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의 철학 (메모) 01 : 돈(화폐)의 두 형식과 중앙은행의 역할
블록체인의 철학 (메모) 01 : 돈(화폐)의 두 형식과 중앙은행의 역할
이 글은 출판을 염두에 두고 ‘블록체인의 철학 – 신뢰의 혁명’(가제)의 원고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대목을 메모 형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스팀잇에만 단독 연재합니다.
제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탈중앙화’라는 키워드 때문입니다. 블록체인의 ‘혁명성’을 언급하는 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탈중앙화’와 ‘혁명성’은 어떤 관계일까요? 이 지점에서 제가 오랫동안 연구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이 개입합니다.
들뢰즈는 펠릭스 과타리(Félix Guattari)와 함께 『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1972)이라는 책을 씁니다. 이 책은 제가 번역해서, 2014년에 한국어 본으로 출판했습니다(참고 링크). 내용이 난해하기로 악명 높습니다. 이 책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낳게 만든 경제적 문제가 잘 파헤치고 있습니다. 바로 화폐와 관련한 국가와 중앙은행의 역할입니다. 그 한 대목을 짚어 가면서 설명해 볼까 합니다. 내용이 쉽지는 않지만, 초고라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인용문은 번역본의 쪽수입니다.)
먼저 ‘자본’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들뢰즈의 말을 봅시다. “자본주의 기계는 자본이 혈연 자본이 되기 위해 결연 자본이기를 그칠 때 시작된다. 자본은 돈이 돈을 낳거나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혈연 자본이 된다.”(387쪽) 이 문장에서 ‘결연 자본’이란 가령 상업에서 상품과 화폐의 관계를 통해 성립하는 자본입니다. 가령 어떤 물건을 싼 데서 사서 비싸게 팔면 자본이 증가합니다.
한편 ‘혈연 자본’은 상품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본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합니다. 들뢰즈는 맑스를 인용합니다. “이 가치는 경과하는 가치, 경과하는 돈, 그런 것으로서의 자본이 된다. (……) 이 가치는 경과하는,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실체로서 여기에 갑자기 나타나며, 이 실체에 대해 상품과 화폐 양자는 한낱 순수한 형식에 불과하다. (……) 이 가치는 원래 가치로서의 자신과 잉여가치로서의 자신을 구별한다. 마치 아버지 신과 아들 신이 구별되되, 이 양자가 나이가 같고 사실상 하나의 위격(位格)을 형성하듯 말이다. 왜냐하면 10파운드의 잉여가치를 통해서만 미리 지급한 100파운드는 자본이 되기 때문이다.”(387~388쪽; 맑스, 『자본』 1권 2부 4장)
맑스의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돈(화폐)’를 구별해야 하고, 자본가와 부자를 구별해야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 즉 부자는 자본가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오히려 부자가 대량 소비나 낭비한다면 자본가와 반대됩니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투자해서 가능한 한 많은 이윤을 올리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본가는 마음대로 돈을 쓰지 못합니다. 이처럼 자본은 자기 증식 또는 이윤 증가를 목적으로 사용되는 돈을 가리킵니다.
자본주의가 ‘자본의 자기 증식’ 또는 ‘이윤 증대’를 추구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은 굉장히 많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착한 자본가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가는 인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부품입니다.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경쟁합니다. 그래서 이윤이 적으면, 또는 더 정확히 말해 투자한 자본 대비 이윤(=이걸 ‘이윤율’이라고 합니다)이 적으면, 망합니다. 자본이 투자되는 영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돈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본이 투자됩니다. 그래서 투자 자금 대비 최대 이윤을 낳으면 그만입니다.
들뢰즈는 자본의 이런 성격을 ‘혈연 자본’이라고 표현하면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 맑스를 인용한 겁니다. “10파운드의 잉여가치를 통해서만 미리 지급한 100파운드는 자본이 된다”는 말은 이 내용을 집약합니다. 여기에서 100파운드는 투자 원금(x)이고 10파운드의 잉여가치(dx)는 이익입니다. 그래서 10파운드가 100파운드에 보태져(x + dx), 자본의 자기 증식이 성립할 때, 처음의 투자금 100파운드는 자본으로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이지요. 손해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원금이 0으로 수렴해서 소멸하는 길로 가겠지요.
