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chapter 6] EVIL(1)
뜨거운 물에 풀린 싸구려 커피에서 달짝지근한 향이 난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 사건, 사건들. 산적한 사건을 해결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며칠 째 계속되는 철야에 혜원은 탄력 잃은 볼을 힘없이 어루만졌다.
그녀는 문득, 처음 경찰에 지원하던 날을 떠올렸다. 전공이었던 심리학을 체계적으로 활용해 볼 심산으로 도전한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파일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준엄한 현실 앞에 갈가리 찢어 발렸다.
매일 접하는 끔찍한 사건과 수많은 변사체의 부검 결과보고서에 무뎌질 때마다 그녀는 매번 같은 악몽에 시달렸다. 거대한 도마뱀으로 변신하는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 때, 그녀의 침대는 늘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특별히 업무에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가끔 모든 것에 무덤덤한 자기 자신이 섬뜩하게 느껴질 뿐이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인간의 삶을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기승전결(起承轉結)로만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그녀는 애절한 유가족의 절규에도, 처참한 변사체의 모습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 건 그녀에게 흔해빠진, 너무나 흔해빠진 일상일 뿐이다.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심연(abyss), 1899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언제부턴가 혜원은 커피를 식히는 척 후, 몰래 한숨 쉬는 버릇이 생겼다. 이 일을 계속하다보면 언젠가 최소한의 인간다움조차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상념에 그녀는 오늘도 커피를 길게 내불었다.
“선배, 시간 좀 괜찮아?”
다급한 목소리가 혜원을 찾는다. 손에 든 종이컵의 온도가 그새 조금 무뎌졌다.
“어, 그래. 무슨 일이야?”
“선배가 지난번에 한 번 알아보라고 한 거 있잖아요. 한인건 씨가 대대장으로, 류준 씨가 보급 장교로 있던 당시 전술학 분과 담당자들 리스트 뽑아보라던 거.”
며칠 전, 그녀는 센터에 배속된 후배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내주었다. 후배는 자신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에 열정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오제이티(OJT) 기간이었던 지난 몇 주 간 혜원에게 정신없이 깨지며 혼쭐이 난 터였다. 이번에야말로 저 얼음 마녀에게 뭔가를 보여주리라, 그는 첫 임무의 성공적인 완수를 아주 오래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
“아, 그거. 안 그래도 오늘 한 번 물어보려고 했는데.”
혜원은 한 손으로 가볍게 볼을 쳐 단상(斷想)을 정리했다. 나중에, 나중에 생각하자. 주문 같은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그녀는 심드렁해진 전의를 다시 불태웠다.
신일은 뭔가를 알아차린 걸 테지. 그의 확신에 찬 말투가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몇 번이나 확인을 부탁할 정도라면, 그는 분명 류 대위의 편지에서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를 읽은 것이리라.
애초에 한 대령과 류 대위, 두 사람의 주변 인물을 중심으로 용의자를 추릴 생각이었다. 만약 신일이 그걸 뒷받침할만한 증거까지 확보했다면 수사진행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에, 이게 대충 훑어보니까, 한 대령과 류 대위가 같이 근무한 게 대략 3년 반 정도, 나신일 씨는 군 복무기간 중 30개월 정도를 이들과 함께 했더라고요. 마진하라는 놈은 아예 그 나 선생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군 생활을 같이한 것 같고.”
마진하. 그는 특히 요주의 인물이다. 아직 마피아라는 메시지가 뭘 의미하는진 모르지만, 당시 그의 콜사인이 「마피아」였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는 현재 우리가 세운 모든 가설에 부합하는, 유일한 인물 아니던가.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현재 그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 신원은 다 확보한 거야?”
“특이사항 없냐고요? 선배, 얘네 이거 완전히 골 때리는 새끼들이에요.”
“뭐 건진 거라도 있어?”
“일단 말씀드린 마진하라는 놈 말인데요. 이놈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는데, 작년 말에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더라고. 지금은 주민등록지가 외조모의 주소로 되어 있기는 한데, 이 양반도 몸이 많이 편찮으신 것 같고. 그 할머니도 자기 손자 못 본 지 1년이 넘었다고 하더라고?”
“1년 넘게 소식이 끊겼단 말이지?”
