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청년 김의기

in #kr6 years ago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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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30일 계엄령 하의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 6층 창 밖으로 유인물이 때아닌 눈처럼 휘날렸다. 기독교 회관을 적진처럼 노려보고 있던 계엄군들이 지체없이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험악한 욕설과 날카로운 구호가 적막한 봄 하늘을 찢었고, 이윽고 한 사람이 6층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마지막 행동은 6층에서 만난 사람에게 유인물의 원본을 전해 준 것이었다. 그 유인물은 그의 유서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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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떨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당시 계엄군들은 피를 쏟으며 꿈틀거리는 그를 살릴 생각보다는 그가 뿌린 유인물 수거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더 빨리 병원에 옮겼다면 살 수 있었을 그는 숨을 거두고 만다. 서강대학교 76학번 김의기였다.

김의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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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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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를 직접 보고 돌아온 몇 안되는 서울의 대학생이었다. 마치 인민군 특수부대처럼 잔인하게 대한민국 국민들을 학살하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지켜보면서 터지는 가슴을 내리누른 채 서울로 돌아왔지만 불과 보름 전 서울역 앞을 뒤덮었던 10만 대학생 대군은 온데간데없고, 계엄령이 떨어지면 어디어디서 만나 싸워 보자는 약속은 이미 잊혀져 가고 있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너는 나는. 저런 짐승만도 못한 자가 나라를 휘어잡고 사람들 몸을 찢고 그 피를 빨아먹고 있는데 어떻게 두 눈 뜨고 멀거니 보고만 볼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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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슴터지는 분노를 유서에 담아내고 꽃잎처럼 떨어져 내린 그는 호남 출신이 아니었다. 경상도 하고도 북도 영주, 부석사가 있는 부석면 출신이었다. 6형제 중 그는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그 즈음 TBC PD였던 정훈은 제작비를 지급하는 창구에 미스김이라고만 불리던 한 여직원을 기억하고 있다. 미스김은 얼굴을 익힌 후에 “서강대 나오셨다면서요? 제 동생도 거기 지금 다녀요.”하면서 반가와했고 얼마 후엔 “형제가 많은데 그 동생이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게 된답니다.”고 뿌듯해 했던 것도 역시. 그리고 곧 기독교회관에서 투신한 서강대생 김의기가 다름아닌 미스김의 동생이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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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집안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집안만 비추기에는 너무나 밝았다. 좋은 대학 나와 출세하리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던 김의기는 되레 가난의 굴레와 맞서 싸우는 농민을 꿈꾸었고 그가 목격한 사회적 모순과 거대악들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내가 싸우는 이유는 진리를 위해서 옮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이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속박하고 얽어매고 누르는 모든 사회, 제도, 인간 이 모든 것들과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일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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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당시 그는 졸업반이었다. 학교를 곧 떠나야 할 몸으로, 갑자기 철갑을 두른 공기가 전국을 내리누르고 마침내 외로이 광주에서 봉기가 터지자 도대체 어떻게 내려갔는지 모르게 광주로 내려갔던 경상도 청년. 그는 무엇보다 참 착한 사람이었다. “의기는 2월에 졸업한다고 했었어요. 2월이 돼서도 안하기에 왜 안하냐고 물으니까, 저보다 가난한 친구에게 등록금을 주어서 자기는 가을에 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누나 김주숙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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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착하고 정의감 넘치는 청년에게 80년 5월은 견딜 수 없는 갑갑함이었고 찢어버리고 싶은 재갈이었다. 어떻게 이런 미친 세상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연애하고 시시덕거리며 살 수 있는 것인가. 우직한 청년 김의기는 그 괴리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의 유서를 다시 읽으면 그의 속내가 그대로 울려 나온다. 이건 아이잖아. 우예 이럴 수가 있노 말이다. 응? 대한민국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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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장례식에는 4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계엄령의 칼날이 여전히 시퍼럴 무렵, 그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만 시퍼런 칼날만큼이나 시퍼런 눈빛을 한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광주항쟁 이후 처음으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하지만 꼭 장례식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하종강 성공회 노동대학장은 김의기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한 선배로부터 들은 말을 평생의 부채감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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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하고 잘난 놈들은 다 숨어버리고, 멍청하고 바보 같은 놈들만 남아서 김의기 장례를 치렀다. 애새끼들이라고 얼마나 꼭꼭 숨어버렸는지,..... 똑똑한 놈들은 다 숨어버리고... 멍청한 놈들끼리 남아서 의기 장례를 치렀다. 너는 인마 나쁜 놈이야." 그래..... 그때 잘난체하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오늘 무슨 꼬라지로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김의기는 참 멍청하고 바보같은 사람들의 선두였고 선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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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기. 세상 다 그런 거지 뭐 하며 머리칼 쓸어넘기며 계절의 여왕 5월을 즐기기에는 너무나 예민하고 참으로 정직하고 너무나 착했던 한 청년은 스스로를 허공에 내던지면서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물으며 스러져 갔고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의기(義氣)를 되살린 의로운 터(義基)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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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김의기!

네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김의기

이런분이 있었다는것조차 모르고 .....부끄럽고 부끄러운 밤입니다

김의기에 대해 좀더 흥미가 생길거 같아요. 저도 좋은 글 많이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과거의 이야기는 중요하죠. 과거를 알아야 미래도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해야 할 분들이 참 많은데 너무 잘 잊어 버리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간만에 더듬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이 땅에 그런 젊은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위해 그간 또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니 황망하기만 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우리 곁에 없어야겠죠.. 아울러 오늘 우리가 이리 사는 것도 저런 희생의 결과임은 분명할 것 같습니다. 참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김의기 처음 듣는 영웅의 이름이네요.

네..... 아직은 80년대까지는 교과서에 나올 때도 아니라서 그런지... 거의 모르시죠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잊지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네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의기....
제게는 너무도 먹먹한 이름입니다.
이렇게 되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리스팀
팔로우 하고 종종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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