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단적 관찰
최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개념 중 하나가 비판단적 관찰이다. NVC, Mindfulness, Facilitation 등 내가 애정을 갖고 있는 주제들을 탐구할 때면 공통적으로 주관적인 판단을 인식에서 분리시키는 훈련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각각에서 부르는 용어가 꼭 같지는 않지만 이것을 비판단적 관찰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비판단적 관찰은 판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판단이란 ‘judgment’에 가까운 의미다. 우리는 어떤 자극을 인식할 때 자동적으로 옳고 그름이라던가 좋거나 싫음과 같은 판단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주문한 음식이 기다려도 나오지 않을 때, 누군가 내 부탁을 거절할 때, 지하철에서 누군가 내 등을 떠밀 때와 같은 상황을 떠올려 보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즉각적으로 판단이 일어나고 몸과 마음에 불편한 반응이 뒤따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은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즉각적으로 진행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자극을 인식했다고 여기는 순간들에 실제로는 그 감각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 순간,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
우리가 현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판단이다.
-타라 브랙, 「자기 돌봄」, 이재석 역, 생각정원, 2018, 5면.
이렇게 인식 과정에 판단이 개입할 때 우리는 자극을 일으킨 대상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판단은 개인의 신념이나 경험, 지식에 기반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감정 상태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 개인의 주관적인 감각의 해석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은 우리의 판단이 대상 자체와 무관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솥뚜껑이 주는 현재의 자극이 개인의 과거 경험에 의해 자라로 인식되는 것이다.
속담은 솥뚜껑을 보고 놀란 데서 그치지만 현실에서는 솥뚜껑을 끝까지 자라라고 믿고 살아가는 일이 일어난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편견과 같은 것들은 조금 더 크고 고착된 형태로 판단이 순수한 인식을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대상에 관한 바른 인식에서 소외시키듯이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자극을 인식하는 데에서도 판단이 개입해서 경험을 왜곡하고 부정하거나 부풀리는 등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출근길에 대한 가장 흔한 묘사 중 하나는 '매일 똑같다' 일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 이 판단의 꼬리표가 붙어 있는 이상 출근길이 색다른 영감을 우리에게 주긴 어렵다. 하지만 이 판단을 내려놓고 의식적으로 창밖의 풍경, 지하철 안의 사람들, 내 몸의 상태와 들려오는 소리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면 매일매일의 출근길이 얼마나 새롭고 다채로우며 의미들로 가득 차 있는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출근길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매일 똑같다'는 판단을 수용했기 때문에 똑같다고 느껴온 것뿐이다.
존 카밧진은 마음챙김을 ‘특별한 방식으로, 즉 의식적이고 비판단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러니까 마음챙김을 한다는 것은 판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차드 멩 탄,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권오열 역, 알키, 2012, 46면.
그래서 마음 챙김 명상에서는 호흡을 매개로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연습을 한다. 호흡은 우리 몸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활동이지만 그것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일은 드물다. 이것에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일상의 모든 순간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안에 현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한다. 그리고 그렇게 훈련된 순수한 주의로 삶의 모든 영역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기에 깨닫지 못했던 다양한 행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히 비판단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내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부정적인 판단을 붙였던 자극에 대해서는 새로운 이해와 발견이 일어난다. 꽉 막히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사람에게서 그의 단호함 때문에 내가 누릴 수 있었던 도움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또 긍정적인 자극에 대해서는 이전에 느꼈던 만족 수준을 넘어 더 크고 세밀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햇볕이 내리쬐는 날을 단순히 좋아했다면 제각각 흔들리는 나뭇잎 위에 햇볕이 드리우는 모습이 온 우주에서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 지금 이 순간만의 장면임을 깨닫고 감격하게 되는 것이다. 무미건조한 매일의 삶을 마치 오늘 처음 눈을 뜬 것 같은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찬 하루로 바꿀 수도 있다. 그 어떤 외부적인 변화도 없이 이런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비판단적 관찰이다.
로마 제국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오래전에, “사물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지각하는가, 단지 이것이 무서울 뿐이다”라고 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최인수 역, 한울림, 2004, 54면.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 것
여름 철새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남쪽으로 이동한다. 어느 해도 예외가 없다. 그들은 갑자기 여행을 포기하고 올해만 텃새가 되어 월동하기를 선택하거나 이전에 가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곳으로 가서 겨울을 난다거나 하지 않는다. 언제나 본능을 따라 반응하며 그것을 거스르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멀고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적극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다. 자유는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라기보단 원하는 대로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들의 판단은 본능이 지배하고 있고 본능에 따른 반응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동물은 본능의 지배를 당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눈앞에 바나나가 있으면 무조건 먹으려 한다. '먹지 않는다.'라는 선택의 여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갖추면서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바나나가 눈앞에 있어도 '먹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바나나를 정물화의 모티프로 삼기도 한다. 선택의 여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자본론」, 이정환 역, 민음사, 2015, 27면.
우리가 삶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영위하기 위해서도 비판단적 관찰이 필요하다. 본능의 지배 아래서 선택의 자유가 없는 동물들처럼 우리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삶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가 기대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그저 '이 사람이 내가 기대하지 않은 행동을 했구나'하고 인식하지 않고 '이건 분명히 나를 무시하는 거야'라고 판단을 덧붙인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반응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자와 같이 상황 그 자체만 인지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건설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자유가 생긴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삶의 질을 좌우할 수 있다. 파도가 거센 바다를 보고 위험하다란 판단을 붙인 후엔 우리가 그것과 해봄직한 일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멋진 서핑을 할 수 있는 기회로 볼 것이다.
프랭클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가장 치욕적인 상황에서 자아의식이라는 인간의 천부능력을 사용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인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김경섭 역, 김영사, 2017, 131면.
우리는 때로 누가 봐도 고통을 느낄만하고 낙심할 만한 일을 겪었음에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주변을 놀라게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또 거센 저항을 무릅쓰고 세상의 변혁을 이끌어 낸 위대한 지도자들의 이야기도 알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목표 지향적이거나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일 뿐일까. 아마도 그들은 눈앞에 놓인 상황에 대해 반사적으로 발동하는 비관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자유롭게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 자신과 인류의 삶을 바꿔놓은 것이리라 추측할 수 있다. 비판단적 관찰은 이렇듯 우리를 둘러싼 어떤 환경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내면의 인식 구조만을 바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삶을 위해
결국 비판단적 관찰이 제안하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이다. 현재를 경험하는 데 깨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응을 선택하는 일에도 깨어 있도록 한다. 우리는 사고를 경제적으로 수행하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들어오는 자극을 선별하고 가급적 앞서 취했던 방식 대로 반응하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확보한 사고의 여유를 가지고 목표를 향하는 여정을 가속하거나 그저 신경 쓰는 일 없이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한 삶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에 깨어있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성취의 순간에 온전히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 그 순간에도 또 다른 계획과 또 다른 불만으로 삶을 소외시키고 있지 않을까.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 살아가면서 얻는 기쁨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일상 생활에서 겪는 경험을 어떻게 취사 선택하고 해석하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행복한가 아닌가는 외적 세계의 영향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보다 마음의 조화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물론 육체의 생존은 외적 환경에 대한 통제에 의존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의 행복을 증진시키거나 생각의 무질서함을 감소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최인수 역, 한울림, 2004, 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