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진실은 언제나 심연 속에 있다 (2)
영화 <플란다스의 개> *사진 : 다음 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
2. 심연에서 발견한 인간의 이기적 본성
형태나 방식이 조금씩 바뀔지언정 앞으로 등장할 봉준호 감독의 작품 또한 그 사건의 실마리와 폭로하고자 하는 진실이 깊숙한 심연에 자리 잡을 것이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치 복잡한 배관 설계도를 보는 듯 20여년에 걸쳐 치밀하게 일렬로 늘여놓은 심연 속에서 봉준호 감독은 대체 무엇을 발견하려고 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추악한 본성 중 하나인 ‘이기심’이다.
사실 이기심을 본격적으로 정의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만의 이익을 꾀한다’는 사전적 정의만으로 이기심이란 단어를 설명한다면 분명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이기심은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무한하다”는 밀의 자유론적 발상이 엄격히 지켜진다 하더라도 켕기는 구석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명료하게 ‘타자를 해쳐가면서까지 만족을 얻는 이기심’을 주목하면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이기심의 실체를 파헤친다.
먼저 <플란다스의 개>를 살펴보면 지하실 심연 속에 갇혀버린 ‘개의 사체’는 일신의 작은 편안함을 위해 생명 죽이기를 마다않는 윤주의 이기심이 구체적 이미지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이기심의 징표는 윤주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것을 마주치거나 관련되는 순간 인간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이기심을 겉으로 꺼내게 되는데, 시끄럽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개를 죽이던 윤주가 교수가 되기 위해 기꺼이 ‘네로’를 자처하며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모습은 물론, 순박해 보이는 현남(배두나)조차도 TV에 나올 수 있다면 누군가 다쳐도 좋다는―그로써 자신이 구원투수로 등판하는―이기적인 발상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몸보신을 할 수 있다면 그 자신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주민의 애견이라도 상관없다는 경비원(변희봉)과 기생충처럼 지하실에 기생하며 그 경비원의 밥그릇조차 빼앗아버리는 부랑자 최모씨(김뢰하)까지 <플란다스의 개>는 다양한 인간 군상으로부터 ‘타자를 해치는’ 인간의 이기심을 폭로해낸다. 거기에 이 작품은 결말부에 윤주의 뒤통수를 포착하면서 그의 대사처럼 ‘어디선가 본 듯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들의 뒷모습을 추적해 그 추악한 이기심이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다는 것까지 경고한다. 심연에서 발견된 이기심의 본질이 연쇄적으로 이기심을 끌어내고 종래엔 대중들과 섞이면서 일상성으로 회귀하는 이 같은 봉준호 감독의 ‘심연 설계도’는 데뷔작 이후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흐트러짐 없이 반영된다.
깊은 농수로라는 심연을 가진 <살인의 추억>은 어떨까. 농수로에 처박힌 시신은 한 개인의 욕정의 결과물―어쩌면 싸이코패스의 단순한 살해 욕구를 위한―로 나타나지만, 그 심연을 마주하는 형사들 역시 희생자의 억울함을 풀기보다는 사건을 빠르게 마무리 지어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있음을 드러낸다. 일신이 편안하면 남의 인생이야 어찌됐든 상관없다는 그 태도. 그리고 사건 종료 후 먼 미래의 일상으로 회귀한 두만(송강호)이 대중들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연쇄살인마의 자취를 자각하면서 심연 속으로 사라진 박현규가 결코 심연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님을 재확인하게 된다. <괴물>도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심연으로부터의 이기심의 발현과 회귀는 같다. 타국민의 안전엔 관심도 없는 외인의 이기심―더 정확히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들―이 포름알데히드에 녹아 한강에 방류되고, 이기심으로 오염된 생명의 근원은 ‘괴물’을 낳는다. 이기심의 괴물은 이기심을 잉태한 사람들을 도로 학살하며 아직 본격적으로 이기적 본성을 체득하지 못한 아이들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아 미끼로 쓰면서 민·관을 망라한 사회의 이기적 행태까지 밖으로 유인해 종래엔 ‘한강’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장소로 회귀시킨다.
