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육군전사 2권(2)

in AVLE 일상17 days ago (edited)

제2항 괴뢰군의 작전계획 및 그 실시의 개요

(一) 작전계획

개전을 위한 적의 작전계획은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이래 그들의 계속하여 온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북한 적화공작의 진행과 아울러 일찍이 소련 지배자에 의하여 계획되어 있으며 북한의 괴뢰정부가 수립되매 이르러 점차 구체화 되었던 것이다.

지금 불행히 서전에서의 아군의 실패로 적의 작전 문서를 입수치 못하여 이를 인용할 수 없음이 유감이나 단편적으로 입수된 정보의 종합으로서 판명된 바에 의하면 작전계획의 수립이 북한 괴뢰군 자신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소련군에 의하여 작성된 것은 확정적인 사실로 되어 있으며, 그들은 남침 개시의 시기를 주로 그들의 군사적 침공 준비의 진척과 관련하여 단기 4283년 춘기가 아니면 늦어도 6월 말까지로 예정하였던 것이다.

6.25를 기하여 남침을 결심함에 앞서 그들이 평가한 당시의 국내외 정세는

(1) 국제적으로는 소련의 직접적 비호와 인접 중공의 후원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음에 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완만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다시 말하면 태평양 방어문제 있어 미국은 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만, 한국, 호주, 뉴질랜드 등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제국과 용이하게 타협을 보지 못하리라고 단정한 것이며 또 미국 태평양 방어권 내에서 한국이 제외되었음으로 그들이 침공을 개시하여도 미국의 무력간섭은 없으리라고 본 것이다.

(2) 국내적으로는 남한에서의 반공 정책이 점차 효과적으로 발전되어 북한 괴뢰정부가 파견한 유격대나 혹은 지방 공비들이 거의 잔멸의 비운에 빠져 있었으며, 한편 북한 내에서도 점차 국토 양단 독립정책으로 인한 제 모순이 노출되기 시작함에 따라 일반적으로 민심의 이반이 심대하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즉 방대한 군사 준비로 인한 북한 일반 인민들의 경제생활이 궁핍의 도를 가하게 되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기만적이며 과격한 독재강압 정책으로 민심의 이반이 점차 심대해 감과 아울러 심지어는 대부분의 공산주의 열성분자 간에 있어서까지 혐오적 반동적 태도가 증대하게 되었음에 감하여 북한 괴뢰 정권은 새로운 국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한편 괴뢰군은 대한민국이 실시한 5.10 국회의원선거 결과에 있어 정부 여당 인사의 허다한 낙선과 중간파적 인사들의 당선을 보고 곧 그들 공산괴뢰 정권이 남한에서 인민들로부터 조속한 시일 내에 지지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오산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정세 판단 하에 적은 6.25를 기하여 남침을 개시할 것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단기 4282년 이래 육군본부 정보국에 의하여 판단되었던 적 남침 공격 방향은 다음과 같았다.

가. 제1안

주공 철원 정면

주로 경원선에 연하는 철원~전곡~의정부선

조공 ㄱ. 연안 개성방면 견제공격

ㄴ. 옹진정면 전략적 수세

ㄷ. 강원도 정면 전략적 수세(저 철원이동지구)

ㄹ. 후방 교란공작

나. 제2안

주공 개성 정면 주로 경기선 방면

조공 연안정면, 철원정면: 견제공격

옹진정면, 강원도 정면: 제1안과 동

다. 제3안

주공 장단 정면 구화리 약간 서방에서-장단-문산선

조공 연안정면, 개성정면, 철원정면: 견제공격

옹진 정면, 강원도 정면: 동 전 안

라. 별안(축차 공격안)

전반적 작전의 주공방면은 역시 제1, 2, 3 안 중의 1을 채택할 것이나 적은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아군 전력 발휘의 불리한 상황을 작위하기 위하여 옹진 및 연안반도를 축차로 공략하여 각개격파를 감행한 다음 강대한 병력으로써 삼팔선 중앙지구를 돌파할 것을 예측하는 안

즉 1차 공세 옹진방면, 2차 공세 연안방면, 3차 공세 강원도 방면에 일부 양동주력으로서 중앙지에 주공 이상의 4개 공격 방향 판단안 중 아 정보국은 여러 각도로 이를 평가한 후 제1안을 그 수위에 놓고 또한 38선을 돌파한 적은 한강(본류)선까지 신속히 남하 진출을 기도하여 아군 주력을 서울 이북 지구에서 포착하여 결전을 강요 최단시일 내에 수도 서울을 그 수중에 넣으려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수도 점령의 정치적 의의가 지대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한강은 전략적 요선이며 강변의 요충인 서울은 적의 남침 상 전략적 요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서울 점령 후 적은 최대한 2개월 내에 남한 전역을 석권할 것을 기획하였으니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미군의 직접적인 전투 참가가 없으리라고 오산 한데 기인한 것이었다.

(二) 작전계획실시의 개요

단기 4283년 6월 10일 적 괴뢰군총참모장 강건은 각 사단장 비상비밀회를 개시하고 언제든지 전투에 돌입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출 것을 지시하였으며 한편 6월 초순부터 38선 일대에 병력집중을 개시하여 23일경에는 보병 7개 사단 1개 여단 전차 2개 사단을 38선 일대에 집결시켰다. 그런데 남침을 위한 적의 병력이동 집중상황은 다음과 같다.(주 부도 제1 개전직전 적 병력배치상황도 참조)(부록 괴뢰군 남침지령서 참조)

(1) 강원도 정면

제5사단은 6월 22일 나남을 출발 양양으로 이동함

제12사단은 6월 18일 원산을 출발 양구로 이동함

제2사단은 6월 12일 함흥을 출발 화천으로 이동함

(2)의정부 정면

제3사단은 6월 23일경 평강을 출발 운천리로 이동함

제4사단은 6월 22일 진남포를 출발 연천으로 이동함

전차 제105사단과 전차 제16사단은 6월 22일경 평양을 출발 연천으로 이동함

(3) 개성정면

제1사단은 6월 23일 남천을 출발 구화리로 이동함

제6사단은 6월 23일 사리원을 출발 계정으로 이동함

(4) 유격대관계

제 766부대는 6월 12일 회령을 출발 간성에서 승선하였음

한편 적은 보병 6개 사단과 전차 1개 사단을 예비사단으로서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다.

제7사단 해주

제8사단 간성(38경비보안대를 개칭)

제10사단 숙천(제2민청훈련소를 개칭)

제13사단 신의주(제1민청훈련소를 개칭)

제15사단 회령(제3민청훈련소를 개칭)

전차 제17사단 평양

이와 같이 병력의 이동 배치를 완료한 적은 드디어 6월 25일 05:30 38선 전역에서 포천 의정부 정면을 주공으로 주문진 춘천 고랑포 옹진 개성정면을 조공으로 하여 일제히 서울 점령을 목표로 남침을 개시하는 한편 제766부대(회령 군관학교 생도부대) 및 유격대를 동해안 안인리에 상륙시켰다.(주 부도 제2 괴뢰군 남침 상황도 참조)

Coin Marketplace

STEEM 0.16
TRX 0.15
JST 0.028
BTC 57975.44
ETH 2289.64
USDT 1.00
SBD 2.46