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그것도 임진왜란 때 무려 정2품(장관급)까지 올랐던 파격적인 일본인이 있었다?
<출처: 녹동서원>
1) 가토 기요마사의 수하장수, "사야가"의 투항과 귀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제 1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에 뒤이어 들어온 제 2군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수하 장수 중에, 조선에 투항한 이가 있었으며, 그는 당시 "사야가(沙也可), 1571~1642."로 불렸습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의 위세가 압도적인 것을 목도했음에도 항복한 것을 보면, 그는 좋게보면 명분없는 전쟁을 반대한 평화주의자란 설도 있으나, 아무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가토 기요마사와 적대 관계에 있어 추후 일본에서 살기가 어려웠던 가문 출신의 사람이 아닌가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는데요.
투항시기에 대해서 조선의 기록에서는 당시 일본 제 1군이 부산 동래성을 함락할 무렵이라 하였으니 사실상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투항했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중이라고 합니다.
또한 투항규모 면에서도 조선의 기록에서는 당시 3천명을 이끌던 선봉장급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아무리 투항하고 싶었다해도 압도적 우위에 있던 개전 초기에 3천 부하들까지 이끌고 투항할 수는 없었을 터, 실제로는 아마 많아야 그를 따르는 소수만 데리고 투항했을거라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 합니다.
이렇게 특이한 인물 "사야가"는 그 이름조차 가명입니다. 일본에 가족들을 두고 온터, 투항시에 실명을 남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불과 22세 무렵에 조선에 투항한 그이기에, 일본 역사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가 실제로 누구였는지에 대해 여러 인물들이 추정되고 있는 상황이라, 실제로 선봉장급 인물이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은 갑니다.
"사야가"로 불리던 일본 장수는 임진왜란 중에 정3품까지 올랐다가, 정유재란을 거치면서는 정2품 정헌대부(=장관급 문관)에까지 오르기 때문에, 실존했던 인물인 점은 분명합니다.
2) 초절정 파격대우를 받아 정2품까지 오른 "사야가=김충선"
전쟁 전에는 일본을 대부분 폄하했고 전쟁 중에는 일본에 적대감도 커졌을 당시 조선 관료들 사이에서, "사야가"는 어떻게 조선의 정2품 관직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의 도움이 컸고 공이 상당한데다가 귀화한 이에게 더욱 동기부여를 하기위한 점도 고려했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그의 공을 살펴보면,
그는 당시 일본군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던 때 수많은 정확한 정보와 주요 전술을 제공하여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전 초기 조선 도성은 일본군의 규모 파악조차 못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에 조총과 화약기술 제공에 앞장섰고 심지어 이순신과 이에 대해 논의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등 의병과 연합 또는 관군의 장수로 일본군을 무찌르는데 앞장서 큰 전공을 세웠고, 심지어 정유재란 때는 울산왜성에서 적장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섬멸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 때 선조로부터 한국이름 "김충선"까지 하사받았습니다.
또한 인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북방까지 나아가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에는 소규모 청군부대에 승리하는 등 당시 어려웠던 국난의 시대에 조선에서, 조선의 모든 전쟁에 공이 있었습니다. 조선과 청의 강화가 성립하자, 크게 탄식했다고 전해집니다.(이때는 사실상 조선인이나 다름없었나 봅니다.)
또한 전쟁이 없을 때는 수시로 남해안을 침탈했던 왜구들을 막는데도 큰 기여를 했다 합니다.
정2품을 주었다는 것은, 그 위로는 1품(=정승급)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유교 기반의 조선으로서는 사실상 외국인에게 그것도 적국 출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파격(?) 대우를 한 것이 확실해 보이네요.
이 정도 파격 대우는 작금의 현대사회에서도 힘들어 보이지요? 정말로 필요했고, 공도 상당했을 거란 반증이 될 것 같습니다.