영화 <마더> *사진 : 다음 영화, <마더>(2009)
이쯤만 해도 인간에 대한 불쾌함이 물큰 치솟아 오르는데 봉준호 감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근원적인 이기심을 주목해본다. 그건 아마도 봉준호 감독이 심연에서 꺼낸 이기심 가운데 가장 끔찍한 형태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작품은 바로 <마더>다.
‘그럴 것이다’라는 통념적인 사고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 작품의 회의주의적 경향은 이기심에 대해 새로운 발상을 요구한다. 도준(원빈)은 세상물정에 어두워 순진무구할 것이라는 지적장애인에 대한 통념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계승하지만 자신의 살인을 동류에게 떠넘기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도준이 이기심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은 본능을 좇아 그 존재자체로도 충분히 이기적인 행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 존재에 대한 절망마저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여기서 봉준호 감독은 도준이 이기적 인간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마더(김혜자)가 심은 ‘이기심의 씨앗’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것’을 강권한 결과로 살인사건은 벌어졌고, 자신의 생존이야말로 최우선 가치라는 철학을 주입받은 도준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실천했을 뿐이다. 즉, 이기심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질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꾸준히 따라온 사람이라면 인간 본성을 추적하는 그의 목표를 이해하더라도 여기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데, 그간 봉준호 감독은 순수를 대변하는 대상, 예컨대 아이들을 심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서도 그들의 이기심을 발견하는 데는 주저해왔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간이 이기적으로만 살아가도록 설계된 기계라면 그 모든 윤리는 무용해지고 인간이 서로의 살을 뜯어먹는 지옥도가 정당화(그것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론’을 펼친 리차드 도킨스조차도 망설인 것이었다)되니까. 그럼에도 이기성에 관해 모든 것을 해부하려는 봉준호 감독에게는 ‘순수가 이기로 물들 수 있음’은 반드시 증명해내야 할 과제 중 하나였고, 그렇다면 지적장애인으로 순수를 타고나지만 어른이 되어 ‘어둠에 절여지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난’ 도준이라면 인간에 대한 무자비한 절망을 거두고 진실은 폭로할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어쨌거나 <마더>의 ‘마더’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괴물을 보고 마침내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광기가 뒤섞인 방관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여기서는 한 순진한 인간을 괴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괴물을 세상에 버려두고 도망칠 만큼 무책임하고 비정한 한 층 더 심화된 형태의 이기심이 또 발견된다. 물론 이 끔찍한 이기심도 앞선 작품들과 똑같이 그 형태를 숨긴 채 광란의 춤판이 벌어진 군중들 속에 섞이며 우리 주위에서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이미 이기적 괴물이 되어버린 도준 또한 무수한 군중이 오가는 버스터미널에 희석되면서 ‘이기심의 일상으로의 회귀’라는 메시지는 <마더>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그런가하면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부터 심연의 내부를 다루는 방법도 달라진 만큼, 심연 속에서 한 인간의 개체적 이기심을 넘어 사회적 맥락, 집단적 이기심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우선 설국열차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 존재 자체가 인간의 역사이자 어두운 심연이다. 꼬리 칸과 앞 칸의 구분을 통한 계급의 분리는 인류의 오랜 역사와 궤를 함께한 이기적 시스템의 ‘합법적’ 완성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칸칸이 나뉘어 세계를 일주하는 설국열차의 모습은 국경을 맞대고 끝없이 이어진 국가들의 행렬은 만국기를 보는 듯 하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계층 간 대립은 국경과 인종을 망라해 존재한다. 그런 이기적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특히 설국열차의 심연, 예카트리나 브릿지의 터널 속에서 벌어지는 학살극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대중의 눈을 멀게 하고 권력의 부름을 받은 폭력은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대중들을 손쉽게 처리한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만 한 점은 죽음을 맞이하는 건 꼭 대중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들을 학살하는 전사들도 혁명의 횃불 아래 하나둘 쓰러지기는 마찬가지다. 