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여섯 어느날
지금은 30대 중반이지만...
기억이 더 선명하던 스물여섯 즈음에 썼던 조금 허구 섞인 일기가 있네요.
괜히 찾아서 오늘은 조금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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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왼쪽으로 꺾는 것이 아니었다. 신호등을 건너는 것이 먼저였다. 익숙한 사람을 보고는 아차 싶었다. 나는 영주상회 아줌마 앞을 지나야 했다.
모른 척 해야 했다. 모르는 사람인 냥. 나를 알아본 누군가가 후에 어떤 욕을 하더라도. 지나쳤어야 했다. 아줌마가 승훈이를 떠올리는 것보다는 나았을 테니까.
내 손을 잡고 ‘처녀가 됐구나.’ 하던.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던. 굳은 입술을 가까스로 열던. 아줌마를 보고는 차라리 땅이 가라앉기를, 내가 이 자리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건강하셨어요?”
“그럼.”
“승수 오빠도 잘 지내요?”
“응. 취직해서 다행이지.”
“아줌마. 저 버스 시간이 다 돼서 가볼게요.”
“어, 그래. 더운데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어라.”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이 나왔다. 나는 스물여섯. 아줌마 눈에 나는 여섯 살이다. 승훈이랑 뛰놀던 그 때 그대로.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아줌마는 내 뒷모습을 보고 있다. 빌어먹게도 밝은 햇살을 받고 유리창은 나를 비춘다. 내 한 걸음 한 걸음을 눈에 담는 아줌마도 비춘다. 매미는 운다. 신이 나서 웃는지도 모른다. 쟤들은 눈치도 없다. 나만큼이나.
걸어도 또 걸어도 아줌마의 눈이 따라온다. 내가 아니라 승훈이 흔적을 찾아서. 어두워져라. 소나기가 내려라. 날벼락이라도 떨어져라. 모두들 들어가게. 아줌마도 들어가게. 다음 신호등은 왜 이리 안 나오니. 빨리 사라지고 싶은데. 없어지고 싶은데.
승훈이는 어린 시절의 친구였다. 가족 외에 처음으로 손을 잡은 사람. 처음으로 싸운 사람. 아빠와 오빠를 제외하고 처음 뽀뽀한 남자. 옆집 사는 세현이가 예쁜 원피스를 입고서 뻐겨도 꼭 내 손을 잡던 첫 애인. 아빠랑 결혼을 못한다고 울자 자기랑 하자던, 처음으로 청혼한 남자. 남자들은 서서 쉬 한다고 너는 여자니까 안 된다고 무시하던 녀석. 그게 부러워 따라하다가 옷을 버리고 엄마에게 혼나게 한 망할 녀석. 내가 멀리 이사를 가고 다른학교에 가면서 자연히 멀어진, 그저 흔한 소꿉친구로 남을 수 있었던 친구.
승훈이는 열여덟 살에 사고를 당했다. 2003년 수학 능력시험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중환자실에 실려 갔다. 일주일이 지나서는 산소 호흡기를 떼야 했다. 나는 몰랐다. 아무 것도. 그때 나는 ‘내년에는 내 차례야’ 하며 긴장된 얼굴로 살다가 열여덟에 함께하던 친구들과 낄낄대며 웃기도 하고, 언니들 시험 잘 보시라고 꾸벅 인사도 하면서 살았다. 아주 평온했다. 어릴적 승훈이는 생각도 안 했다. 같이 살던 동네도 희미했다.
엄마는 승훈이 장례식이 끝나고 화장해서 강에 뿌려진 다음에야 말을 했다. 왜 지금 말 하냐며 소리 지르고 컵을 던졌다. 엉엉 우는 나를 안고 엄마도 같이 울었다.
집에 와서는 빨간 지폐를 도로 잘 핀다. 다리미가 어디 있더라. 물을 칙칙 뿌려서 빳빳하게. 퇴계 이황 선생님 참 우울하게도 생기셨네요. 얼굴 부분이 안으로 가게 해서 지폐를 돌돌 만다. 분필 같기도 하고 담배 같기도 하다. 투명 테이프로 붙인다. 풀어질 일은 없겠지.
책상 서랍 속 저 구석에 파란 상자가 있다. 딱 손바닥 크기의 작은 상자.
‘이걸 열면 울지도 몰라.’
하지만 해야 한다. 니나니나니나니. 싸구려 전자음으로 듣는 엘리제를 위하여. 참 오래도 간다 이 소리. 아직도 나네.
몇살인지 기억도 안 나는 생일에 승훈이가 선물이라고 주었던 보석상자. 받고서 사귄다고 놀림을 받게 했던 그 상자. 뚜껑을 열고 돌돌 말린 지폐를 넣는다. 상자에 달린 작은 거울을 본다. 스물 여섯의 나 뿐이다.
슬픈 이야기네요
좋은 글로 급 마음정화를 하고 합니다. ^^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얼굴도 가물가물한 녀석이 생각만 나면 울게 한다니까요...
짱짱맨 태그 사용에 감사드립니다^^
짱짱 레포트가 나왔어요^^
https://steemit.com/kr/@gudrn6677/3zzexa-and
오옷!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