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방랑] 헤르만 헤세 , '크눌프의 후예'였던 히피들을 위한 변명 - 에콰도르 3편
서커스로 벌어들인 동전으로 그날 그날 숙박비를 치르고, 시장상인들이 준 갖은 야채로 숙소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던 밤들. 숙박비를 내고도 수입이 넉넉한 날엔 술도 마셨지. 마당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바이올린을 켜고, 북을 치고, 삶은 여행이자 동시에 축제였어. 그렇게 우린 함께 에콰도르의 도시를 떠돌기 시작했지. [남미방랑] 낯선 여행, 혹은 방랑하는 삶으로의 초대 - 에콰도르 2편 에 이어...
주말엔 시장으로, 평일엔 신호등 앞 건널목으로 출근했어. 남미 사람들은 우리를 세마포로(Semáforo)라고 불렀지. '신호등'이란 뜻. 빨간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건널목을 건너는 사이 차량들 앞에서 내 친구들은 묘기를 부려. 출근길의 정체. 잠깐의 지루함을 떨쳐준 세마푸로에게 차창 밖으로 손 내밀어 동전을 건네는 사람들.
묘기는 너무 짧아도 안 되고, 너무 길면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는 바람에 동전 걷을 시간이 없어. 나는 시간을 재어 묘기를 부리는 친구들에게 “짝. 짝” 끝마칠 신호를 주고, 묘기가 끝나면 환호성을 지르며 바람을 잡았어. 그리곤 동전을 건네는 사람들에겐
“Gracias!(고맙습니다)”
매일 오전 8시부터 10시 반까지 신호등 앞에서 일한 후 공원에서 놀거나 숙소에서 쉬다가 다시 신호등 앞으로 가서 오후 5시부터 7시 반까지 일했어. 하루 수입을 모으면 1인당 보통 15~20달러. 많을 땐 30달러를 버는 날도 있었지. ‘노동’과 '놀이'와 ‘방랑’이 함께 하는 삶. 하루 5시간 내리쬐는 땡볕 아래 땀 흘려 일하고, 각 도시의 명소와 광장을 싸돌아 다녔고, 큰 배낭 안에 곤봉, 디아블로, 데블스틱, 공을 갖고 다니며 방랑했어. 그래, 세상의 '길'과 '광장'이 우리의 일터였지.
비가 오거나 축제가 벌어져 우리가 지내는 도시의 숙박비가 몇 배로 오르고 만원사례가 되면 카톨릭 성당에서 운영하는 <카사 캄페시나Casa Campesina>란 곳엘 찾아 갔어. 그곳은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숙소'라고 했어. 오전 9시면 사람들을 내보내고 저녁 6시에 다시 문을 열었어. 그리고 단돈 2천원에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줬지. ‘노숙자 쉼터’라기 보다는 남미의 시골에서 올라온 푼팔이 노동자들의 임시거처 같은 곳.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가 갖고 다니는 서커스용품을 무척이나 신기해했지. 그럴 때면 성당 마당에서도 공연을 했어. 신부님의 요청으로 집 없이 거리를 떠도는 악사 노인과 파블로가 합주를 하기도 했지. 가난하지만 웃음 가득하던 밤들.
남자와 여자만 구분한 커다란 방들. 각 방마다 늘어선 수십개의 2층 침대. 비닐 커버가 씌워진 싸구려 매트리스에 누워 잠들며 난 떠올리곤 했지, 크눌프(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 주인공)가 그의 친구에게 했던 말을.
“진리가 무엇인지, 인생이 어떤 것인지는 각자 스스로 깨달아야 해. 이런 것들은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일세.”
히피 친구들과 떠돈 지 보름쯤 지났을 때, 난 가진 걸 다 털어간 키토의 강도들이 고마울 정도였어. 내 수중에 돈이 넉넉했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삶.
'여행'과 '관광'을 구분짓는 아주 단순한 기준이 있지. 가지면 가질 수록 '관광'에 가까워지고, 가진 게 적으면 적을 수록 '여행'에 가까워진다는 것.
때론 우리가 길에서 묘기를 부리고 돈버는 걸 구걸로 여기는 사람도 만났고, 공원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놀 때면 우리들을 놀기만 하는 한낱 배짱이로 여겨 한심스레 쳐다보는 어른도 만났지. 검정 양복입은 사람들은 침 뱉듯 “히피 녀석!”하며 지나가기도 했어.
히피(Hippie)는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발을 정점으로 도태되어 사라진 인간 종 - 호모 사피엔스 히피 -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백인, 중산층, 고등교육을 받은 자’가 주류였던 미국의 히피가 사그라들었을 뿐 그들은 여전히 지구상 곳곳에서 건재 해. 특히 남미에선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히피를 만날 수 있지.
"난 크눌프 같은 인물들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그들은 수많은 유용한 사람들에 비해 유용하진 않지만,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든 소설 속 인물 중 크눌프를 가장 사랑했던 헤르만 헤세가 살아서 히피들을 만났더라면 '크눌프의 후예'라고 탄성을 내질렀을지도 몰라. 헤세가 1927년에 발표한 <황야의 이리>의 경우엔 1960년대에 널리 읽히며 프랑스 68세대와 히피들의 성경으로 불리기도 했더랬지. 아무튼 그래서일까? 나는 <크눌프 삶의 세 가지 이야기>중 세 번째 장에서 신(神)이 죽기 전의 크눌프와 나누던 대화를 '히피들을 위한 위로'라고 여겨. 그리고 신의 크눌프에게 했던 말은 또한 유용한 수많은 사람들에 비해 무용할지 모르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사는 '나를 위한 변명'이기도 했더랬지.
“크눌프야, 나는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방랑했고 안주하는 이들에게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주었다. 너는 나를 대신했고, 나는 네 안에서 사람들로부터 조롱 받고, 사랑 받았다. 너는 나의 자녀, 나의 형제, 나의 한 부분. 네가 무엇을 즐겼든 어떤 일로 고통 받았든 나는 늘 너와 함께 했다.”
[남미방랑] 낯선 여행 혹은 방랑하는 삶으로의 초대 - 에콰도르 2편
[남미방랑]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 에콰도르 1편
Written by @roadpheromone
결국 돌고 돌아 우리는 크놀프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p.s 나는 어쩌면 관광만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
언제부터인가 '관광'과 '여행'의 구분이 사라져 버렸지요. 물론 '다름'이지 '옳고 그름'이란 판단의 잣대란 없지요. 그저 삶과 여행을 대하는 취향의 문제일 뿐. 지구별에서 아름다운 여행하시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