풍요를 독차지하려는 앞 칸 사람들도 이기적 집단의 행태를 보여주긴 하지만 평온한 세상에서 함께 윌포드를 비웃기를 마다않던 사람들이 막상 재난이 닥치자 무임승차를 해 목숨을 연명하고도 앞 칸 사람들의 풍요를 강탈하려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후에 윌포드가 열차 부품 대신 꼬리 칸 사람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꼬리 칸 사람들이 열차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전후사정을 생략하고 앞으로 진군만 하려는 꼬리 칸 사람들도 이기적이라는 데는 변명의 여지(길리엄은 그런 사정을 알고 대중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선에서 윌포드와 결탁했던 것이다)가 없다. 결국 인간은 집단 간의 갈등 속에서 있는 한 어느 쪽에 위치해 있어도 이기심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게 <설국열차>가 집단의 이기심과 통념을 뒤집고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이기심까지 폭로했다면, <옥자>는 강제교배가 이뤄지는 미란도 그룹의 ‘지하 교배실험장’을 들여다보며 살인을 최악의 범죄로 여기면서도 살상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는 인간이 그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는 다른 생물을 학대하고 살상하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인간의 만물을 향한 이기심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옥자>는 아예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 생존을 놓고 갈등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세계, ‘종’ 단위의 이기심까지 파헤치고 나섰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옥자>에 이르러서 봉준호 감독의 이기심 탐구는 더 확장이 불가능해보이는데, 그는 최초의 설계도 였던 <플란다스의 개>를 닮은 <기생충>을 꺼내면서 다시 한 번 이기심 탐구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영화 <기생충> *사진 : 다음 영화, <기생충>(2019)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세계까지 확장하던 봉준호 감독의 이기심 탐구는 <기생충>에 이르러 다시 멈추고 인간 내부로 회군한다. 원점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기생충>은 분명히 앞선 작품들과는 뭔가 다르다. 이 작품은 그 심연을 콕 짚어 하나라고 하기는 어려워 폭로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단박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기택 가족의 반지하방도 봉준호 감독이 포착하려는 심연일 수 있고, 동익 가족의 대저택 지하 공간도 심연일 수 있다. 깊이로만 따진다면 기택의 반지하방이 심연이지만, 폐쇄성의 정도로 따진다면 대저택의 지하가 심연이다. 그런데 두 심연 중 은폐된 진실은 대저택의 지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확실하나, 비의 정화의식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 거짓과 위선의 충격파가 이미지의 수직적 하강과 함께 반지하방까지 전달돼 인간의 또 다른 어둠을 퍼 올린다는 점에서 은폐된 진실은 하나가 아니게 된다.
적층된 거짓과 이기심의 말로가 역류를 일으킨 변기를 기정(박소담)이 애써 틀어막는 상징적인 장면에서 우리는 담배 한 가치나 피워 올리려는 피상적인 만족을 위해 추악한 죄악을 덮어두려는 이기적 인간의 진정한 실체를 목도하게 된다. 이기적 행동의 결과는 누군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크지만 그 행동의 계기는 대가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고 세속적이다. 이는 무책임하게 빚을 지고 도망친 뒤 작은 만족을 위해 타인의 삶에 기생하는 대저택 지하실의 근세(박명훈)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는 점으로, 실낱같은 만족을 위해 큰 재앙을 소모하는 이기심의 근본적인 작동 방식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까지 놓고보면 결국 봉준호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에서 시작해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이기심의 발견-이기심의 종류-이기심의 작동 방식까지 관통하며 이기적 본성에 관한 한 모든 것을 꿰뚫고 폭로하려고 한 것이 된다.
그런데 <기생충>에 이르러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간다면, 초기작 <플란다스의 개>가 가진 심연과 진실을 향한 폭심지가 아파트 지하실 한 곳만을 다루고 이후에 등장한 작품들도 그러했다면, <기생충>에서는 대저택 지하실과 반지하방 두 곳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생충>의 심연은 기폭제로 작용한 대저택 지하실이 반지하방의 진실까지 연쇄폭발시킴으로써 ‘소극적으로 행하는 이기적 인간’과 ‘적극적으로 행하는 이기적 인간’의 두 양태를 동시에 밝히기도 하는데, 즉,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전까지 하나의 심연을 가지고 진실을 캐냈다면 이제는 플롯 위에서 활발히 작동하며 각자의 의미를 갖고 있는 두 개의 심연을 동시에 다루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라는 진실을 한꺼번에 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말은 곧,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을 기점으로 '영화적 진화'에 성공했고 또 한 꺼풀의 허물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됐다는 것과 같다.
*3편(마지막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