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얘기] 같은 속도로 걷기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7 years ago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사실 산책보다 산책을 핑계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누군가는 결혼 전엔 주로 여자친구였고, 결혼 후엔 아내가 되었다.

저녁 식사 후 강변 인도를 따라 산책과 함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내게는 아주 큰 행복이다.

아내도 산책과 대화에 대해 나랑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산책하는 시간은 서로에게 집중하기 참 좋다.

아내가 임신하기 전엔 일주일에 3~4번 정도 산책을 나갔다.

하지만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로 나가자는 말을 못하고 있다가, 오랜만에 마음먹고 나오게 되었다.

아직 1kg도 안되는 아기지만, 아기를 품고 걷는다는 건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일이다.

그래서 천천히 걷다가 벤치가 나오면 쉬어갔다.


오랜만에 산책나와서 들뜬 아내와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커플이 말싸움을 하며 다가왔다.

대화라고 보기엔 톤이 한껏 올라가 있었다.

아내랑은 연애도 제법 오래했기 때문에 그 모습이 걱정되면서도 귀여워서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싸움 구경이 가장 재미나는 구경 아니겠는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저렇게 흥분한 걸까?

얘기를 들어보니 간단했다.



남자친구는 자신을 못따라오는 여자친구가 불만이었다.

여자친구는 남자친구한테 이쁘게 보이고 싶어서 하이힐까지 신고왔는데, 마음도 알아주지 못하는 남자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에서 남자친구가 안아주면 상황은 종료된다.

하지만 흥분한 남자친구는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여자친구는 원래 걸음이 느렸고,운동화를 신었어도 나를 따라오지 못했을 거라면서 여자친구를 향해 한방을 날려버렸다.

결국 여자친구가 눈물을 보였고, 그제서야 남자친구는 안아줬다.

10분간의 말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다.


싸움이 끝나고, 아내와 나는 그 싸움 내용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남자친구가 비슷하거나 같은 속도로 걸어가주면 되는 문제 아니었을까?'

현재의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대답이다.

체력이 충전된 아내와 다시 걷고있는데, 살짝 놀라웠다.



아내가 임신하기 전, 아내나 친구들과 의견을 주고받던 내 모습과 꽤나 많이 달라져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과거 나에게 비슷한 문제가 주어졌다면, 그 남자친구처럼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조금 더 빠르게 걷도록 '설득'하거나, 어느 정도 지점에서 '서로 노력'하는 방법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런 방법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아내가 임신한 후 나의 관점은 적지 않게 달라졌다.

먼저 상대방의 입장부터 살피게 되었다.

비슷한 상황이 나에게 닥쳤다면, 나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내는 현재 입덧이 남아있고, 배는 점점 불러올 것이다. 

운동능력은 많이 떨어져있고, 움직임도 둔화되어 걷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서로 노력하는 방법이 아니라, 내가 아내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

내가 그 남자친구 입장이었어도, 결론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그 커플은 하이힐을 신은 여자친구의 속도에 맞추는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애초부터 공평하게 같은 수준의 노력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건 남녀관계를 넘어 사회생활을 할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보통 스스로는 강자, 똑똑한 사람,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해결방식은 서로 동등한 수준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양보했으니, 너도 이만큼 양보하는게 합리적이야!"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강자라고 피해볼 이유가 전혀없으며, 노력이라는 건 서로 같이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희생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논리다.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의사결정과정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부분은 맞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의견을 내거나 문제해결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자신과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묵살하는 경우가 아주 많이 발생한다.

또한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나 방법대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자신은 엄청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믿음이나 신념이 "폭력적"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조직,관계, 커뮤니티에 굉장힌 기여를 하고 있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에서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 강자가 더 많이 노력하고 희생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강자가 되는 과정, 기득권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정상적으로 경험했다면, 누가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지 모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려하거나 보조를 맞추지 않는 것은 그냥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다른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멍청한 나는 아내가 임신한 후에야 비로서 깨달았다.

그래도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깨달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내 아이에겐 누군가와 같은 속도로 걷는 법을 제대로 알려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가 내 의견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전적으로 아이의 생각에 달려있다.

아이가 나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아빠, 왜 그렇게 해야하죠?"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언제라도 "약자"가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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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동안 너무 생각없이 살아온것 같아서, 이제라도 해보려고 합니다.
스팀잇을 시작하면서 좋은점은 생각을 정리하면서 뭔가를 적을수 있다는 점 같아요.
블로그라는 게 결국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거라고 생각하니까..
재미있더라구요.
madefromreality님,좋은 하루 보내세요^^

저도 평소에 비슷하게 느끼는 점이 많아 공감이 갑니다. 항상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한다고 아이에게도 가르치곤 있는데 저 스스로 잘 제어하지 못할때도 많아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보팅 팔로우 하고갑니다. 행복하세여~

뭔가를 적으면서 생각을 정리한다는 거에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배려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는거 참 힘든 것 같아요.
여전히 제어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우리 모두 행복합시다~
스팀잇이라는 공간에서 자주 소통하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즘에 글들 스크롤을 빨리 내리면서 읽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이 글은 천천히 읽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스팀잇이란 공간에서 활동한지 아직 한달이 안되지만...느낀점이 있습니다.
다들 굉장히 빠르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좀 느린 편이라서, 글을 쓰는 부분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부족한 글에 관심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화이팅~!

그 젊은 커플의 경우 여자가 하이힐 신은 걸 배려해주지 못한 남자가 이해 안될 수도 있습니다만 세상을 50 넘게 살아보니까 그 남자의 컨디션이나 여친에 대한 생각이 정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하게됩니다. 이를테면 여친에게 뭔가 불만이 있는 경우 같은.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말씀이고 우리네 일상생활을 한 번 돌아보게 하는 훌륭한 글입니다.

팔로우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와 같은 상대방 존중과 같은 주제의 인성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아울러 '터보힘준' 유머(인'터'넷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준'있는 유머)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인터넷3대 구경거리는 미인, 동물, 유머라고 합니다.
제 창작 품위유머 한 번 구경 오십시요 @isson99

맞아요.
제가 보는 것도 하나의 관점이나 시각에 불과하니 상황에 대한 해석은 언제든지 달라질수 있다고 봅니다.
인성칼럼이라..뭔가 인문학을 넘나들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블로그에 방문하여 isson99님 글을 읽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고 댓글 감사드려요~

인문학을 넘나들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넘나들도록 하겠습니다^^

닉네임이 민스키 선생님...'헉' 하느라 글에 집중력이 떨어졌습니다. 상대방이 내가 그런 상태라는 것을 설득해줄 수 있다면 내가 재점검하고 돌아설 수 있지만, 상대방이 보통 제대로 표현하는 경우가 드물죠. 결국 계속 자기검열을 해야 하나 싶습니다. 보팅합니다.

자기검열...
직장생활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 하게 되죠.
선배를 대할때도 심지어 후배를 대할때도 자연스럽게 검열을 하게 됩니다.
물론 조심할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냥 실수하더라도 원활하게 소통하면서 서로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그 지적이 맞다면 수용할수있는 관계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죠.
상대방이 제대로 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면, 먼저 부드럽게 내가 표현해보려고 노력중인데..그게 생각보다 쉽진않네요
블로그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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