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3권(4)
제2절 국련군의 본격적 방어태세의 완비
제1항 재한국련군 사령관 임명과 국련군의 방어태세 완비
아 육군은 기술한 바와 같이 압도적인 병력과 우세한 장비로써 38선 전역에 걸쳐 급습을 감행해 온 적에 의하여 서전에서 주력에 심대한 타격을 받고 한강 이남선에 철수하였다.
춘천과 강릉 방면의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아 육군의 주력 대부분은 한강 이남선의 수도공방전에 투입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적의 급습과 기습을 병용한 공격에 주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육군 주력이 붕괴된 상태 하의 한국 정세란 풍전등화와 같았으며 승승장구 남침을 기도하는 적을 저지할 아무런 대책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 놓인 한국에 대하여 미국이 긴급원조를 실시하게 된 것은 제4편 제2장에서 약술한 바와 같으며 또 일본에 주둔하였던 미 지상군은 우선 그 선견대로 하여금 경부선 방면의 적 주력에 대하여 반격을 개시하게 하고 서전에서 붕괴된 아 국군의 재편을 실시하기 위하여 시간적 여유를 얻고자 지연작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아 국군에 대한 무기 원조는 공수로 실시되어 7월 3일에 M1소총 990정이 대전비행장에 도착하였음을 효시(嚆矢)로 하여 7월 6일에는 105밀리 유탄포 13문, 57밀리 대전차포 23문이 계속 입수된 후 국군 장비의 재편에 보급되었다.
7월 7일에는 존 처치 준장이 국군 재편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국군의 병력과 장비 재편에 협조하게 되었으며 국군도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낙오병 수습과 재편에 전력을 경주한 결과 제1군단을 편성하고 경부선 방면에 진출한 미군 선견대와 협동하여 적의 남하에 대비하였다.
동 기간 중에 미 제1기갑사단 및 미 제25사단이 한국에 상륙하고 7월 23일에는 영동 및 함창 방면에 진출하여 금강 방어선에서 미군 주력의 상륙을 위한 지연작전을 감행하며 후퇴하는 미 제24사단을 엄호하였다.
미 제24사단의 지연전으로 적은 미군 주력이 한국에 상륙하기 전에 미군 선견대 및 국군을 격멸할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미 제1기갑사단은 대전~영동 간의 경부선 방면에 미 제25사단은 함창~상주의 선에 진출하여 감투하던 미 제24사단을 엄호하는 한편 진지를 교대하고 후속 상륙하는 미 주력부대(미 제2사단, 제3사단, 제1해병사단)의 상륙을 엄호하였다.
미군 주력부대의 상륙을 엄호할 목적으로 한국으로 급거 출동한 미 선견대가 축차 전선에 투입되어 적의 남침을 저지, 한편 미 제24사단은 대전 북방 금강 방어선 상에 배치되어 본격적인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되자 7월 13일 이들 부대의 통합지휘차 일본에 있던 미 제8군사령부가 한국 대구에 그 지휘소를 이동하게 되었고, 또한 미 제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이 재한 국련군 지상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국련군은 반격 태세를 일단 완료하였으며 횡단면이 광대하고 산악이 중첩한 호남지방을 피하여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면서 지연전을 감행, 주력의 전개와 아울러 전기를 포착하여 일대 반격전을 취할 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며,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총사령관의 합의에 의하여 아 한국육군의 모든 부대의 작전 지휘권을 미 제8군 사령관이 직접 장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