 엄마가 언제라도 증발할 수 있는 존재라고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날일 텐데. 이런 상상, 너무 슬프다.
P 262
너희가 무슨 관계인가. 나는 궁금하다. 그렇게 묻는 우리의 이웃은 그것이 정말 궁금할까? 그 '궁금함'의 앞과 뒤에는 어떤 생각이 있을까. 그것은 생각일까? 예컨대 너희가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받을 때 서수경과 나는 우리의 대답으로(우리가 대답을 하건 하지 않건) 우리가 또는 우리 각자가 대면할 수 있는 위협을 생각하고, 질문자와의 관계 변화를 생각하고,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대답 이후까지를 찰나에 상상하는데 우리에게 질문한 이웃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까?
정희진 말대로 나는 '젊은(30대 중반도 젊다고 치면..)', '남성'으로, 사회의 주어진 모든 자원을 지니고 있다. 난 질문자의 폭력에 시달려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오지랖 쩌는 질문마저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적은 없다. 소수자는 질문의 폭력에 얼마나 시달릴까. 나같은 사람으로부터.
P 266
나는 속상하다고 진짜 속상해서 그 사람들을 일일이 방문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은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그렇지 적나라. 그 광경은 마치 투명한 창을 통해 보이는 남의 집 베란다처럼...... 우리는 왜 때때로 베란다를 청소하듯 그것을 점검해보지 않는 것일까. 모조리 끄집어내서 거기 뭐가 쌓였는지도 확인을 좀 해보고 먼지도 털어보고 곰팡이 끼거나 망가진 것은 닦거나 내다버리고 하면서 정리도 다시 해보고 새로운 질서로 쌓아보거나...... 하지를 않는 걸까 좀처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내 타임라인으로는, 세월호가 기점이었다.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이 한번 전복되고, 그것은 젠더감수성이라는 말로 내가 당연하게 배제하고 있어서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세계를 바라보라며 옆구리를 툭툭 찔러댔으며, 이후로는 장애인과 성소수자로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그 모든 시작이. 이렇게 쓰고 찍는 작가들 덕분이겠지. 상상력을 다른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P 273
서수경과 나는 그런 질문을 가진 뒤에야 비맹인이 사용하는 글자를 일컫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맹인이 사용하는 글자를 점자라고 칭하는 것처럼 비맹인이 사용하는 글자를 일컫는 말이 있으며 그 말이 묵자라는 것을 그때에서야. 묵자란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언어/도구이며, 벽이며 간판이며 각종 게시판의 공지사항이며 약병에 붙은 라벨에 적힌 안내문과 주의사항과 경고와 지금 이 문장과 롤랑 바르뜨와 생떽쥐뻬리와 한나 아렌트와 라울 힐베르크의 책에 잉크로 인쇄된 것들이 모두 그것에 해당하고 그것은 '볼 수 있다'는 것이 세계의 기본적인 전제라는 것도 우리는 그때에 알았다. 서수경과 나는 사십여년을 사는 내내 그 말을 몰랐던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를 둘러싼 기록문자들, 우리가 보는 언어들이 전부 묵자인데 그것을 묵자라고 칭한다는 것을 우리는 왜 몰랐을까.
우리는 너무도 당연해서 너무도 '정상적'이라 이름 없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저항을 해야한다. 남배우, 시스젠더, 헤테로, 모노아모리, 비맹인, 비장애인, 묵자... 이렇게. 그리하여 '정상인'의 개념을 낱낱히 분해해야 한다. 이름 없다는 것도 불평등의 산물이며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권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 오늘 이 글에서 나 너무 피씨한 말 대잔치한거 같아서 갑자기 속이 메스껍다. 주절주절 말은 누가 못하나. 이래서 말과 글을 믿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황정은은 믿고 싶다. 나는 갑자기 나쁜 음식들이 땡긴다.
266번째 페이지가 꽂히네요. 당연해서 이름을 붙이는 모든 사물과 행동, 보이지 않는 인식까지 저항의 메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와닿는 책인듯 합니다. 읽어봐야겠어요. ^^
저도 저를 믿지 않아요. 자꾸 쳐다보는 그 시선 끝에 차별이 존재하던 경험을 여러번 했기에.. 저도 너무나 부족하기에 100% 믿으면 안되는게, 늘 저항해야 하게끔 만들어주는 사회에 살고 있잖아요. ㅎ 이런 좋은 책을 읽고 생각을 하는 럼프님 같은 분들이 계시기에 더 나아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황정은 작가는 한국에서 유명하다던데 저는 처음 읽어보았어요. 전작들도 궁금해지고.. 기회되면 읽어보시길 바래요.
레일라님처럼 타국, 특히 유럽에 살면 소수자 포지션이 +1 추가되겠네요.
이름만으로 날 설명하려면 엄청 유명하거나 독특한 사람이어야 할 거 같아요. 전 어쩔 수 없이 소개글을 길게 써야겠네요. ^^;
그러게요. 저는 유명하진 않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해볼까요 ㅎㅎ 오쟁입니다! 라고 말하면, 분명 상대방에서 물어보겠죠. "그럼 뭐 하시는.." 그럼 이렇게 대답해야겠어요. "주로 오쟁을 하고 있는 오쟁입니다." 라구요..ㅎ
독립서점에서 나오자마자 소진되었다고 하는 곳이 많아서 궁금해했던 책이었어요. 무언가를 구분짓는 꼬리표는 소수에게만 붙는 것 같아요. 약자이거나... 그런 꼬리표를 들어보거나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는 것 자체가 다수의 강자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요.
독립서점 판본이 따로 있었다고 저도 들었는데 그만큼의 책 애정은 없어서(읽으면 그만이라는 성격이라ㅎ) 걍 서점에서 사봤네요.
소설에 나오는 말대로 생각의 베란다를 점검하고 청소하는 일을 주기적으로 해야할것같습니다.
다행히 전자책으로도 있군요. 카트에 집어넣어 보았습니다.
굿 초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