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2권(7)
(三) 개전 시 아군의 전반적 방어 태세
전술한 바와 같이 적의 침공이 나날이 절박해 오고 있을 무렵 아 육군 당국은 국내에서의 중요 행사 혹은 괴뢰정권 측이 특히 기념하는 기념일 등을 계기로 있을 수 있는 적의 침공 기도를 미연에 분쇄하기 위하여 경비태세를 더 한층 견고히 할 것을 기하였으니 개전 전 2개월 내에 아 육군이 취한 작전상 조치는 다음과 같았다.
(1) 메이데이를 계기로 한 경계의 실시
단기 4283년 4월 21일 육군총참모장 육군 소장 채병덕은 북한괴뢰군 및 남한 각 지구에서 준동 중인 잔여 공비들이 5월 1일을 전후하여 남한 침입과 폭동 야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불온 사건 발생에 대비하여 대기 태세 및 경계 태세에 돌입할 것을 결의하고, 각 부대에 대기 태세 및 경계 태세 실시를 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가) 각 사단장은 각 관내 경찰국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관내 순찰을 철저히 할 것.
(나) 실시기간
ㄱ. 대기 태세 기간: 4월 27일 12:00-5월 3일 12:00
ㄴ. 경계 태세 기간: 4월 29일 24:00-5월 2일 12:00(주 부록 제3 육본 작명 제57호 참조)
그런데 당시 대기 태세 및 경계 태세에 관한 세부적 경비실시의 요령은 특별히 규정된 바 없었으니 그 세부에 이르러서는 각 단위대장의 판단에 맡겨 있었던 것이다.
(2) 대적 정훈 공작의 실시
단시 4283년 5월 1일부 육본 작명으로 아군은 38도선 아 제6, 제8사단 정면 적의 대규모적 선전전에 대항하여 정훈 공작 2개 소대를 파견 대적 선전에 종사케 하였다. 이러한 적의 선전전은 그들이 남하 침투케 한 괴뢰유격대가 전멸적 타격을 받음에 따라 취하여 진 조치로서 한편으로는 적 정규군의 야심만만한 침공 의도의 표현이었다. 당시까지 아 후방 공비의 세력은 극히 약화된 상태였으니 아 국군 일반장병은 그러한 자신에 고무되어 적세를 경모(輕侮: 남을 업신여겨 모욕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주 부록 제4 육본 작명 제63호 참조)
(3) 5.30 총선거 실시를 계기로 한 경계의 실시
단기 4283년 5월 8일 육군은 북한괴뢰군이 최근 침공할 태세를 취하고 있으며 국내에 잠복 준동 중인 잔여 공비가 5월 30일 총선거 실시를 기하여 폭동을 야기 코자 기도중임을 판단하고 대기 및 경계 태세를 실시하여 국내 경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결심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가) 실시 종별 및 기간
대기 태세 5월 9일 12:00부터 5월 27일 12:00까지
경계 태세 5월 27일 12:00부터 6월 2일 12:00까지
(나) 각 부대장은 비상소집 및 비상 출근에 만전의 태세를 취할 것.
(다) 각 사단장은 관내 경계 순찰에 철저를 기할 것.
(라) 수도경비사령관 및 헌병사령관은 수도지구경계 순찰을 철저히 할 것.
(마) 제1, 제6, 제8 사단장 및 제17연대장은 관하 38도선 경비병력의 증가와 경계순찰을 철저히 할 것.
(바) 각 부대장은 특히 관내 형무소에서의 불온사건 발생에 대비하여 원조를 구할 시는 육본의 지시없이도 적극 원조할 것.(주 부록 제5 육본 작명 제67호 참조)
기간 중 군은 독립기갑연대 1개 장갑 중대를 5월 17일 12:00 제1사단에 배속케 하여 개성 토성 청주(靑舟) 간 선의 정찰 수사(搜査)에 임케 하여 남침하려는 북한괴뢰군의 기도를 분쇄하도록 명령하여 경비의 강화를 꾀하였으며, 한편 동년 5월 28일 22:00부터 6월 2일 12:00 경 태세가 끝날 때까지 군은 제1사단 소속 포병 1개 중대를 개성에 파견하여 특별 경비를 실시토록 하였다.(주 부록 제6 육본 작명 제70호 참조)
그리고 전기 작명 제67호에 의한 경계 태세 돌입 시일은 5월 24일 24:00부터 변경 실시 되었으며(주 부록 제7 육본 작명 제63호 참조)
기간 중 이승만 대통령의 춘천 방면 순찰에 따라 수도경비사령부 약 2개 대대의 병력과 제6사단의 약 1개 대대 병력이 5월 28일 22:00부터 5월 29일 18:00에 이르는 기간 경호 및 경비에 임하였다. (부록 제8 육본 작명 제71호 참조)
이상과 같이 장기에 걸친 특별 경비 기간 중 38선 정면에서는 특기할 만한 적의 적극적 움직임이 없었으며 다만 일부 후방 산악선(山岳線) 변에서 잔존 공비가 선거방해를 위한 책동을 기도하였을 뿐 군의 경계 태세 실시는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아 육군 당국이 이러한 경계 태세의 완료와 동시에 다소의 안도적 기분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육군 장교 구락부의 설치이다. 군은 단기 4283년 6월 5일 육본 작명 제74호로서 일부 육군학교의 이동을 실시하고 서울에 있던 육군참모학교 건물에 육군 장교 구락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그 준비를 명하였다. (주 부록 제9 육본 작명 제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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