“예, 어르신 말로는 이놈이 제대한 직후부터 모친 병세가 많이 악화된 모양이더라고. 돈이 급하다 보니 공사 현장 노가다나 유흥업소 웨이터 같은 거 하면서 근근이 돈을 모은 것 같다고 하드만. 뭐, 말은 그렇게 해도 어르신도 뭘 제대로 아는 것 같진 않았어요. 그 놈이 일한 곳도 몇 군데 수소문해서 연락 돌려봐도 그나마 한 6개월 전부터는 통 꼬리가 안 잡히네? 어때요? 수상한 냄새 팍팍 나죠?”
과연, 그의 행방이 묘연해진 즈음부터 사건이 본격화됐다는 건가. 하지만 그 시점이 6개월 전이라는 건 좀 이상하군. 류 대위의 사고가 일어난 건 불과 한 달 전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시간, 남은 5개월 간 그는 무얼 하며 지냈을까. 혜원은 수첩을 펼쳐 마진하라는 이름 옆에 6개월 전, 이라는 글씨를 꾹, 눌러썼다.
“일단 마진하는 그렇다 치고. 그 외에 다른 인물들은 어때?”
“선배, 이 때 같이 근무했던 놈들 말이에요. 이 새끼들 이거 단체로 무슨 저주라도 받은 거 같아요.”
“무슨 소리야?”
“여기 근무했던 새끼들 중에 멀쩡하게 학교 다니거나 직장 다니는 놈이 별로 없어. 다들 주민등록지는 집으로 해놓고 돈 벌겠다고 서울 간 놈, 공무원 시험 보겠다고 노량진에 처박혀 있는 놈, 가출을 한 건지 뭘 하는 건지 아예 부모랑 연락 안 하고 산 지 몇 개월씩 되는 놈, 부모 형제 하나 없어 거소지 자체가 불명인 놈까지. 뚜렷한 위치 파악이 안 되는 놈들이 제법 있다고요. 현재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 대략 일고여덟 명 정도?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이 정도 인원이 한꺼번에 거소지 파악이 안 돼? 어쨌든 지금 얘네 신용카드 사용내역이랑 통장 계좌 입출금 내역 같은 거 조사하면서 노량진이랑 영등포 일대 쪽방들 쪼고 있으니까 며칠 내로 정리될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시간 주시면….”
“그게 다야? 그럼 알았으니까 나중에 그 사람들 내역 정리되면 한꺼번에 넘겨 줘.”
“아, 선배. 우리 스타일이 그게 아니잖아. 내가 이렇게 선배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보고하는 거 보면 뭔가 큰 게 하나 걸려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후배는 의도적으로 목을 빼며 헛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혜원은 그렇게 허투루 대할 수 있는 선배가 아니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이게 어디서 장난질이야? 혜원은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정도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그를 째려봤다.
후배는 반사적으로 등 뒤에 숨긴 서류철을 빼들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는 않는다는 악명 높은 얼음 마녀에게 어줍지 않은 장난을 친 건, 분명 그의 불찰이었다.
“뭐야 그거?”
“서, 선배. 이거, 완전 대박 자료에요. 이번 사건, 선배 생각대로 연쇄살인사건이 틀림없다니까.”
후배는 자기가 찾은 증거에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다. 종전의 치기 어린 행동을 만회하기 위해 그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자료를 건넸다.
“대충 읊어봐.”
“나신일 씨가 말한 기간 중 짧게나마 같이 근무했던 사람이 총 마흔 여덟 명, 이 중 현재 신원이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 에, 그러니까 총 여덟 명이에요.”
“그건 방금 한 얘기잖아.”
“알았어요. 알았어. 성질머리는 급해가지고….”
“뭐? 이게 진짜 죽을라고…”
“워워, 아, 아닙니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이게 빠져가지고…. 보고 똑바로 안 해?”
“예, 그럼 보, 보고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덟 명 중 한 명에 대한 건인데요. 의심스러운 사람이 몇 더 있긴 한데, 그나마 이 사람이…"
“됐어. 잡설은 다 빼고 그 사람 얘기만 해. 뭐하는 놈인데?”
“보자. 이 사람이… 2년 전 쯤 전역한 양반인데… 이 양반이 이거 제대하고 나서… 사업 한답시고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 쓴 모양이에요. 사채에도 손을 좀 댄 것 같고.”
“…사채?”
“예,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사업하는 게 어디 말처럼 쉽나. 망했어요. 그것도 아주 쫄딱.”
“알만 하군.”
“근데 이 양반이 재수가 더럽게 없었던 게, 하필 그쪽 바닥에서 제일 악질적인 새끼들한테 돈을 꾼 것 같더라고요. 강력계 애들도 그 새끼들 얘기 하니까 완전 학을 떼더만. 전 우주급 핵폐기물 같은 새끼들이라고….”
