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주말, 아빠의 하루

in #kr-daddy7 years ago (edited)

주말, 아빠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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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다. 나에겐 전혀 달갑지 않지만, 못난이 딸은 일주일 내내 기다리던 그 날. 마침 애 엄마는 볼일이 있어 하루종일 집에 없는 날이다. 나는 이날 새로운 직업을 갖는다, 짜파게티 요리사. 그러나 짜장면 한 그릇으로 성에 찰 리가 없다. 세 번째 직업인 산타가 될 차례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산타가 되고. 산타할아버지가 편지를 읽는 동안 나는 기다려야 한다. 아무 글자도 씌여있지 않은 종이를 들고서는 평소에 자기가 듣고 싶던 덕담을 한다. "ㅇㅇ야, 너는 평소에 밥도 잘 먹고, 물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엄마 말도 잘 듣고 해서 선물 줄게." 실컷 읊어낸 후에야, 선물이랍시고 구겨진 색종이를 한 장 나에게 넘겨준다. [이제 역할을 바꿔 내가 똑같이 편지를 읽고 과자를 하나 준다. 이제 역할을 바꾸어 내가 아이가 되어 산타의 선물을 받는다. 이제 역할을 바꾸어... ]- 15회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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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다. 애도 이제 지겨운지 잠시 멍하게 소파에 앉아 쉰다. 꿀 같은 시간, 폰으로 코인 시세를 확인한다. '자, 보자. 아까 매수한 구피가 10%하락이고 아까 매도한 스텔라는 우주로 날아갔고, 친구가 추천했지만 내가 사지 않았던 퀀텀은 8% 뜨억상...'

"아빠!아빠! 아빠! 아빠! "
"어.. 그래."
"아빠!아빠! 아빠! 병원! 병원놀이!"
"그.. 그래."


병원놀이가 시작되었다. 난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의사가 되어 콧구멍, 귓구멍, 눈, 입, 배꼽, 팔, 머리를 모두 진찰한다. ["코에는 콧물이 많으니 코를 좀 빨아내고 씁! 씁! 쓰쓰 쓰읍! 귀에는 귀지가 많이 들어있으니 귀를 청소하고 훅! 후후훅! 훅훅! 머리는....입원합시다. 링거 끼우고 주사 맞고, 약 먹자, 뱉지말고. 병원 밥 먹자, 엄마 밥보다는 맛 없겠지만.."]-23회 반복
애가 듣고 싶어하는 멘트가 있고 자기만의 정형화된 순서가 있다. 하나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해야한다. 넌 전생에 유격조교였니, 아니면 도제교육을 전문으로 하던 장인이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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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다. 아이도 지겨운지 잠시 정적이 흐른다. 꿀 같은 시간. 잠시 폰을...

"아빠!아빠! "
"어.. 그래."
"아빠! 옷! 아빠! 옷! 옷 가게 놀이!"
"그.. 그래."


3초 간의 꿀 같은 휴식이었다. 어디선가 옷을 주섬주섬 꺼내 오더니 나에게 대사를 할당해준다. ["아빠, 옷 3천원입니다 하세요. 못 깎아준다 하세요. 공짜라고 하세요. 옷 안 팝니다 하세요. ~해봐. ~해봐."]-약 21회 반복
저 귀찮은 손님은 결국 사이즈도 맞지 않는 벙거지 옷을 공짜로 사서 가게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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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집에 붙어있다가는 내 혀가 녹을 지경이다. 오직 집에서 놀기만 고집하는 딸을 잘 꼬드겨 밖으로 나가야한다. 최소한 운전하는 중에는 난 말을 안해도 되니까. 동물을 보고, 먹이를 주러 가자는 꼬드김이 결국 통했다. 집에 있는 당근을 길게 썰어 통에 담은 후 공원으로 향한다. 내 몸에서 빠져나간 에너지만큼, 토끼가 살찐다. '우리집 토끼도 아닌데, 왜 내가 내 돈 내고 먹이를 주고 있는가.' 따위를 생각할 정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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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내가 낙엽을 좋아하는만큼, 아이도 낙엽을 좋아한다. 나는 밟는 것을 좋아하는데 애는 손으로 집어 던지는 것을 좋아해서 문제지만. 오늘은 엄마가 없으니 손이 더러워져도 괜찮다. 아이는 이미 내 마음을 안다. 허락받을 생각도 없이 이미 반쯤 가루가 된 낙엽에 팔을 넣고 휘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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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이왕 더러워진 옷, 해먹에도 눕혀본다. 애 엄마가 있었으면 기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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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쳤다. 이제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미친듯이 집에 가고 싶다. 눕고 싶다. 코인 시세판을 들여다보고 싶다. 배가 고프다. 하루 2끼 라면 취식이라는 사치를 부려보고 싶다. 쓸데없는 웹서핑을 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담아 "집에 갈까?"라고 묻는 말에 "토끼 배고플 시간이야. 밥 주러 가자."라고 답하는 딸. 아아. 아빠의 배고픔보다 토끼의 배고픔이 더 신경쓰는 이타, 박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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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쪼끔밥!"
"뭐?"
"아, 쪼끔밥 먹고 싶다."
근처 식당에서 파는 어린이 세트메뉴 중 볶음밥을 칭하는 말이다. 쪼끄맣고 거만한 사장님은 날 데리고 기념품 가게의 인형을 한 번 시찰한 뒤, 식당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이제 끝이 보인다. 해도 넘어갔고, 집사람은 지금쯤 집에 도착했을 시간. '이제 마지막, 밥만 잘 먹어라. 아니, 안 먹어도 상관없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난 소중한 존재야.'라고 나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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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애를 데려다 놓은 후 , 밤 10시가 되어서야 주말, 아빠의 하루가 시작된다.

