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몰 광부의 귀환

in #kr6 years ago

1967년 9월 6일 “와 살았다!”

1967년 8월 22일 고추로 이름난 고장 청양의 구봉 광산에서 매몰 사고가 일어난다. 막장을 떠받치던 갱목이 너무 오래되어 썩은 것이 화근이었다. 무지막지한 흙더미가 광산 노동자들을 덮쳐 그 숨을 막아 버렸다. 사고 발생이 지나고 며칠 뒤 출입처였던 청양경찰서에 들른 한 신문 기자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듣게 된다.
.
“서장님, 광부 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뭣이? 살아 있어? 경찰들은 “모른 척 해 달라”고 했다. 인권의식도 박약했거니와 지하 깊숙이 매몰된 사람들을 구하려다가는 구하는 사람마저 목숨이 칠갑산 벼랑에 매달리기 십상인지라 생존자가 있다 해도 눈 질끈 감던 즈음이었다.

왕년의 종군기자 대전일보 기자 안종일은 경찰차를 얻어 타고 현장을 달려갔다. 사실이었다. 양창선이라는 이름의 광부가 지하 125미터에서 살아 있다는 연락을 해 왔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연락을 할 수 있었는가. 6.25 때 해병 통신병으로 근무했던 조난 광부 양창선이 고장 난 전화선을 살린 것이다. 나는 살아 있다...... 이때 안종일 기자는 몸에 돋은 모든 털이 빳빳이 서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시골 탄광에는 전화도 없었다. 그는 원고지에 상황을 끄적여 택시를 불렀다. “ 대전일보로 가서 이걸 전해 주시오.”

.
양창선.jpg
광부 양창선
.

캄캄한 막장에서 생존 신호를 보내던 양창선이 가진 것은 도시락과 흙천정에서 똑똑 떨어지는 지하수 뿐이었다. 지하 125미터 깊이의 온도는 섭씨 15도. 추위와 싸우면서, 또 지나치게 물을 많이 먹으면 몸 안의 염도가 떨어질 것을 계산하여 맥주 한 컵 정도로 버티는 당찬 면모를 보이면서 광부 양창선은 삶의 의욕을 불태웠다. 해병대에 입대해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1주일은 예사로 굶어 봤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종일 기자의 특종은 대한민국을 들쑤셨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대통령의 특별 지시가 내려갔고 청와대 비서실이 충청도 산골로 출동했다. 전국의 신문사 특파원들이 청양으로 집결했고 시시각각의 구조 작업을 전국에 타전했다. 해병대 사령관도 달려와서 해병 정신을 부르짖으며 양창선 예비역 해병에게 살아서 나올 것을 호소했고 심지어 미군도 구조 작업을 거들었다.

양창선구출'.jpg

국제적이고 거국적이며 필사적인 구조 작업 끝에 1967년 9월 6일 구조대는 양창선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한다. 양창선이 살아 돌아온다는 소식에 손을 모으고 기다리던 가족들은 양창선을 본 순간 실신하고 만다. 뼈와 가죽만 남았던 그의 모습을 보고 죽은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양창선은 건강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와 살았다!"

그런데 "와 살았다"를 다른 의미로 외친 이들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었다. 그 해 6월 8일 실시된 총선은 3.15이래 최악의 부정선거였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대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대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이번엔 고등학생들까지 들고 일어섰다.
.
박정희로서는 3.15 부정선거의 악몽이 눈앞을 산책하는 상황. 그 지독한 박정희 대통령이 문제가 심각한 선거구 국회의원들을 제명하고, “학생 시민들의 부정선거 규탄은 옳으나 이성을 회복해 달라.”고 사정할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에는 천만다행하게도 선거는 6월이었고, 대학생들은 방학을 했다. 하지만 학생과 재야 세력은 절치부심하며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학을 코앞에 둔 바로 그 시점에 양창선 사건이 터진 것이다.
.
국민의 모든 관심은 충청도 청양으로 쏠렸다. "사람을 살리자는데!!"의 외침 속에, 공군 헬기로 서울에 실려 온 양창선의 각본 없는 드라마와 그의 무사함을 비는 바램 속에 6.8 부정선거는 그만 흘러간 옛 노래가 되고 말았다. 국민적 영웅이 된 양창선이 본의아니게 박정희의 수호 천사를 겸하게 됐던 것이다.

대개 영웅은 만들어지고 그 영웅담 속에 덕 보는 놈들은 따로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태어난 살가운 영웅들을 우리가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다. 고장 난 전화선을 고쳐 생존의 메시지를 보내고 진짜 해병의 깡다구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 양창선과 투철한 기자 정신으로 그의 생존을 알린 안종일은 과시 작은 영웅이었다. 몇년 전 아덴만의 여명 작전 때 무척 ‘얄미로왔던’ 누군가에도 불구하고, 석 선장의 행동이 영웅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영웅들을 일그러뜨리는 손아귀 때문에 우리가 영웅들을 잃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1967년 오늘 한 영웅이 16일만에 지하에서 솟아났다. 그가 남긴 투박한 한 마디는 아무런 굴곡이 없고 직선적이지만 그래서 감동적이다.

양창선 광부.jpg

“"가장 절실했던 것은 밥 생각이었습니다. 그 다음 어린애와 마누라 생각이 났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갱도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을... 하는 후회도 났었습니다."

Sort:  

그 시절에 용기있는 기자와 청와대의 입지 저분의 의지 이렇게 삼박자로 살아 돌아왔군요.

정치인들이 가장 치졸하게 보이는 순간 중에 하나가 인간적인 순수성도 정략적으로 이용할 때입니다.

Posted using Partiko Android

모른 척 해 달라

소름이 끼쳐요.

Coin Marketplace

STEEM 0.20
TRX 0.14
JST 0.030
BTC 69264.29
ETH 3316.64
USDT 1.00
SBD 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