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졸림
졸린 생각과 시시한 공부
졸리다는 말을 내 고향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경상도에서, 그것도 "남자"가 졸리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굉장히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문장이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서울물을 약 일 년 간 먹고 고향에 내려갔을 때, 졸리다는 말에 기겁하며, 깔깔거리던 친구들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는 정치적 올바름 이상이 필요하다. 과연?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손꼽으라면, 나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를 가장 위에 놓는다. 영화 평론가 듀나님의 평을 빌리자면 "모래와 금속과 불의 발레"가 아니던가. 영화를 보는 내내 전율했고, 아이맥스에서 3D로 다시 만났을 때에는 같은 영화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고 충격을 먹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래비티를 아이맥스로 보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슬프다.
매드 맥스에는 그런 장면이 있다. "스플렌디드"를 포함한 임모탄의 "신부"들이 정조대를 떼어내고 걷어 차는 장면. 그들은 임모탄의 뒤틀린 욕망이 만들어낸 희생자들이다. 익히 알고 있는 정조대와는 달리, 임모탄과 그 일파의 센스가 가미되어 비교도 안 되게 기괴하게 생긴 정조대는, 신체적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가해진 억압을 세련되게 표현한다. 피해의 기계적 재현 없이도 충분히 억압을 묘사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재현에도 의미가 없지야 않을 것이다. 무턱대고 예술을 도덕의 규범에 맞춰 재단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조금 세련된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강간하는 장면 대신에 콘돔을 세척하는 장면이, 독한 사실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술가들, 항상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는 예술가들을 존경한다. 적어도 내 취향은 그쪽에 있다.
다시, 졸리다는 말을 한 번 더 해본다. 고향에 사는 친구들은 여전히 졸리다는 말을 싫어한다. 그것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문화적 배경에 기인한다. 어떤 표현에 이미지를 부과하고, 마땅한 역할 수행을 기대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거기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조각들이 가부장적 문화와 남성성을 가리킨다.
잠깐, 그런 판단 이전에 해야 할 말이 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똑같은 문화적 배경 속에서 자라오고, 그것을 공고히 한 내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을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언어생활의 일부만 보고 지레짐작 판단을 내리는 건 어떤가? 그저 객관적인 척 현상을 기술하고 거기에 의견 몇 마디만 보태면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차라리 원죄(종교적 의미를 내가 이해하진 못하니까, 그 표현은 하나의 은유일 뿐이다.)에 가깝다. 끊임없이 저항하고 어떻게든 떨쳐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그런 원죄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하나의 예의이자, 도덕규범의 현상이다. 그렇지만 보편적인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정치적 올바름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가하지 않게 하고, 보호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게 모든 도덕규범은 그런 식이다. 특정한 대원칙, 수많은 경험 속에서 공고해진 몇 가지 원칙들 아래에 있는 세부적인 가지들은 실행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한편 이는 내가 운동하는 이들 앞에서 대체로 닥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깥의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는 내 한 줄 말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의 성질이나 돋우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그럼에도 내 바닥을 드러내고 의견을 피력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깥의 한 사람도 지켜주지 못하는 대의에는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완전하고, 또 불완전한 나와 사람들. 누구 하나 시시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켜야 할 것들이 잔뜩 있고, 누구는 싸우고 누구는 그저 걸어간다. 작은 입장의 차이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 종래에는 깊은 간극을 만들어낸다. 그럼 나는 무얼 해야 하지? 무얼 해야 손가락질받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고개를 들고 살 수 있을까. 살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을 긍정한다. 사람은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발전하는 존재라 믿는다. 신념이다. 믿음을 배신하는 증거를 숨 쉬는 동안 끝없이 마주하지만 반대로 내 믿음을 긍정하는 증거 역시 수없이 발견한다. 작은 공부를 시작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는 작은 공부. 거창한 뜻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살 수 있을까?"라는 작은 질문이 나를 뒤흔들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일상도 못 이루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부터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부를 한다고 과거가 바뀌지도 않고, 지금의 나 역시 너무 시시하기 짝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남에게 덜 상처 주고 불의에 덜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나은, 시시한 사람이 되고 싶다.
잠깐의 변. 자기기만이라고 해도 좋다. 일단은 나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니까. 결국 이기적인 선택이다. 왜냐하면, 정말 그렇다면, 그냥 내 존재만으로 누구에게 상처가 된다면 나는 무얼 선택할 것인지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지킬 것이다. 살아가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항상 불의에 맞서 싸우라고 배우지만 우리는 참으로 어떤 불의에는 둔감하지 않은가? "내로남불" 정말로 존재를 꿰뚫는 말이다. 어쩌면 기만은 존재의 필수불가결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가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모두가 가해자인 상황에서, 스스로 가했던 가해를 포함해서 모든 가해를 부정하는 것. 그렇지만 옳지 않은 걸 옳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죄를 지고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를 지었다고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속죄하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틀린 것을 인정하고 고쳐 나가는 것이 좀 더 내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합당한 처사라고도 생각한다. 무언가 바뀌리라는 기대는, 아주 희미한 뜬구름일 때가 많지만 그래도 가장 해와 가깝게 떠있는 구름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게,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게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벌레 이야기"가 콕 집어낸 바로 그것. 나는 벌레에 조금 더 가깝지만, 내 믿음은 그런 사랑에 기반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믿음 말이다. 그렇게 믿는다. 가해자의 가해를 긍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 참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나 굴리고 있는 사람 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를 지키고자 글을 쓰는 것 같다.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를 어떻게든 안고 가기 위해서, 긴 긴 목숨줄 잘 이어가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 같다. 그런 주제에 불의를 운운하고, 무엇이 더 옳고 그르다 쉽게 판단도 내리려고 한다. 나는 기만적 존재이다. 말의 무게에 대해서 통렬하게 책임져본 기억도 없고(최소한 이런 글쓰기로 인해서는 없으니까.) 주로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늘 어떻게 해야 손가락질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같은 시시한 걱정들 따위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려고 한다. 더 나은 시시한 사람이 되려고. 합당한 손가락질을 받으며, 죗값을 질질 끌어서 받으며.
이제 다시 돌아와서, 정말로 멀리 돌아왔지만, 나는 존경한다던 그런 예술가들처럼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예술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내 삶 속에서 그런 고민을 했는지 돌이켜 보는 게 좀 더 합당하겠다. 나는 내가 말을 휘두르기 전에, 그 논쟁과 사안 이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늘 깊게 돌이켜 봤을까?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며, 휘두르는 모습에 취해있지만은 안았을까? 그런 나나, 내가 나쁘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에서 누가 더 잘못한 사람일까? 잘잘못을 가리는 데에 의의가 있진 않지만, 내가 이렇게 활자를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는 다르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고, 나는 굳이 내 일화를 밝혀 적음으로써 내 생각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똑같이 나쁜 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저 나는 잠깐 판단을 보류하고, 무언가에 맞부딪혀 싸우기 전에 나를 돌이켜보는 것이, 주변을 돌이켜 보는 것이, 그 문제 자체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규범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지, 누군가를 후드려 패라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잘못에 맞서 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그전에. 나는 충분히 맞서 싸우긴 했나?) 무엇이 잘못인지 충분히 고민하고, 항상 문제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그렇지 못했고, 못하기도 하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살자. 그래도 살자. 다만 예전보다 더 노력하고, 더 많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말이다.
사는 거 너무 어렵습니다.
막 살면 좀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