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 기레기
이것은 비겁한 글입니다. 장황하고 체계가 없는 글입니다.
저는 입사 10년이 조금 안 된 일간지 기자입니다. 대학생 때에는 진보 성향의 주간지를 보면서 기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때는 정의와 부정의를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의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기자가 되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내 편이 누구이고 내 편이 아닌 편은 누구인지, 내가 정의의 편에 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자가 기자가 아니라 기레기라고 불리게 된 건 아마 세월호 참사 이후였을 거에요. 참사 직후 언론은 수많은 헛발질을 했습니다. 한 석간신문은 1면에 탑승자를 다 구조했다고 쓰기도 했었죠. 오보였습니다. 치명적인, 해서는 안 될 오보였지요.
변명하자면, 이미 아실 수도 있겠지만, 통상 이런 대형 사건이 터지면 언론은 정부의 발표에 근거해 속보를 씁니다. 언론사가 헬기나 배를 타고 현장에 가서 구조자 숫자를 셀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정부가 실태 파악조차 못 할 거라고는 언론사도 생각하지 못한 거죠.
오히려 더 나쁜 건 참사 이후의 보도였다고 생각해요. 언론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세월호 유가족을 재단하거나 외면했습니다. 이건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시 저는 세월호를 담당하는 기자는 아녔어요. 그래도 늘 부채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건 아마 평생 갈 거예요. 지난해 취재 차 세월호 유가족을 만났어요. 너무 죄송해서 자꾸 눈물이 나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삼성 얘기를 해볼까요. 삼성. 아 삼성. 우리는 청와대를 비판하는 기사는 쓸 수 있어도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는 어지간해서는 쓰지 못합니다. 삼성이 돈줄을 쥐고 있으니까요. 삼성이 광고를 끊으면 우리는 월급을 받지 못하니까요. 목구멍은 포도청이니까요.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요? 글쎄요. 수년 전에 한 IT 매체가 용감하게 삼성을 ‘조졌’다가 풍비박산이 난 적이 있습니다. 해당 보도와 관계된 인물들이 싹 다 옷을 벗었다고 해요. 최근 SBS가 삼성을 겨냥한 심층 보도를했어요. 대단한 일입니다. 메이저 언론, 특히 거대 방송사는 삼성 광고에서 자유롭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역시 대단한 일이에요. 부럽습니다.
사람들이 신문을, 우리 신문을 아주 많이 사서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 회사가 겁내는 게 삼성이 아니라 독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좀 더 좋은 신문 만들고 좋은 기사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냥 다 핑계일까요.
종이신문 부수는 날로 떨어져요. 회사는 나름 이런저런 사업을 벌여 활로를 찾는다는데, 글쎄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신문 만드는 거 말고는 좀처럼 시원치가 않습니다. 인터넷 클릭은 별로 돈이 안 되는 모양이더라고요.
지사형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불의에 저항하는 불굴의 기자, 뭐 그런 거. 지금 제 속엔 두 명의 기자가 있습니다. 지사형 기자와 직업형 기자. 날이 갈수록 후자의 지분이 커지는 걸 느낍니다. 요즘은 직업형 기자에 천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충 적당히 하고 월급만 받겠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닙니다. 프로페셔널. 프로라는 의식을 갖고 냉정하게 일하겠다, 뭐 이런 소리입니다. 정의감이 지나치면 때때로 진실을 못 보거나, 보고도 못 본 척할 수 있겠더라고요.
기레기 소리 많이 들어봤고, 제가 쓴 기사 리플에서도 심심치 않게 봤습니다. 친히 따로 메일까지 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자기가 진짜 쓰는 메일로. 그 메일로 구글링하니 모 대기업 차장이더라고요. “안녕하세요 OOO 차장님”으로 시작하는 메일을 쓰고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기레기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서늘해져요. 참 누가 만들었는지 잘도 만든 단어예요. 입에 착착 감기게. 젠장. 저는 그래도 이 땅에 일말의 양심을 갖고 기사 쓰는 기자들이 더 많다고 믿어요. 저 자신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이런 저런 기사 많이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더 열심히, 잘할게요.
워낙 다양성의 사회잖아요? 댓글 하나에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예 댓글 하나에 너무 속상해하지 않고 제 할 일이나 잘 하겠습니다.
스팀잇을 통해 지사형 기자 지분이 커지길 기대할게요 ㅎㅎ
헉 넵 ㅎㅎ 분발하겠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에 관한 댓글을 쓰려고 했는데 마지막 문장을 보니 칼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다른 아무 말씀을 못드리겠네요. 하나도 비겁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읽어주셔서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우리가 쫄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게. 빛으로 된 길을 새겨주는 일이 기자의 사명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저도 쫄지 않고 당당하게. 어깨가 무겁습니다.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돈과 가오(?) 사이에서
깨알 만큼의 망설임 없이
'가오'를 선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칼님께서 이렇게 대놓고 기레기라는 타이틀을 쓰시니
독자로서 왜인지..부끄러워집니다
양심을 갖고 기사쓰는 기자분들을 응원합니다
칼님 힘내세요!
응원 감사합니다! 기레기 소리 안 들을 만한 좋은 기사 쓰겠습니다. 응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요즘은 다들 정보검색도 잘하고 현장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신속하게 정보를 공유하죠. 사실관계는 뒤로 하더라도 말이죠. 일반인들 이야기입니다. ㅎㅎ 그래서 지금의 기자들이 살아남는 길은 정보의 정확성과 투명한 사실관계, 장기간 취재 후 심층보도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피드백을 통한 소통을 해줘야죠. 잘못했으면 쿨하게 큰 지면으로 사과문 올리고 수정기사 내보내고 다른피해는 없는지 살펴야 신뢰 회복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힘내세요! 파이팅~
옳은 말씀이세요. 정확하고 깊이있는 기사, 기사에 책임지는 기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파이팅입니다!
기자란 직업도 보통의 사명감으론 할 수 없는 직업같아요~ 저도 응원합니다!!
더 잘하겠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젊을 때 언젠가 그저 제 몸이나 잘 챙기고 가족이나 잘 돌보자고 마음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저도 잘 돌보지 못 하고 살고 있네요.
저야 그렇지 못 하더라도 님께서 지니신 예리한 칼날엔 기레기는 언감생심 얼씬도 못 할겝니다.
어휴 아닙니다. 칼날이 무뎌서 열심히 갈아야겠습니다. 앞으로 좋은 기사 쓰겠습니다.
이렇게 글을 남겨주시는 것 만으로도
조금씩 변화를 주고 계신거라고 생각합니다.(적어도 저는 오늘부터 기자분들을 싸잡아 기레기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기분 좋은 한주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말씀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월요일이군요. 건강하고 기운 넘치는 한 주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