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협잡들-카레는 원래 노랗다

in #kr7 years ago (edited)

협잡들


  • '카레는 원래 노랗다'를 첫 문장으로 정해놓고 완성시킨 소설입니다.
  • 길이에 비해 구성이 복잡합니다! 조금 집중해서 읽으셔야할 거에요.


카레는 원래 노랗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 사실이었을 이 말이 번복됐을 때의 효민을 상상한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잇지 못하고 나는 그런 그의 귀에다가 나직한 승리 선언을 흘린다. 애초부터 네가 이길 방법 따윈 없었던 거라고, 너의 손으로 패를 움켜쥔 채 내기에 뛰어 들었다 생각했겠지만 실은 내 손에 이끌렸을 뿐이라고. 이런 이야기까지 할지 말지는 결과를 본 뒤에 느긋이 결정해도 되겠지. 어쨋든 우리는 급식을 받는 중이고 아직 수십 명씩이나 우리 뒤에서 배식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건 그와 나 둘의 대결이니 다른 누구도 자신의 식사를 침해받을 이유 따위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분해하면서도 식판 위에 놓인 그 노랗지 않은 카레를 마주하며 식탁을 향해 걸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 마주앉아 완벽한 패배자의 얼굴이 된 그의 모습을 관람할 것이다. 내 계획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그의 고민쯤이야 이 청사진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를 알려주며 실컷 유린하겠노라 생각하니 남모를 전율이 인다. 이젠 정말 곧이다. 음식 냄새에 취한 입이 달짝지근한 침을 고여낸다.

"카레가 어떻게 노란색이냐 등신아."
라는 태원의 도발에 화를 냈던 게 꽤나 그럴 듯하게 보였던 걸까. 아니, '노란 음식 말하기 게임' 같은 수상쩍은 걸 함정이랍시고 내밀었던 그는 애당초 패배할 운명이었다. 귤, 오렌지, 바나나 등이 이어지고 내가 '카레'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그의 입가에 아주 잠깐 맴돌았던 미소를 나는 기억한다. 그가 준비했던 계획이 성공하라면 '카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고 많은 음식들 중 카레가 언급될 것이라는 추측에 태원은 나름대로의 도박을 건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다졌던 모든 각오들은 다만 내가 짠 각본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다. 근래에 들어 인도 정통 음식 전문점의 전단지들이 그의 눈에 유독 많이 밟혔던 걸 그는 우연이라고 믿었던 걸까. 전단지 속 형형색색의 카레들을 보며 그가 품게 되었을 노란색 카레에 대한 회의가, 오늘의 카레는 통상의 노란색이 아니라 갈색이라는 배식 당번들의 말이 어디로부터 흘러왔는지에 대해 그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것인가. 고작 그 정도이니 지는 거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는 태원은 내 바로 앞에서 급식실을 향해 경쾌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가벼운 휘파람 따위나 흥얼거리면서.

계획을 짤 때는 자신의 계획에 도취되지 않도록 갖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효민의 계획은 그런 점에서 실패했고, 때문에 역이용하기에 너무나 편리했다. 그는 수많은 변수가 전제되어야 하는 계획을 너무 성급하게 짠 나머지 전제의 세부사항에 대해 둔감했다. 가령 최근 들어 자꾸 보이기 시작한 전단지 속 인도요리 전문점이 학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든지, 그리고 그 전단지에는 이상할 정도로 노란색의 카레가 배제되어 있다든지 등이 말이다. 그 수상한 전단지들은 명백히 카레의 색에 대한 내 의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마침 식단표에는 이번 주에 두 번, 다음 주에 한 번 카레가 나온다고 적혀 있었으므로 나는 급식실로 가서 카레의 색을 확인했다. 이번 주는 노란색, 다음 주는 갈색.

한 학교에서 다른 종류의 카레를 사용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번 주 두 번은 노란 카레, 다음 주 한 번은 갈색의 카레가 나온다는 배식 담당들의 말에 태원은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던 것인가.

나는 배식 담당에게 혹 누군가가 카레의 색깔을 묻는다면 모두 노란색이라고 속여 줄 것을 부탁했었다. 친구들끼리의 장난이라는 핑계 정도로 그는 쉽사리 납득하는 듯 했다. 그 뒤로의 계획은 일사천리였다. 차라리 우연에 기반한 계획이었다면 변수가 많았을 텐데, 나를 속이기 위해 효민이 그리려 한 큰 그림을 이해하고 나니 거기에 새 계획을 덧칠해 내 입맛에 맞도록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전단지 몇 장만으로는 절대 이르지 못했을 '카레의 색' 내기는 나의 속셈마저 겹쳐짐으로써 마침내 성립했다.

은색의 급식실 문고리를 잡는다. 유리문 너머로 배식 담당들이 배식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뒤 우리는 식판을 들고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이 내릴 엄중한 판결을 기다릴 것이다. 결국엔 누구의 주장이 맞았는지, 누가 누구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던 것인지는 이제 카레의 색깔 하나로 결정된다. 아직 식지 않아 뜨거운 급식판에 손가락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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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는 동생이 쓴 소설을 소개하고자 올린 글입니다!

저는 짧은 분량인데도 시점과 시간 순서가 복잡해서 4번 읽고나서야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ㅎㅎ..

이 문단의 화자는 누구고, 누가 어떤 음모를 꾸몄고, 결국 누가 이길 예정인건지 조금씩 이해하면서 느끼는 재미가 있더라구요!

스티미언 분들의 반응이 궁금하다고 하니 다양한 댓글 부탁드려요~
칭찬도 비판도 환영이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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