이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문제가 논의되는 지점을 보겠습니다. 이 문제를 들뢰즈는 아주 간단한 말로 요약합니다. 총자본과 관련한 잉여가치의 저하 경향이 점점 더 심화된다는 겁니다. 복잡한 수식을 생략하면, 요점은 투자된 돈 대비 생겨난 이익이 점점 줄어든다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총자본은 원래 자본에 잉여가치가 덧붙여지면서 커갑니다. 그런데 이 지점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들뢰즈의 통찰입니다. 금융의 역할이 여기 있습니다. 기업의 산업자본에 융자를 해주면 총자본이 그냥 늘어납니다. 융자금에 합당하게 잉여가치가 일정 비율로 증가하지 않으면 총자본 증가분에 비해 잉여가치의 증가는 턱도 없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윤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투자는 계속 이뤄집니다. 그 돈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본이 계속 늘어나요. 중앙은행에서, 가령 미국 연방준비제도(FRB)에서 종이에 인쇄를 해 대면 자본이 늘어납니다. 발권력이 무서운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총자본은 계속 증가하되, 이익은 그에 비례해서 증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윤율은 줄어드는 것이죠. 들뢰즈는 그게 자본주의 자신의 본성 때문에 그러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왜 끝나지 않을까요? 바로 돈의 두 형식 때문입니다. 자본가와 그들의 경제학자들이 숨기려는 게 뭐냐면, “임금노동자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과 기업 대차대조표에 기입되는 돈이 같은 돈이 아니라는 결론”(389쪽)입니다. 전자에는 교환가치를 반영하는 화폐 기호, 지불수단, 즉 “화폐와 생산물들의 선택 폭 간의 일대일대응 관계”가 있습니다. 즉 얼마의 돈이 있으면 얼마의 상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한편 후자는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후자의 경우에 자본 권력의 기호들, 융자의 흐름들, 생산의 미분계수들의 체계가 있는데, 이 체계는 여기서 지금 실현될 수 없으며, 추상량들의 공리계로서 기능하는, 장기 경제 전망 능력 내지 장기 평가를 증언한다.”(389쪽) 장기 경제 전망 능력 내지 장기 평가라는 말이 최근 겪은 우리가 경험 속에서 잘 설명될 수 있습니다. 바로 프로젝트 파이낸스(Project Finance, PF) 대출이 좋은 사레입니다. 각종 개발 프로젝트지요. 이 개발이 완료된 후에 전체 가치가 얼마다를 미리 평가하고, 그것에 대해 은행이 돈을 빌려주고 융자해주는 겁니다. ‘장기 경제 전망 능력, 경제 평가’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융자는 그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미래에 대해, 미래 기대 이익에 대해 융자가 이뤄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여기서 지금 생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은행에서 통장에 돈이 꽂혀요. 그게 중요합니다. 현금이 입금됩니다. 은행에는 채권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남고, 기업에는 채무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남지만, 중요한 건 현금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이게 융자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고, 이건 말 그대로 돈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융자된 돈에 대응하는 이익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활동을 통해 결국 이익이 실현돼서 원리의 예상 시점에 되었을 때, 환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장 놓고 보면, “임금노동자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과 기업 대차대조표에 기입되는 돈”을 단순 비교하는 건 허구이자 사기라고 들뢰즈는 주장합니다.
“하나는 임금노동자의 계좌 속에 있고 다른 하나는 기업의 대차대조표 속에 있는 돈의 이원성, 두 테이블, 두 기입으로 돌아가 보자. 크기의 두 차원을 같은 분석 단위로 측정하는 것은 순전한 허구이자 희극적 사기로, 이는 마치 은하계들 간 거리나 원자 내부의 거리를 미터나 센티미터로 측정하는 것과도 같다. 기업들의 가치와 임금노동자들의 노동력의 가치 사이에는 공통 척도가 전혀 없다. 바로 이런 까닭에 경향적 저하에는 종결이 없다.”(391~392쪽)
후자는 조 단위, 몇 천 억 단위라면, 전자는 88만원, 연봉1억 등 이런 수준이죠. 급이 다른 거죠. 후자는 실제로 돈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래서 경제학자 베르나르 슈미트는 “순식간의 창조적 흐름”이라는 서정적인 묘한 말을 찾아냈다고까지 합니다. “이 흐름은 은행들이 자기들 자신에 대한 부채로서 자발적으로 창조하는 무에서의 창조이다. 이 창조는 지불 수단으로 마련된 화폐를 전달하는 대신, 충만한 몸의 한 극단에서 마이너스 화폐(은행의 채무로 기입된 부채)를 파내고, 다른 극단에서 플러스 화폐(은행에 기초한 생산적 경제의 채권)를 투사한다. 이 창조는 소득에 들어가지도 않고 구매로도 향하지 않는 <돌연변이 권능(pouvoir)을 지닌 흐름>이고, 순수한 처분 가능성이며, 소유물도 부도 아니다.”(403쪽) 이게 융자를 통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도 실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기분 나쁘죠.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이 뭐냐가 바로 확인됩니다.
어쨌건, 융자 상황에서 은행이 중심에 있다는 걸 목격하게 됩니다. “지불 수단 구성체와 융자 구조 사이에, 화폐 관리와 자본주의적 축적의 융자 사이에, 교환 화폐와 신용 화폐 사이에 존재하는 은행업의 이원성이 자본주의 체계에서 갖는 중요성은 이미 잘 밝혀진 바 있다.”(390쪽) 이게 경제학자 수잔 브뉘노프의 작업입니다.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은행의 이중적 역할을 교묘히 은폐하고 있다는 겁니다. 은행을 통해서 전혀 다른 두 종류의 돈이 같은 돈인 거처럼 여겨지도록 한다는 거죠. “은행이 융자와 지불 둘 다에 참여하고, 이 둘의 돌쩌귀에 있다는 점은, 이 둘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보여줄 따름이다.”(390쪽)
어음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어음으로, 내가 물건을 팔았는데 저쪽에서 돈을 아직 주지 않았지만 얼마 후에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환어음은 실물에, 산업자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회수가 가능합니다. 반면 은행 신용은 실물에 기반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담보가 없고, 언제 갚을 건지 기약도 없습니다. 특히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같은 융자는 못 갚을 수도 있습니다.