“돈을 못 갚은 건가?”
“그렇죠. 애당초 그 새끼들 돈을 어떻게 갚겠어. 사업까지 망한 양반이…. 그렇게 작년 쯤 파산한 다음부터는 뻔한 스토리죠. 계속 업자들 눈 피해 도피 생활. 자, 그런데, 그런데 바로 얼마 전에 말입니다.”
거침없이 떠들어대던 후배가 마침내 파일 철을 펼쳐 보인다. 서류철 사이사이, 제법 두툼해 보이는 사건 보고서와 심문 기록이 꼽혀 있다. 문서의 작성일자와 접수번호, 그건 분명 류 대위 사건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자료다.
“5개월 전 즈음에 신고가 하나 접수됐어요. 경기도 안성 외곽에 있는 양봉장, 누가 거길 찌른 거지.”
“양봉장? 갑자기 웬….”
“그렇다니까. 그게 얘기를 들어보니까 말이죠, 그 양봉장이 원래 그 핵폐기물 새끼들이 가지고 있던 곳이더란 거예요. 거기 두목 새끼 취미가 양봉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씨바, 별 좆같은 새끼가 취미 한 번 좆 나게 고상해요.”
“됐고, 하던 얘기나 마저 끝내.”
“아, 예. 근데 그게 그 두목 취미라는 소문은 그냥 흘린 얘기고, 강력계 선배 말로는 여기가 원래 이 새끼들이 채무자 붙잡아서 조지는 곳으로 쓰인 것 같더라는 거야.”
“양봉장을?”
“그렇지. 선배, 이게 얼핏 생각하면 이상한데 정리해 나면 꽤 쌈빡한 얘기에요. 생각을 한 번 해 보자고. 으슥한 산 중턱에 양봉장이 떡, 하니 버티고 있으면 말이에요. 사방에 벌 떼가 쫙 깔려 있는데 누가 그 근처에 오겠냐고 벌에 물리면 좆될 수도 있는데.”
“그럼…”
“맞아요. 양봉장 벌떼가 그 장소를 완벽한 고립 지역으로 만들어준다, 이거야. 꽤나 자연스러운 천연요새가 되는 거죠.”
“불청객을 막아주는…”
“예, 그런 장소다 보니까 이 새끼들이 채무자들 붙잡아다 여기 창고에 가두고 조져도 들을 사람 하나 없다 이거야. 게다가…”
여기까지 말한 후, 후배는 조심스레 파일 철 맨 뒤편을 펼쳤다. 그곳엔 가지런히 정리된 사진 몇 장이 포개져 있었다. 사건 현장 채증 기록인가? 열 두어 장의 사진을 넘겨보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간다.
“이 개새끼들이 채무자 조질 때 있잖아요. 양봉장 근처에다 사람을 묻고 협박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양손 묶고, 윗도리 깔고 재갈 물려서 양봉장에 아랫도리만 파묻어버리는 거지.”
“아랫도리만?”
“예, 일부러 아랫도리만 묻는 거예요. 소리도 못 지르는 상황에서 그런 곳에 혼자 묻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우 씨발, 수 만 마리 벌 떼가 몸에 달라붙어서 물고 뜯고 할 텐데, 얼마나 좆 같은 경험이겠어, 그게.”
그는 코끝을 잔뜩 찡그리며 혜원에게 사진 몇 장을 건넸다.
유기된 어느 채무자의 변사체일까. 사진 속 시신은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벌레에 뜯겨 퉁퉁 불은 얼굴이 피고름에 얼룩졌고, 팔뚝과 무릎 위 허벅지에는 수많은 절창(切創)과 자상(刺傷)의 흔적이 남았다.
“이건?”
“이게 5개월 전에 신고 받고 출동한 경찰이 양봉장 인근에서 수습했다는 시체에요. 말씀드린 대로 아랫도리만 파묻힌 상태였다 하대요. 이 새끼들 이거, 산 사람 몸에 꿀을 잔뜩 발라 놓았던 것 같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시달렸겠지. 벌에 쏘이고, 개미에 뜯기고.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며칠 째 이 상태로 방치됐던 것 같다고 하대요.”
“끔찍, 하네.”
혜원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처참한 현장기록을 한 장씩 훑어 넘겼다. 수없이 많은 변사체를 봐왔지만, 이렇게 너덜너덜한 느낌의 사체는 오랜만이다. 이건 정말 심하군. 아무리 돈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순간, 혜원의 머리털이 쭈뼛 돋는다.
이 사진, 뭔가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