3) 대구의 녹동서원, 와카야마현의 기념비가 세워진 "김충선"
"사야가"로 불리다가 "김충선"이 된 그를 충절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에는 꽤 큰 규모로 녹동서원이 세워져 있다고 하네요. 그곳에 한일우호교류관이 함께 건립되어 한일양국 간 이해도를 높이는데 공헌하는 곳이자 일본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코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름 규모가 있어 보이네요.
<출처: 녹동서원>
그의 후손들은 "사성(=하사받은 성) 김해 김씨"로 국내에 약 7,500명 남짓된다고 합니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김충선"의 출신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확정은 아님) 일본 오사카 아래 쪽에 위치한 와카야마 지역에도 작게나마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하네요.
조선 입장에서 큰 힘이었던 김충선, 연구해야 될 내용도 많아
만약 김충선이 임진왜란 초기 조선에 귀화하지 않았다면, 전쟁의 양상은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정보, 기술을 조선에 제공하고, 많은 전공도 세웠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전쟁사에 있어 늘 아군을 먼저 통제 잘하고 분열되지 않은 것은 전쟁의 승패에 있어 큰 힘이라는 교훈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김충선은 친한파의 상징 같은 인물인 셈이지만, 당시 일본 입장에서는 반역자에 가까울 수도 있는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 크게 미진하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도 연구가 미약합니다.
국내에서 김충선을 연구하는 모임이 생겨나고 있고, 일본에서도 더디지만 진행되고는 있다 합니다. NHK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사료가 많지 않아, 정2품까지 올랐던 것이 분명한 그가 과연 왜 투항한 것인지, 일본에서의 출신 가문은 어디였는지, 투항규모와 시기는 어느 정도였는지, 왜 그가 그렇게 앞장서서 조선을 위해 싸우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 같네요.
지난 번 왕건의 팔공산 전투 패배 후 그의 기사회생 코스로 구성한 트레킹 코스에 조선에서 장관에 오른 일본인의 충절을 기리는 서원까지, 대구에 가게되면 들러야 할 곳이 많아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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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일반인이 잠시 살펴본 내용일 뿐이므로 맥락 위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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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실 재미있게 알아갑니다^^
네 많은 것을 공부해보게 되는 사건이자 인물인 것 같습니다.
편한 시간 보내세요.
"김충선" 은 들어봤는데 풀 스토리는 몰랐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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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도 찾아서 정리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고 아는 것도 많아 저도 배울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김충선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좋은 주말 되셔요~^^
감사합니다. 교훈 얻을 부분도 있는 것 같고 머리 식히기도 좋아서 재미로 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교과서 등에서 안 다뤄서 잘 모를만한 것들 위주로 소개 올리고 있답니다.
가끔은 작금의 사회 현실과 너무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도 있어 놀랄 때가 있기도 하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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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역사도 굉장히 많은듯 하군요!!
조선시대에 정말 파격 그 자체네요!
네 전란의 와중에 이용가치가 있어 써먹으려고만 했다고 하기에는 추후 대접도 꽤 좋았던 것 같습니다. 김충선이 그만큼 노력을 했었던 부분도 분명 있었을 듯 하네요.
독거노인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제가 쓴 일본이야기 보시면 이해가 되실수도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같은 중앙집권 왕조가 아니라서 사야가 가문이 히데요시와 원수지간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다이다이묘인 도쿠가와 가문이 참전을 안했고 히데요시도 도쿠가와 가문과 전쟁을 했던 사이고 서로 팽팽했기 때문에 출병을 강요할 수 없었습니다.
힘이 약한 가문이나 신생 젊은 다이묘들이 주로 참전했죠.
히데요시 사후 앞다퉈서 철군후에 세키카하라 내전이 벌어진것만 봐도 알수 있죠.
