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15
웨더스비 교수 씀
지난번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의 치밀한 계산과 미국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무엇인가 성과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미국무장관 번즈의 합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처음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한국의 공산당이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박헌영이 북한에서 받아온 찬탁의 논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신탁통치는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와 다른 민주주의적 국가의 우호적 원조와 지원이라는 논리입니다
1945년 12월 31일 아침, 모스크바에서 연합국들이 한국에 신탁통치를 수립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남한에 퍼져나가자, 수천명의 인파가 서울 한복판에 모여서 이 결정에 항의했다. 비슷한 집회가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도 시작되었다. 중국에서의 오랜 망명에서 최근 돌아온 김구는 분노했으며 그는 미군정 정부로 부터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는 합의(신탁통치)에 대해 한국의 좌파를 비난했으며 “모든 댓가를 치르고 러시아를 달래려고” 신탁통치를 수용했다고 미국을 책망했다.
사실, 좌파정당들은 한국의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박헌영이 북한지역에서 소련 장교들을 만나서 상황을 논의하는 동안, 서울의 공산당 지도부는 1월 3일 반탁 시위를 계획했다. 그들은 모스크바 합의는 미국의 작품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소련이 이런한 행동에 반대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박헌영이 돌아와서 당이 신탁통치 합의를 지원해야한다고 했을때 그것은 충격적이었고 혼돈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훌륭한 공산주의자로서 지시에 복종해야 했다. 그날 이후 그들은 공산당은 모스크바 회담의 합의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이종식이 “이시대 처럼 러시아의 권위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더 큰 시험에 들게 한 적이 없었으며, 그 권위의 힘이 더 빛나게 보여진 적이 없었다.”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박헌영은 소련의 정치장교들이 급하게 초안한 정당성에 대한 정밀하고도 서로 연관되어 있는 당의 입장을 가지고 왔다. “한국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결정에 대한 한국 공산당의 성명”은 미국과 영국이 소련이 협조한 얄타회담에서의 “민주주의를 강화시키기 위한 투쟁에 그들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면서, 소련과 미국은 국제적 협력을 강화하고 평화와 안전보장을 지원할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했다. “현재, 3개 강대국들은, 파시즘에 대한 전쟁동안 책임을 다한 것 처럼, 세계의 지도적 책임감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결정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발전이며 강화이다”
한국내에 신탁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로 인해, 당은 오랜기간의 일본지배와 국가적 통합의 부재의 파멸적 결과로 인한 이러한 단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우리는 이러한 단계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라고 성명서는 밝혔다. 이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본통치의 결과보다는 3개 연합국에 책임을 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3개국의 우호적 지원과 협조를 이전의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와 유사한 제국주의적 보호의 수립으로 그리고 있다”
당은 특별히 김구의 단체가 한국 인민들을 잘못 이끌고 있으며, 그들을 민주주의 국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기만하고 있다고 주장하고자 했다. 한국 인민들에게 가장 큰 위험인 김구의 행동에 대항하기위해, 당은 “전체 한국 인민들에게 논의의 여지없이 진보적 성격을 지닌... 모스크바 회담 결정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르게 알려주어야 한다.”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 결정이 카이로 회담에서 약속한 것과 같이,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보다 견고하며 결정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을 선언해야 했다. 쓴약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국가를 건설하는 문제에 있어서 전국적인 단합의 수립”이라는 만장일치의 조건을 만족시키면 신탁통치의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는 약속을 제시하고자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만일 한국인들이 합의에 대한 반대를 중지하고 그대신 모스크바가 만족할 만한 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독립은 보다 일찍 온다는 것이다.
다음의 포스트에서는 어떻게 모스크바 회담의 합의가 북한지역에서 찬성을 받았으며 어떻게 조만식의 신탁통치 찬성에 대한 거부가 그의 정치적 생명이 끝나도록 했는지를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George McCune, “Occupation Politics in Korea” Far Eastern Survey 15, No. 3 (February 13, 1946); Richard Lauterbach, Danger from the East;
Robert Scalapino and Chong-sik Lee,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Part I;
The statement Soviet officials wrote for the communist party in Seoul comes from Russian State Archive of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Fond 17, Opis 128k, Delo 205, Listy 2-4]
다음번 글에서 다뤄질 모스크바 회담의 합의가 북한지역에서 찬성을 받았는지에 대해 궁금해지네요 ㅎ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이야기들이 다루어 지리라 생각합니다
소련은 박헌영을 의심하기도했지만 박헌영은 생각보다 더 소련에 충성스러웠죠. 그덕분에 지지를 잃어버렸지만....
공산주의는 원래 국제주의 였으니까요.
트로츠키가 주창했던 세계혁명이 공산혁명의 기본이었고 정통파 박헌영은 그 노선을 당연히 받아 들였고요
매우 긴 역사와 전투의 효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껴집니다.
the present is the result from the past
아래로 내려오는 권력은 이제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어요.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으로부터 소멸되는 힘으로^^
그 단순한 원칙이 그토록 지켜지기 어려울 줄은 몰랐었지요
피드에 영문판이 올라와서 부랴부랴 위즈덤님 블로그를 방문했어요!
요즘 정신 없이 지내다보니 한 회를 놓쳤네요
ㅠㅠ
신탁통치라는 게 부정적인 인식으로 박혀 있어서 읽는 내내 자꾸 편향적 시각이 되어버렸어요
해방된 후 맞닥뜨린 신탁통치가 또 다른 식민통치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역사를 알아가는 데도 자꾸만 감정이 개입되네요-
그런 시각은 좋지 않은 거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