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생은 없다. 행복한 순간이 있을 뿐.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바란다. 매 순간 기쁨으로 넘쳐흐르고, 매 순간 자신감이 있으며, 매 순간 성취감을 느끼길 바란다. 언제부터인지 이런 고집이 내 안에 스며들어 나는 기쁘고 황홀한 느낌에만 젖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라면 바랄수록, 도망가려 하면 도망갈수록, 피하고자 하면 피할수록, 더 숨통이 막혀왔다. 나는 어디서부터 잘 못 됐는지 알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분명 내 안에 해결하지 못한 감정이 있을 거야. 그걸 마주해야 해. 그래야지 나는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

감정을 마주하고, 부딪히고자 하는 행동은 용감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의도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오류가 있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고통을 이용했다. 그리고 나를 더 옭아맸다. 그것은 학대였다. 스스로 학대해서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이 아닌 다른 삶으로 가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그렇게까지 행복을 잡기 위한 나의 행동에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그만큼 고통은 나에게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고, 힘든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벗어날 수 없는 구덩텅이로 더욱더 빨려 들어만 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는 동생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최근 근황을 얘기했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동생의 말에 있었다. 인생을 같은 부정적인 느낌으로 보고는 있었지만 동생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래도 언니랑 지금 이렇게 연락하고 있는 게 행복 아니겠나.’

순간 나는 동생 앞에서 살짝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머리 안에서 ‘뎅-’하는 종이 울렸다.

나는 내 인생을 불행한 인생으로 여겼다. 평범하지 않은 태생과 가난했던 유년시절. 그리고 잘난 거 하나 없이, 우울한 지금까지의 인생까지도. 그러나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인생이라 한다면 결국 이분법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모든 인간, 아니, 모든 생물에게 행복한 인생이란 없다. 마찬가지고 불행한 인생이란 것도 없다. 누군가의 인생이 불행해 보인다면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한 사람을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분법적인 개념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불행한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 인생에는 행복한 순간이 한 번도 없어야 하며, 행복한 인생이라 한다 해도 불행한 순간이 한 번도 없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왜 우리는 인생이란 것을 단 두 가지의 방법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그리고 그 의문은 곧바로 나에게도 해야 할 질문이었다.

‘행복한 인생에도 불행한 순간이 있으며, 불행한 인생에도 행복한 순간이 있다.’라는 명제가 참으로 밝혀지기 위해서는 명제를 바꿔야 했다. ’행복한 인생도 불행한 인생도 없다. 단지 행복한 순간과 불행한 순간이 있을 뿐.‘이라고.

그리고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지금까지 내 인생을 모두 불행한 인생이라 치부하며 살았으니, 나에게는 불행한 순간만 기억날 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불행하다.’라는 명제 앞에 과감히 등을 돌릴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내 인생을 살 뿐이며, 이 인생은 다양한 감정과 사건들로 이루어진 다채로운 공간이기 때문에, 그저 삶이 나에게 오는 대로 느끼면 될 뿐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앞으로의 인생에 행복만 잡으려는 집착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올 수 있어. 힘든 순간도 마찬가지고. 

그냥 단지 나는 살아가기만 하면 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알아서 올 거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

최선을 다해 순간순간을 살자. 

그리고 끝이 날 때 어쨌든 살아냈다는 데에 흠뻑 취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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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months ago 

오늘 하루도 잘 살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는 말 좋네요 ^^ 저도 아침에 일어난 지금 이 순간 기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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