그후 두차례의 오사카성전쟁이 있었습니다
네 깊이 있고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왜란 중에도 힘 모으고 기다렸다가 히데요시 아들을 잡는 방식으로 결국 일본을 넘겨받게 되는 이에야스에 대한 히데요시의 우려는 따로 다룰 긴 부분이라 넣지 않았습니다만, 당시 다이묘들의 암투가 심했던 부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히데요시에게 특히 항전했던 가문일수록 왜란중에 앞장서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 부분 감안해서 히데요시 가문 때문에 일본에서 살 수 없을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고 표시해 놓았으나, 사서에 이를 명확히하는 부분이 없고 사야가로 추정 거론되는 인물도 아직 많다고 알려져 있는 듯하여 딱 이거다 이렇게 확정 표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명의 장수가 청으로 넘어가 화포기술을 넘겨주어 결과적으로 청이 강해져 명이 멸망하고 이때 청은 과거와 다르게 기병과 화포까지 앞세워 조선으로 진군해오는 바람에 인조가 과거와 달리 장기농성전이 먹혀들지 않자, 병자호란 때 전혀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넵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기대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이네요. 역으로 일본으로 기밀을 가지고 귀화한 한국인도 있을까요?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그 역시 김충선 만큼 놀랄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야기가 있기에, 다음 포스팅 소재로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듣고 바로 떠오른 사람 예를 하나 들어볼께요.
당시 함경도의 회령 지역에서 근왕병을 모으던 선조의 장남 임해군과 또다른 아들 순화군을 잡아다가 일본군 가토미요마사에게 바친 "국경인"이 떠오르는군요. 세자는 아니었지만 왕자 둘을 팔았으니 어쩌면 기밀 이상이겠지요? 그는 그 공으로 일본으로부터 회령지역의 통치권을 받았으니, 귀화는 아니지만 그이상이라고 봐야겠네요.
"국경인"은 전주 출신 관리였으나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그 지역의 아전이 된 자로서, 회령지역에는 그 뿐 아니라 많은 유배자들이 있던 곳이고 북방지역이다보니 아무래도 조선과 선조에 대한 반감이 기본적으로 높았던 터,
그렇게까지 된 데에는 당시 임해군 순화군 및 그의 친인척들이 전쟁 통에 회령 지역의 백성들을 상당히 함부로 대해 지역민들의 원한을 높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왕족의 신분이면서 일반 백성들을 실제로 만날 일이 드물었다가 전쟁통에 유배자도 많고 조선 정부에 반감도 높은 북방인 곳에서 경복궁에서 하인 대하는 그 이상으로 살벌하게 대했을테니, 크게 찍힌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튼 그럼에도 국경인의 행동 또한 당연히 잘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는 어차피 유배자라 조선에서는 글렀다고 판단했는지 많은 이들을 모아 그들을 사로잡고 일본에 팔아 넘겼고 회령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배신자의 말로는 참담하겠지요?
그는 그해에 바로 또다른 의병에 가까운 세력들에게 암살되고 맙니다.
이듬해 임해군과 순화군은 협상을 통해 풀려나게 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와우! 감사합니다. 역시나...ㅎㅎ 즐거운 주말 되세요.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걸 여태 몰랐네요~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보클하고 갑니다
네 흥미롭더라구요. 징비록에서도 간단히만 다뤄지고 있고 아무래도 일본인 출신으로 귀화한 조선인이었기에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여지네요. 그가 임진왜란~정유재란~이괄의난~병자호란 등 당시 모든 전란의 와중에 공을 세웠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대학원생때 이 이야기를 제 담당교수로부터 강의받은 적이 있어서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와우 이미 들으셨었군요. ㅎㅎ
처음 들은 인물이네요. 모르는 인물인만큼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상상하기 힘든 외국인 출신 장관급이라니..
네 지금보다 어쩌면 훨씬 더 준엄한 힘의 질서에 의한 국제질서가 있던 시절이고, 국왕이 의주까지 피신하여 더는 갈곳이 없어 나라의 존망을 우려하던 시기이기에, 필요하다면 중용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유교가 강했지만 김충선도 아마 일본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음도 고려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조선인을 살생하는데 앞장서지 않고 초기에 바로 투항한 점도 그를 참수하지 않고 귀화시키고 믿고 썼던 것 같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