들뢰즈는 “환류”라는 표현을 씁니다. 흐름이 되돌아온다는 겁니다. 환류는 융자 화폐에서 지불화폐로 되돌아오는 흐름입니다. 다시 말해 은행에서 받은 융자로 기업 활동을 하고 그 기업 활동의 일환으로 월급을 지급한다는 거예요. 돈이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노동의 토대가 되는 융자로부터 노동이 가능해지고, 노동의 일정 결과물이 임금, 배당금, 이자 등의 형태로 지불되며, 돈이 도는 겁니다. 돈이 도는 경로가 융자에서 노동과 지불화폐 쪽으로 이동하기에, 돈이 되돌아온다고 환류라고 표현한 겁니다.
은행의 융자는 환어음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여기의 환수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배후의 조절자 역할을 하는 게 국가입니다. “조절자로서의 국가는, 직접 금(金)과의 관련을 통해서건, 간접적으로 신용 보증인, 단일 금리, 자본 시장의 통일성 등을 포함하는 중앙 집중화 양식을 통해서건, 이 신용 화폐의 원리상의 태환(兌換) 가능성을 보증한다.”(390쪽) 개별 은행이 빌려준 돈을 갚지 못했을 때 그것을 갚을 수 있도록 해주는 보증자 역할을 국가, 즉 중앙은행이 한다는 거죠. “따라서 은행업 실천의 두 양상인 지불과 융자라는 돈의 두 형식의 이원성이 지닌 깊은 은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이 은폐는 오인에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내재장을 표현한다.”(390쪽)
자본주의 자체가 은행업의 이중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국가가 행하는 역할은 이 자본주의의 작동, 태환 가능성을 원리상으로 보증해준다는 일입니다. 국가의 역할이 바뀐 거죠. 전제국가하고 자본주의 국가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합니다. 국가가 자본주의를 위해 기능하는 거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태환 가능성의 보증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죠. 그게 보증되었을 때, 융자가 일어나고, 융자가 되었을 때 산업자본이 가동되고, 그 산업자본의 바탕 아래 노동이 이뤄집니다. 이런 회로를 가능하게 만드는 출발점은 태환 가능성의 보증입니다. 이 보증은 정초행위입니다. 자본주의를 정초하고, 그 위에서 모든 에이전트들이 가장 낙후된 존재일지라도 열심히 뭔가를 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자본주의의 바탕에 놓여있는 게 뭔지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상은 @armdown 철학자였습니다.
cryptobyno님이 armdown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cryptobyno님의 BIG SHOUT OUT AND A BEAUTIFUL SUNDAY!
(본문은 경어체지만 gazua 태그라 반말 댓글 담...) 대학 시절 현실과 과학, 이론, 문화과학 읽던 때의 느낌이 새록새록~ㅋㅋ 스팀잇에 있다보면 가끔 형이 '천개의 고원', '안티 오이디푸스'의 역자, '혁명의 거리에서...'의 저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어. 이제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내시려나 싶어서 기대가 만땅이야~ 앞으로의 글 기대할게~^^
이런 글은 리스팀으로 박제해놓고 차근차근 음미해야죠.😁 형님 덕분에 들뢰즈에 계속 관심이 갑니다.
아름형 강의나 글은 이럴때 보면 어려움^
리스팀해서 정독 해야겠네요 ㅎㅎ 저도 가상화폐가 탈중앙이라는 단어에 혹했는데..좋은 글 보고 갑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두번은 읽어봐야겠네요
철학과 블락체인 조합! 신기하고 멋집니다.
근데 돌쩌귀는 오늘 처음 듣는 단어네요. 역시 철학자 형!
블록체인과 철학의 연계성 정말 새롭습니다.
철학은 어렵지만 어디에나 접목할수 있는 멋진말이지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제 막 시작한 뉴비라 딱히 여쭤 볼 곳이 없어서 busy는 어떻게 써야 보팅을 받나요? 요새 보팅 안해준다는 말을 들었는데 보팅을 받은신것도 같아서 궁금해서 여쭤봅니다ㅠㅠ 그리고 스팀잇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어디에 어떻게 질문을 해야하나요ㅠㅠ 글과 상관없는 질문 죄송합니다.
busy.org 사이트에서 글을 적고 busy 태그를 붙이면 됩니다.
태그 5개 중 하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최근 글에는 busy.org가 와서 보팅해주고 갔어요. 아마 잠시간 안됐었나봐요. 하필 제가 가입하고 나서. 앞으론 해주겠죠~~ 짱짱맨님과 더불어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오늘 드뎌 첫보상받은 날이어서 기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