해가 지기 전에 가려했지 내 친구와 내가 찾던 그 할매 그 국밥집,
아주 간절한 그 마음으로
소주를 꿈꾸고 한잔하자 말했던 곳
이제 꿈나라로 떠나야 하는 소중한 내 딸이여.
너는 자라.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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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로서 공감 100% 입니다..
특히 마지막에 '밤 10시가 되어서야 주말, 아빠의 하루가 시작된다.'는 문구는 요즘 제 마음을 그대로 적으신것 같네요^^

육아 선배들 말로는, '이것도 한 때다. 지금이 좋을 때다. 나중에 애가 아빠 필요없다고 할 때 얼마나 마음이 헛헛한줄 아느냐.'라고는 하던데. 공감하시나요?ㅎㅎ

이것이야말로 전쟁 같은 사랑이군요😂

하루하루가 그렇네요. 여유롭게 까페에 앉아서 멍하니 보내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다행히 저는 9시에 주말이 시작되었어요 ㅠㅠ 한시간 더 빠르니 다행인거 맞죠?

부럽습니다. 사실 이 날은 특별한 날이었고, 평소에는 한 명이 더 잠들어야 아빠의 주말이 시작됩니다.

속편한 저같은 사람이 말씀드려봐야 염장질 일듯 한데...
글이 재밌습니다ㅋㅋㅋㅋ 시트콤같아요ㅎ
저는 겪어보지 못한 일상의 치열함속에 사랑이 엿보여요~
좋은 아빠, 남편이신거 같네요!! 자주 뵈요~

저도 예전엔 그랬습니다. 갑자기 그 시트콤이 인간극장으로 변하더라고요.

저는 아주 어릴 때는 잠만 자고, 그 후에는 나가 놀다가 집에서는 책만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괴롭힐 시간이 적었던 모양인데 나중에 유아교육을 어떻게 하셨는지 비결을 여쭤봐야겠습니다. 안 그럼 제 미래도 대구님처럼 시트콤과 인간극장이 공존하게 되겠군요.

저도 어릴 때 @kmlee 님과 비슷했는데 어디서 이런 애가 튀어나왔나 모르겠네요. 애가 더 작을 때부터 일찍 재우려고 초저녁부터 애 엄마와 번갈아가며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쓸데없이 등장인물의 동작을 크게 흉내내곤 했는데 그게 역할극 욕구로 발달된 모양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15회 반복 ㅎㅎㅎ

따님이 아주 귀엽습니다. ㅎㅎ 정말 이쁘네요. :) 활동적인 아이인 모양입니다. 하루가 아주 길었네요 ㅋㅋㅋ

자기 나름의 놀이를 찾아서 반복하는 걸 즐기긴 하지만 집 안에서 노는 걸 좋아합니다. 연휴 때 3일 내내 외출 한 번도 못한 적도 있습니다. 영하 5도에 나홀로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길이 즐겁다고 느낀 인생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정말요?? 영하 5도 쓰레기 버리는 길이 음..... 오분도 안 되실텐데 ... 아버님 쵝오!!!!! 이십니다! :))
따님이 너무 행복할 거 같아요 :)

ㅋㅋ 요즘 아이 아빠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네요. 내 몸이 부서져라
애쓰시는 좋은 아빠십니다.ㅎ

일년 통틀어 얼마 안 되는 '봉사일'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국밥이 너무 먹고 싶었거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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