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자크 데리다 - 용서하다

in #jacquesderrida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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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용서라고 생각한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붙들고 더듬거리며 내놓는 사랑의 고백,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시도하는 무모한 도전, 타인이 손사래 치며 뜯어말려도 끝끝내 누군가에게 걸어볼 수밖에 없는 신뢰.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몇몇 큰 시도들을 신중히 꼽아보아도, 용서보다 크지는 않다. 이러한 시도들의 실패를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 용서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용서’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쓰는 걸까.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용서’는 단어로서도, 행위로서도 드물게 쓰이는 듯하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유감입니다’. 그러나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들어본 지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라는 말도 아주 오래전에 들어봤던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지금은 용서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아니다. 의무로서의 사과, 면책을 위한 사과가 있고, 그에 따른 논쟁과 소란스러움, 그리고 이내 찾아오는 망각이 있을 뿐이다. 용서하는 사람도, 용서를 비는 사람도 없다. 어쩌면 데리다의 책 <용서하다>는 효력을 발휘할 안방을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는 처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용서하다>가 가지고 있는 서술 방식, 즉 대답하기 대신 질문하기, 조립하는 대신 해체하기, 가 지금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할 자신의 입장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본군 성노예, 민간인 학살, 과거사 청산, 남녀 혐오의 문제로 가득 찬 이 사회에서 ‘용서’가 낯설어지는 것은 아이러니이면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해답을 주지 않는 <용서하다>는 머리를 아프게 한다. 우리는 용서하고 싶지 않으니,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애써 이 강의를 독해하고자 한다.

프랑스어로 용서를 의미하는 ‘Pardon’이란 단어를 분석하면서, 데리다는 기증의 개념을 빌려와 일종의 인수분해를 시작한다. 용서를 둘러싼 의미의 괄호, 덧씌워진 개념들을 벗겨내는 것이다.

‘내가 준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 진정한 의미의 기증은 불가능해진다. ‘준다’라는 개념은 수혜자와 증여자의 관계를 거래 관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비록 수혜자가 증여자에게 실질적인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증여자는 수혜자에게 준 것에 대하여 일종의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준다’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 진정한 의미의 기증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준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불가능하므로, 진정한 기증은 존재할 수 없게 되며, 이것이 하나의 아포리아, 즉 해결 불가능한 난관이다. 같은 의미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용서’도 불가능하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납득에 가깝다. ‘그래, 그 친구가 그럴 만했어’, ‘그 사람 말도 일리가 있네’라고 하며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더 꾸짖거나 질책하지 않고 묻어두는 것’으로서의 용서는 아니다. 그러나, 용서하기로 한 순간부터, 용서의 대상은 용서받을 일이 되었으므로, 모순된다. 이것이 용서의 아포리아다. 이러한 종류의 아포리아는 용서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는 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어느 정도의 잘못까지 용서할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데리다는 프랑스의 유대인 철학자였던 장켈레비치의 글을 인용한다. 나치의 피해자였던 그에 따르면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추가적인 주장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는데, 즉 ‘시효 없음’의 문제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죄는 있다. 이것은 역사가 시간의 축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무효하게 만든다. 시간이 흘러도, 피해자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죄는 존재한다. 특히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나 일본군 성노예의 문제가 그러하다. 이러한 죄들은 인간 존재를 ‘상위 인간’과 ‘하위 인간’으로 나누게 만든 가학적, 기계적 사고로 인해 실현 가능해졌고, 실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를 훼손시켰기에 위험하다. 장켈레비치는 이러한 범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 역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다.

다시, ‘시효 없음’이란 ‘용서 불가능’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데리다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시효 없음’은 죄가 죄로서 영원히 존재하게 만드는 장치일 뿐, 용서하고 말고의 권리는 여전히 피해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질문, ‘누가 피해자인가?’, ‘누가 용서를 할 권리를 가지며, 누가 사죄해야 하는가?’. 데리다는 명확히 답을 내놓지 않는다. 물론, 피해자를 대신하여 국가나 기관이 용서할 수 있음은 불가하다고 단언하지만, 이미 가해자와 피해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경우, 누가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해줄 수 있는지 지침 같은 것은 제시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어느 독일 청년이 장켈레비치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홀로코스트 범죄와 상관없는 세대였지만, 아주 신중하고 사려 깊은 단어로 ‘사죄’라는 단어 없이 진실한 사과를 건넨다. 만약 그가 독일을 방문한다면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환대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장켈레비치가 답장한다. 독일을 방문할 수는 없지만, 만나게 된다면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자고. 그 역시 ‘용서’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이것은 이상적인 용서의 사례가 아니다. 장켈레비치는 본인의 세대에서 일어난 일이 잊히길 바라지 않았고, 용서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세대가 다음의 일로 넘어가야 할 필요성은 인정했다. 그것을 원치 않으면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용서라는 말은 ‘용서’가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환경과 사건보다도 훨씬 좁은 영역만을 밝힐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일까? 사려 깊은 독자라면, 장켈레비치가 함께 연주하자고 청한 피아노, 음악이 단순한 화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서도 갈래를 나눈다. ‘사죄’만이 ‘용서’를 깨울 수 있을까? 사죄가 선행되어야만 용서가 가능한 것일까? 그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용서는 요청되지 않아도 발생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문득, 연쇄살인범에게 가족을 잃은 피해자가, 범인을 용서하겠노라고 선언하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범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는 그 사람을 용서했고, 나의 가슴은 분노와 답답함으로 차올랐었다. 죽임당한 당사자의 심정은? 다른 피해자의 가족들은? 왜 요청하지 않는 용서를 자행하는가? 그러나 용서를 저지른 이는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어떤 심리전문가들은 그것이 본인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 용서는 타당한 일이었을까?

데리다의 강의는 시종일관 묻기를 계속한다. 묻고, 의미를 벗기고, 단어를 해체하고, 다시 물으며 용서가 무엇인지 함께 알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나는 ‘사과’만을 생각한다.

사과하지 않는 사회. 나의 입장을 피해자와 동일시하길 혐오하는 사회. 용서를 비는 대신,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역전시키려는 사회. 분명 누군가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 나. 용서받지 못한 나. 그러한 우리가 섞여서 살아간다.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라고 했지만, 용서는 우리 속에서 사라졌다. 죽음의 흔적, 사체도 없이 증발했다. 그렇게 우글거리는 사회가 피워낸 것은 피로 개화한 증오의 꽃이다. 그리고 그 꽃의 수분에 성공한 어떤 벌들이 있다. 꽃은 계속 필 것이고, 용서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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