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조건의 재편 - 배우는 법을 배우기
그제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동의와 호응에서 조소와 비판까지 스펙트럼이 참 다양했습니다. 모든 분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어제의 글은 곧 나올 책 <코로나 혁명 - 뉴노멀의 철학>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초고인 셈이지요.
교육과정 개편이라는 프로젝트는 단편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초중등 단일교육과정 - 대학 뉴 리버럴아츠 - 대학원 전공'이라는 큰 그림 아래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몇몇 내용은 포스팅을 통해 공개한 바 있는데, 띄엄띄엄 한 것이라, 찾기는 어려울 수 있겠네요.
오늘 올릴 글은 '새로운 앎의 조건'에 대한 내용인데, 전반부입니다. 길어서 후반부는 다음에. 이런 조건에서 '뉴 리버럴아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개진될 겁니다.
앎의 조건의 재편 : 배우는 법을 배우기
근래에 인문학은 ‘위기’와 ‘열풍’이라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대학에서는 몇몇 경제·경영 계열을 제외한 대다수 순수 인문사회 계열에 학생들의 기피 현상이 두드러지는 반면, 대중적으로는 아이폰 열풍의 주역인 스티브 잡스의 선언이 시발점이 되어 ‘위안을 주는 인문학’ 강의와 통찰을 준다는 ‘가벼운 당의정 인문학’ 입문서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둘러싸고 이른바 ‘전공인문학’은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위해 대학원 과정에서 가르치고 학부 과정에서는 ‘교양인문학’만 가르치자는 주장이 논쟁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또한 서양 고대와 중세의 ‘리버럴아츠(Liberal Arts)’ 또는 자유학예(自由學藝)를 학부 교양교육의 핵심으로 삼자는 논의도 다양하게 이어졌다. 이런 상황은 인문사회 연구자뿐 아니라 대학과 학술 관계자라면 누구라도 알고 느끼는 내용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역사를 조금 돌려보자. 1979년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료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포스트모던 조건 : 앎에 대한 보고서>(La condition postmoderne. Rapport sur le savoir)라는 얇은 저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고도 선진 산업 사회에서의 앎의 문제들(Les problèmes du savoir dans les sociétés industrielles les plus développées)”을 논해 달라는 캐나다 정부(퀘벡주 대학협의회)에서 의뢰를 받아 작성되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지금 시대에 맞는 ‘앎에 대한 보고서’가 필요하다. 료타르의 작업은 “사회의 정보화(informatisation de la société)”(p. 14)라는 조건을 상정하고 있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 상황, 말하자면 인공지능, 기후위기, 코로나19 같은 지구적 감염병이 얽혀 있는 상황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자각하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대한민국은 2020년 현재 세계 강대국 순위(Power Ranking) 9위, 제조업 세계 5위, 교역량 세계 10위 안쪽에 있는 ‘선진국’이다. 이 중 특히 강대국 순위는 US News를 통해 발표되었지만, 시장조사 및 컨설팅 기업 BAV 그룹, 마케팅 기업 VMLY&R,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 등에서 73개국에 대해 20,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를 통해 ‘지도자, 경제적 영향력, 정치적 영향력, 국제 동맹의 강도, 군사력’ 등 5가지 특성에 기반한 점수의 등가 평균에 기초하여 산정한 국제 랭킹이다(https://www.usnews.com/news/best-countries/power-rankings).
아마도 (1) ‘자신’에게 체감되지 않는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2) 오랜 개발도상국적 ‘타성’, 그리고 (3) 지금도 매우 열악한 여러 부문의 다층적 문제(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다는 건 사실이다!) 때문에 객관적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이른바 ‘선진국’들에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또렷이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이 대한민국이 아직 ‘선진국’이 아니라는 증거는 못 된다. 대한민국이 후지다면, 선진국도 역시 후지다. 우리가 알던 선진국이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환상은 깨지고 액면가가 그대로 드러났다.
대한민국이 맞닥뜨린 현실은 지구의 미래를 위한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대한민국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했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를 비웃는 데 사용했던 ‘빨리빨리’라는 표현은 어느덧 한국의 힘을 상징하는 ‘다이나믹 코리아’로 평가가 바뀌었다. ‘빨리빨리’ 문화와 ‘다이나믹 코리아’가 사실은 같은 ‘에너지임’을 이제 누구라도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앎의 영토에서 후진국일 때, 무엇을 배워야 할지에 대한 답은 비교적 단순했다. 선진국이 이미 알아낸 것을 빨리 배우면 되었다. 무릇 앎에는 지식과 기능이 포함된다. 편의상 여기서 지식은 사실에 대한 앎(x는 y이다)을 가리키고, 기능은 하는 법에 대한 앎(z를 할 줄 안다)을 가리킨다. 요컨대 후진국 상태일 때는 빨리 따라가는 것이 능사였다. 이것을 ‘빨리 따라잡기’(fast follow) 전략이라 불렀다. 그래서 선진국 유학은 분명 유효한 전략이었다. (유학의 후유증에 대해서는 다른 데서 따져본 바 있다.)
후진국을 탈피했다는 건, 알고 싶은 것을 남한테서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무지의 수준이 평등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앎은 발명이나 창조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이 지구상에서 아직 아무도 모르니, 나 자신이 손수 알아내야만 한다. 구체적 상황을 대입하면 이렇게 풀어 말할 수 있다. 알아야 할 것은 너무도 많고, 풀어야 할 문제는 너무나 가지각색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앎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이런 구분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하는 ‘재인식(recognition)’과 ‘배움(apprenticeship)’의 구분과 대응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재인식은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반면에 배움은 처음으로 알아가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에서 다루었으며, 지금은 내용을 보안했지만, 새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http://bitly.kr/oxLMU3Ro3). 조금 거칠고 도식적이만, 후진국적 앎은 재인식이고 선진국적 앎은 배움이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배움이며, 더 이상 재인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